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3화 (373/605)

373화. 눈

로드릭 시티로 돌아오는데 열흘이 꼬박 걸렸다.

시 서펜트의 부산물을 옮기느라 걸음이 늦어진 탓도 있지만, 때 이른 폭설로 길이 험해진 탓도 있었다. 늑대도로를 미리 정비하지 않았으면 눈길에 오도 가도 못 할 뻔했다.

로벨은 캐벌리어 모자를 벗어 1인치쯤 쌓인 눈을 털어내고 축 처진 공작 깃털을 매만졌다.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다.

“성문을 열어라! 기사 나리께서 오셨다!”

허풍쟁이가 두 팔 활짝 벌리고 소리쳤다. 로드릭 시티의 쪽문이 빠끔히 열리고 야간근무 중인 용병이 머리를 내밀었다.

“어느 기사 나리 말이오?”

“네놈들 먹이고 재워주는 기사 나리다!”

허풍쟁이가 창자루로 용병의 머리를 때렸다. 용병은 허풍쟁이를 알아보고 ‘히끅!’ 거리며 쪽문을 닫았다. 허풍쟁이가 헤실헤실거려도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울프 용병단 창단 멤버로 고참 중에 최고참이었다.

겨울바람에 꽁꽁 닫힌 성문이 열렸다. 어스름한 새벽빛 사이로 횃불이 하나둘 밝혀졌다. 경비초소에서 자다 깬 겁쟁이 일당이 달려 나왔다. 댓바람에 싸락눈이 날리고 큼직한 웃음이 오갔다.

“봄에나 오실 줄 알았습니다요.”

“내 집 놔두고 왜?”

로벨은 수레 짐칸에서 웅크리고 자는 마녀를 깨우고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성을 바라보았다. 서리 같은 달빛이 눈 덮인 성탑을 하얗게 감싸고 있었다. 로벨은 옷매를 다듬고 가까이 있는 용병에게 명령했다.

“늑대성에 가서 전해. 이 도시의 주인이 돌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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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로벨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망토 한 장 딸랑 걸치고 성 밖으로 달려나갔다. 센스 넘치는 전령은 늑대성에 오르기 전 울프 용병단 요새에 소식을 전했고, 그 덕분에 펄프 대장과 발가락이 영내 남은 용병을 끌고 나와 간소하게나마 개선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꼭 오셔도 이 시간에 와서...”

3경 근무를 마치고 막 자려는데 끌려 나온 용병이 투덜거렸다. 초저녁에 푹 자고 지금 나간 4경 근무조가 부러웠다. 하지만 로벨 일행이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기상천외한 고용주가 기상천외한 것을 가져왔다.

“으하하하핫! 봐라! 이게 진짜 용대가리다!”

외팔이와 싸움개가 자기 몸통만한 ‘용머리’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졸음이 확 깨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노안이 일찍 온 중년 용병은 연거푸 눈을 비볐다.

“진짜 용이 있었어?”

“그걸 잡았다고?!”

로벨 일행이 가져온 것은 시 서펜트의 머리만이 아니었다. 쇠처럼 단단한 비늘과 쇠가죽보다 두꺼운 뱀가죽이었다.

“영주님, 이게, 이게 다 뭐예요?”

어린 집사는 수레에 씌운 천을 벗기고 할 말을 잃었다. 손바닥만한 비늘이 가득 쌓여 있었다. 무두장이가 아니라 가치를 짐작할 수 없지만, 크기만 봐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로벨이 뿌듯한 미소로 자랑했다.

“시 서펜트의 비늘이야.”

“그걸... 진짜 잡았어요?”

“응. 물론이지.”

어린 집사는 할 말을 잃었다. 진짜 용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용이 있어도 잡아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용은-시 서펜트 역시- 신화 속의 짐승이었다. 그런 것을 뒷산의 멧돼지처럼 사냥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옹알이할 때부터 가족처럼 지낸 영주님인데, 머리가 굵어지고 수염이 듬성듬성 나면서 거리감이 생겼다. 뭐랄까, 정다운 누이가 아니라 역사책이나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 같았다

“우리 영주님... 맞으시죠?”

로벨은 어린 집사의 조심스러운 표정을 오해했다.

“이게 전부야! 보물 같은 거 없었고! 고기는 슐츠 경 영지민에게 줬어! 그렇게 보지 마. 이것도 페닝이 될 거야.”

“...영주님이야 말로 저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누구를 돈 귀신으로 알아요?”

