374화. 허풍
로드릭 시티 외곽 지미와 루시의 여관은 한적한 시장 거리와 달리 손님들로 북적였다. 먹고 마시는 것은 계절을 타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로벨 로드릭 공작이 잡아온 신묘한 짐승의 가죽, 용의 가죽을 구하려는 기사와 용병 때문이었다.
로벨은 마른자리를 골라 모닝스타를 묶고 실내로 들어갔다. 칼과 도끼를 찬 무서운 사내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무거운 칼을 찬 로벨은 어디 가나 주목받았다.
칼밥 먹는 직업에 은원(恩怨)이 따라다니는 것은 당연지사라, 새로운 칼잡이의 등장은 새로운 의심을 불러왔다. 하지만 잘못된 견제였다. 따지고 보면 로벨이 이 지역 터줏대감 칼잡이였다.
“아이고, 아이고, 영ㅈ... 기사님 오셨습니까! 기별도 없이 이런 누추한 곳에... 아이고! 싫다는 것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여관주인 지미가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예전에는 어린 집사가 한숨지을 만큼 눈치 없고 둔했는데, 여관장사 이후 많이 유들유들해졌다. 눈치도 빨라져서 로벨을 만나러 온 기사들을 피해 호칭을 바꿨다.
여관주인의 반응을 본 칼잡이들은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이 동네 기사면 크게 경계할 필요 없었다. 시비 붙으면 피곤해지는 것은 외지인인 자신일 테고 말이다.
“장사 잘 되네?”
“그야 뭐, 자비로운 영주님 덕분이지요. 와인으로 내올까요?”
“아니. 맥주로.”
이제 전국구로 이름을 떨치는 ‘리암 수사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보았다. 눈 덮인 거리가 포근했다. 상인과 용병들은 장삿길 막힌다고 싫어하지만, 로벨은 거리의 오물을 가리고 먼지를 거두어서 좋아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소.”
로벨 앞자리에 기사가 앉았다. 약속하고 기다린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로벨은 칼자루를 살짝 당기고 시선을 돌렸다. 등 뒤의 큰 활과 허리춤의 작은 활이 인상적인 떠돌이 기사였다.
“오랜만이오, 폴라 경.”
“나 역시 반갑소. 공작.”
악수는 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기를 보이는데 소매를 더듬는 것은 개그였다.
“이곳은 공작의 안마당이니 곳곳에 눈과 귀가 있겠지. 연락하지 않아도 찾아올 거라 생각했소.”
로벨은 술잔을 기울이며 주위를 살폈다. 진짜 정체를 숨겨야 할 사람은 로벨이 아니라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강철성의 수배령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이 상시 주둔하는 늑대성 앞에서 칼부림할 용자는 없겠지만, 밤일은 모르는 것이다.
“무슨 일로 온 것이오?”
로벨이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낮췄다. 위험을 감수하고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더스틴 폴라 경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용을 잡은 것이 사실이오?”
“...그게 궁금해서 왔소?”
입 밖으로 꺼내니까 어째 부끄러웠다. 더스틴 폴라 경 역시 드물게 딴청 피웠다.
“저들이 하도 호들갑을 떨어 물어보았소. 흠흠.”
그리고 중요한 일이 아닌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로벨을 몰래 훔쳐보는 루시에게 빈 맥주잔을 가리켜 보이고 말했다.
“신년행사에 암살이 있을 것이요.”
맥주가 코로 나올 뻔했다. 마도(魔道)에 발을 담근 경이로운 평정심이 아니었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걸 먼저 말하시오.”
“당장 위험한 게 아니잖소?”
용 잡은 것은 위험한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서쪽의 제후라고 하오.”
늑대성은 볼탄 반도 북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여기서 서쪽이면 검은 숲 내지 포클랜드였다.
“어찌 알았소?”
“공작도 알다시피 최근 암살자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오.”
보람차게 지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로벨은 뭐라 위로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성내 경비를 강화하겠소.”
더스틴 폴라 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전부요? 더 궁금한 것이 없소?”
로벨은 술잔을 비우고 대답했다.
“본인을 노리는 거면 평소보다 조심하면 되고, 배후를 밝혀야 하면 암살자를 잡으면 되오. 그보다 경이 걱정이오. 강철성으로 이미 곤란할 텐데 적이 늘지 않겠소?”
로벨은 안쓰럽게 생각했다. 더스틴 폴라 경에게는 성(城)도, 병사도 없었다. 하지만 자유롭고 강인한 동방의 활잡이 기사는 덤덤했다.
“공작 때문에 온 것은 아니오. 겸사겸사 온 것이지.”
“무슨 뜻이오?”
“공작의 신년행사에 그자도 올 것이오.”
“그자?”
어쩐지 반문을 많이 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화살깃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영생의 비밀을 가진 자. 영겁토록 죽지 않는 자. 불로불사의 흡혈귀 군주 드라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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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시찰을 마치고 늑대성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로벨을 알현하러 온 영주와 기사가 한 수레였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귀띔을 받아가며 무용을 칭송하고 가문을 칭찬했다. 적당히 진상품을 받고 적당한 하사품을 내렸다. 시 서펜트 가죽으로 만든 혁대와 주머니로 충분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본격적인 연회준비가 시작되었다. 예년과 다른 것은 시 서펜트의 잘생긴 머리통이었다. 신년행사에 참석하는 기사들이 가장 궁금해 할 것이 시 서펜트의 전리품일 테니 대놓고 메인 홀에 내놓았다. 중요한 것은 전시하는 장소인데, 어린 집사가 기막힌 생각을 내놓았다.
“이건 좀...”
“아니! 왜요? 위용 넘치고 좋잖아요? 늑대 공작이 아니라 용의 공작이라 불리겠어요!”
로벨이 앉는 의자 위에 뱀 머리가 떡하니 걸렸다. 길게 나온 혓바닥이 정수리에 닿을 듯 말 듯해서 소름 끼쳤다.
“자자. 이 망토를 두르세요. 아론다이트인지 아롱다이어트인지 세우고요. 가만있자, 아야랑 이야카를 옆에 앉히세요. 좋아요! 완벽해요!”
머리에는 용, 옆구리에는 회색늑대, 두 팔에는 마법검이 있으니 실로 위용이 넘쳤다. 펄프 대장이 진솔하게 감탄했다.
“호오, 왕관을 써도 그럴듯하겠군요.”
눈알이 펄프 대장에게 돌아갔다. 리암 수사가 한마디 하려고 입술을 떼었다가 그냥 닫았다. 표정을 보니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그만큼 멋지다는 뜻이외다. 늙은이의 말이니 귀담아듣지 마시오.”
볼탄 반도의 왕이나 다름없지만, 칭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샘 포클 이후 하나 된 포비아 왕국이 분열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의 전쟁이 시작될 수 있었다.
“포클랜드... 아, 맞다.”
로벨은 아롱다이어트를 치우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왕의 위엄이 사라지고 평소의 로벨이 되었다.
“포클랜드에서 암살자를 보냈나 봐.”
늑대성이 발칵 뒤집혔다.
“아니잇!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생각해보니 더스틴 폴라 경을 타박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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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인테리어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고 울프 용병단을 소집했다.
“입구만 지킬 게 아니죠! 2층 창문에 한 명씩 배치해요! 화장실에도 대기하고요! 무기요? 당연히 챙겨야죠! 쇠뇌도 장전하세요!”
어린 집사의 꼼꼼함은 대단했다. 성 안팎의 경비를 2배로 늘리고, 최소 3년 복무한 용병을 고르고 골라 아성 곳곳에 배치했다. 연회에서 시중들 하인도 로드릭 영지 토착민만 뽑았다. 그야말로 철저한 암살대비였다.
“손님들이 불편하겠는데?”
“불편이요? 그럼 편하게 해줘야죠! 메인 홀에 들어오는 손님은 모두 무장해제시키도록...”
“아니. 아니. 그 불편 말고. 기사의 무기를 빼앗다니? 명예롭지 못하잖아?”