그래도 아직은 로벨이었다. 힘세고 착한 동네 바보 영주님이 맞았다.

“일단 들어가요. 해가 뜨려면 1경이 더 지나야 하니까요. 씻고 옷 갈아입으세요. 저 용... 부스러기 같은 것은 어찌할지 천천히 고민해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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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공작이자 무적무패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 북해에서 용을 잡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송아지만한 용머리가 증거였으니 가장 의심 많은 상인도 의심하지 못했다. 용병들이 몰래 빼돌린 비늘과 가죽이 시장으로 흘러나갔고, 개울 하나를 건널 때마다 새로운 전설이 태어났다.

“용비늘로 갑옷을 만들면 세상의 어떤 창도 뚫지 못한다고 떠들어요.”

“응? 그냥 강철로 만들어도 못 뚫는데?”

“끓여서 먹으면 만병(萬病)이 낫고 불로장생한다는 소문도 있어요.”

“윽... 비릴 텐데...”

로벨은 바위를 허리 높이로 들어서 천천히 회전했다. 처음에는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가속이 붙으면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빨랐다. 회전속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손을 놓았다. 5살 어린아이만한 바위가 눈 쌓인 정원 저편으로 사라졌다.

‘바위 던지기’는 기사들이 즐겨 하는 체력단련 중 하나였다. 젊은 기사들은 몇 개의 바위를 깨트렸나 헤아려 자랑하고 했다.

“와... 힘이 더 세졌네요?”

지금의 로벨 앞에서는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기사들도 입을 다물 것이다. 평균적인 바위보다 2배 큰 것을 2배 멀리 던졌다. 그리 굵지도 않은 팔에서 어떻게 저런 괴력이 나오는지 신기했다.

“응. 힘이 점점 붙는 거 같아.”

로벨은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위 몇 개를 던져도 피로가 쌓이지 않았다. 심지어 땀조차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겨드랑이와 등으로 스며들어 오싹했다.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건가?’

최근 훈련을 뜸하게 했는데 몸은 점점 좋아졌다. 어디가 끝일지 알 수 없으니, 전성기란 말조차 무색했다.

“아무튼, 기회니까 조금씩 시장에 뿌릴까 해요.”

“응?”

“용 비늘 말이에요.”

어린 집사는 훈련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엄폐물 뒤에서 나왔다.

“신기하긴 하지만 그닥 쓸모없더라고요. 대장장이 말로 잘 갈면 단검으로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굳이 냄새나는 비늘 단검을 가지고 다닐 필요 없잖아요? 약으로 쓰일까 해서 닥터 줄리안에게 조금 줬더니 그냥 칼 받침으로 쓰더라고요.”

“그래...?”

로벨은 애써 벗겨온 비늘이 쓸모없다고 하자 실망했다.

“가죽은 아주 좋아요. 무두장이들이 질기고 부드럽다고 극찬하더군요. 큰 조각을 모아 망토를 만들고, 찌꺼기가 남으면 혁대나 도끼집을 만들라 했어요.”

“그래? 잘했어.”

로벨은 시 서펜트의 질긴 몸뚱이를 떠올리고 좋아했다. 어린 집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불에 타지 않고 물에 젖지 않는 마법의 망토가 될 가능성이 커요.”

“지, 진짜?”

“진짜일 리 있나요. 그렇게 소문이 날 거라고요.”

어린 집사는 손가락을 비비며 얼마에 팔 수 있을지 계산했다. 한 번에 대량으로 팔면 신비감이 사라져 가치가 떨어졌다. 용 비늘은 조금씩 조금씩 암암리에 시장에 내놓아야 하고, 용가죽 망토는 거상들이 모였을 때 경매에 부쳐 팔아야 했다.

“슐츠 가문과 갯바위 마을에 수익을 나눠줘.”

“그 미친 기사요? 왜요? 용을 잡아준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귀한 고기를 전부 주고 왔다면서요?”

“솔직히 귀하진 않았어... 맛도 그저 그랬고...”

늙어서 죽은 닭을 푹 삶아 먹으면 비슷할까? 로벨과 호른 경은 용고기가 대단하다는 전설을 믿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구시렁거리면서 갯바위 마을에 보낼 페닝도 예산에 넣었다. 그동안 벌어들인 페닝이 상당하니 이정도 자비는 베풀어도 되었다.

“아참, 내일부터 손님이 찾아올 거예요.”

“누가? 왜? 하필?”

“하필은 빼세요. 이제 곧 신년이잖아요. 샤바샤바할 늙은 기사들이 오는 거죠. 덤으로 용대가리... 가 아니라 용의 상징을 구경하고요. 아마도 후자가 주목적일걸요? 의심은 많아가지고...”

로벨은 가죽 장갑을 벗어 흙을 털었다. 바위를 들었다 놨다 한 우악스러운 손가락으로 서리 맺힌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거친 팔과 넓은 어깨에 비해 목은 참 가늘었다. 어린 집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연회준비는 제가 할 테니까, 영주님은 평소처럼 조용히 지내세요. 이제 와 정체를 들키면 좋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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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비질하다가 지쳐 그만둔 눈길 사이로 로드릭 시내를 거닐었다.

하루걸러 한 번씩 눈이 내리니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길가에 수북이 쌓인 눈 더미를 아이들이 만든 조잡한 눈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가게 간판을 가린다고 못마땅해 하는 상인이 수시로 부수었으나 겨울이 즐거운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닝스타는 새로 신은 신발이 어색한지 자꾸 발을 굴렀고, 그때마다 눈발이 크게 일어나 거리의 이목을 끌었다. 몇몇 영지민은 로벨을 알아보고-혹은 모닝스타를 알아보고-반갑게 인사했지만, 대부분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꽁꽁 싸맨 기사의 정체를 알아챌 만큼 눈썰미가 좋지 않았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벨을 본 적 없는 영지민이 많았다.

‘인구가 많이 늘었어.’

옛 광장, 그러니까 중심가에만 지어졌던 저택이 어느덧 성벽 아래까지 늘어났다. 늑대성 언덕 아래와 울프 용병단 요새 주변을 제외하면 어디나 크고 작은 집이 있었다. 성 안의 인구만 4천 명이고, 성 밖 농민까지 합치면 5천 명이 넘었다. 페르젠 시티, 버팅거 시티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규모였다.

오늘날의 로드릭 시티는 북부대로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혹은 그 반대항으로 이용되는 교역도시였다. 본래는 노스폴드 시티가 그 역할을 했지만, 로드릭 항과 늑대도로로 거상들은 노스폴드보다 로드릭 시티를 애용했다. 물론, 낮은 관세와 안정된 치안도 한몫했다.

노스폴드 시티의 상업규모가 특별히 작아진 것은 아니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최근 불평불만이 많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늑대도로의 지분 중 5할은 노스폴드 시티에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린 집사는 노스폴드 의회의 불만을 접수한 후 정중히 대답했다.

“아, 꼬우면 덤비시든가. 그 잘난 특허장이 얼마나 통할지 볼 수 있겠네.”

외팔이도 질색할 재미없는 농담이지만, 노스폴드 상인들은 재미있다고 박수치며 떠났다. 저게 농담이 아니면 진짜 큰일 나는 것이다.

로벨은 시장 한가운데에서 잠시 멈췄다. 햇살이 가장 따스한 시간이지만 시장은 한적했다. 볼탄 반도의 떠오르는 교역도시도 눈이 녹지 않으면 물류운송이 힘들었다. 모험가 정신이 투철한 행상인과 계절을 가리지 않는 술상인만 조금 돌아다녔다.

“흰 털에 검은 갈기... 어디서 많이 본 말인데... 이크! 공작님 아니십니까!”

페리 행정관이 털모자를 벗으며 묵례했다. 로벨은 고삐를 느슨하게 늘어트리고 로드릭 시티의 현장 관리자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 별일 아닙니다. 스무날째 세금을 내지 않은 가게가 있어서 경고차 나왔습니다.”

“무슨 세금?”

“우물세와 굴뚝세입니다.”

“가난해?”

“그럴 리가요? 시내에 사는 사람 중 세금을 못 낼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페리 행정관은 모자를 쓰고 대화를 바꿨다.

“아버님을 뵈러 가십니까?”

“아니. 그냥 놀러 나왔어.”

“그럼 술집으로 가십니까?”

“글쎄... 그럴까?”

로벨은 지미와 루시와 세 꼬마를 떠올렸다. 따뜻한 술 한 잔 하면서 ‘미친 기사’에 관해 이야기해도 좋을 듯했다. 페리 행정관은 잘됐다는 듯 손뼉 쳤다.

“마침 공작님의 친구가 묵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 친구 없는데...?”

“농담이 아닙니다. 예전에 같이 다니신 떠돌이 기사 있지 않습니까? 이름이... 더스트 폴로 경이었나?”

한동안 잊고 지낸 이름이 나왔다.

“더스틴 폴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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