“명예가 밥 먹여주나요? 살고 봐야죠!”
“...기사 가문의 집사가 할 소리가 아니잖아? 명예를 잃으면 죽은 거야. 아니, 죽은 것만 못해.”
후대 사람을 위해 기술하자면, 로벨이 유별난 게 아니다. 이 시대의 기사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실용주의 마인드를 가진 어린 집사가 유별난 쪽이었다. 시대를 2백년쯤 앞서 갔다.
“칫! 그럼 어떡해요? 신원이 확실한 기사만 입장시킬까요?”
“그것도 안 돼. 모욕 받았다고 생각할 거야.”
로벨은 갑옷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년연회에 홀로 갑옷을 입는 것은 이상했다. 무장한 경비들과 어우러져 위압감을 줄 것이다.
“우웅...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마녀 키르케가 명예와 안전의 갈등을 풀어주었다. 어린 집사는 그게 말이 되냐고 화를 냈지만, 그 외 측근들이 훌륭하다 극찬해서 바로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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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일에 치러지는 신년행사는 ‘새로운 시작’이란 거창한 의미에 비해 항상 조촐했다. 겨울이 끝나지 않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고, 장거리 여행을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매년 새로운 전설을 만드는 늑대성 공작이 새해 일찍부터 ‘용’을 자랑한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용이었다. 송아지만한 뱀 머리를 용이 아닌 다른 짐승으로 폄하할 사람은 없었다. 용의 증거는 머리통만이 아니었다.
“이 망토가 용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요. 에헴. 창칼은 물론이고, 아바레스트로 쏜 화살조차 튕겨내지.”
로벨은 시 서펜트 망토를 걸치고 수시로 자랑했다. 가끔씩 무딘 단검으로 긁어 보이기까지 했다. 질 좋은 가죽이면 칼질 한 번에 쉬이 잘리지 않으니 시 서펜트 가죽 또한 마찬가지였다. 칼 좀 댔다고 찢어지면 가죽이 아니라 종이나 솜일 것이다.
“오오오! 과연 용의 가죽이오!”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용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용’이란 브랜드에 홀딱 넘어간 기사들은 용의 가죽이라 안 잘린다고 철썩 믿었다. 창으로 찌르고 불로 지져도 끄떡하지 않는다는 허풍에 ‘당연히 그렇겠지!’라 호응했다.
“이러면 암살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죠.”
마녀가 ‘어흠! 어흠!’ 거리며 자랑했다. 어린 집사는 어이가 없었다.
“저 멍청한 기사들이 믿는다고 암살자까지 믿을까요? 무슨 자신감이야?”
마녀는 검지를 세워 좌우로 까딱였다. 오랜만에 보는 마녀표 건방짐 제스처였다.
“의심만 해도 충분해요. 암살은 자기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잖아요? 기회는 한 번뿐이고, 실패하는 순간 죽으니까요. ‘용의 망토가 정말 칼과 화살을 막는다면?’ 그런 의심이 생기면 실행하지 못해요.”
“아무리 그래도... 만약이 있는데...”
어린 집사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자 마녀가 미소 지었다.
“기사님은 강해요.”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어느 때보다 말이죠.”
어린 집사는 무슨 말이냐고 묻지 못했다. 아성 밖이 혼란스러웠다. 성문을 책임진 외팔이의 고함이 들리고,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렸다. 의심이 편집증 수준인 어린 집사는 암살자의 작전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누가 왔길래 저래요?”
마녀가 까치발을 들고 성문을 보았다. 그때, 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로벨이 돌아왔다. 모두가 우러러볼 상석에 앉아 어린 집사가 강조한 위엄 있는 자세를 취했다.
“정말 왔네.”
어린 집사와 마녀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로벨답지 않게 긴장감이 묻어났다.
“누군데요? 알아요?”
로벨 대신 서기관을 자처한 리암 수사가 우렁차게 답했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어린 집사의 콧등이 와락! 꾸겨졌다. 오랜만에 듣지만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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