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2화 (372/605)

372화. 고기

어린 집사가 외팔이보고 멍청하다 놀리지만, 진짜 천지분간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괴물을 눈앞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꾸벅꾸벅 조는 싸움개의 옆구리를 숏 훅으로 후려치고 짧은 팔을 최대한 활용해 맞은편 잠복팀에 신호를 보냈다.

갯바위 마을 낚시터가 소리 없이 부산스러워졌다. 장막 속에서 간간이 들리던 코골이와 속삭임이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팽팽해진 것은 긴장감만이 아니었다. 미약하게 울어대는 ‘미끼’를 태운 조각배 밧줄도 팽팽하게 당겨졌다. 기사와 마녀와 용병과 어부가 한마음으로 애타게 기도했다.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이틀을 굶은 낚시꾼도 지금 만큼 간절하진 않을 것이다.

퐁- 당-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조각배가 어둠으로 사라지는 마술을 보았다. 순식간 일어난 일이라 2초 정도 이해하지 못했다. 상황을 깨달은 것은 요동치는 밧줄들 덕분이었다.

시 서펜트가 미끼를 태운 조각배를 통째로 삼켰다.

“우와아악! 우왁-!”

고목 밑동이와 바위에 묶어둔 밧줄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뿌리가 얕은 나무 밑동은 반쯤 뽑히기도 했다.

“잡아! 잡아! 놓치면 안 돼!”

시 서펜트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바위 하나가 구르고, 낡은 밧줄 두어 개가 끊어졌다. 억센 용병들이 밧줄을 잡고 버텼지만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뒤를 막아!”

시 서펜트와 줄다리기하는 용병보다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비를, 형제를, 친구를 잃은 분노로 빚은 한시적인 용기지만, 그렇다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용기였다. 갯바위 마을의 몇 안 남은 어부들이 거대한 그물로 좁은 만을 틀어막았다.

갯바위 마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어선 4척에 대마줄기를 수차례 꼬아 만든 그물을 3중으로 둘렀다. 1,200파운드의 배를 추로 사용한 그물이니 시 서펜트라도 일단 걸리면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무리 커 봐야 손이 없는 뱀 괴물이지! 그걸 어떻게 풀 거냐! 웁스, 외팔이 니 얘기 아니다.”

시 서펜트는 영리한 괴물이었다. 인간들이 함정을 꾸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왕(海王)의 자존심이 있었다. 조그맣고 냄새나는 인간에게 당한 채로 도망갈 수 없었다. 육지에 올라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저들이 자랑하는 쇠와 불은 물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꺼이 어울려주었다. 이리 모욕을 당할 줄 모르고 말이다.

‘그리 원한다면 너희를 모두 죽여주마!’

씨에에에엣- 씨에엣-!

“이, 이쪽으로 온다!”

“피해! 모두 피해!”

시 서펜트는 어선을 끌고 도망가는 대신 해안으로 돌격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무기는 인지의 생물에게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다. 바바 야가의 창에 찔려 터진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다. 평소처럼 힘을 쓸 수 없었다.

“하, 하하... 여기까지 못 올라와! 안전해!”

“쏴라! 쏴!”

“에잇! 던져라!”

그리고 전쟁 전문가를 얕잡아 보았다. 오늘의 상대는 지난 천 년 동안 사냥해온 뱃사람이 아니었다. 쇠와 불을 누구보다 잘 다루는 인간들이었다.

“태양의 노래! 용암의 춤! ‘진짜’ 용의 잠꼬대!”

콰광!

마녀 키르케가 아쿼버스를 점화했다. 깜깜한 어둠이 찢어지고 쇠구슬이 쏟아졌다. 하나하나는 작고 가벼운 납덩이지만, 음속으로 움직이면 흉악한 병기였다. 시 서펜트의 비늘을 깨트리고 가죽을 찢었다.

씨에에- 씨에-

이어서 날카롭게 벼린 창과 화살이 날아들었다. 겁도 없이 코앞에서 쏘아대니 아무리 질긴 가죽도 버티기 힘들었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시 서펜트는 인간들을 뭉개기 위해 꼬리를 휘둘렀다. 그러나 땅에 박힌 뾰족한 나무들이 걸리적거렸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서너 개 부러트렸지만, 그 대가로 상처가 곱절이 되었다.

“가문의 원수!”

철을 두른 인간이 네 발 짐승을 타고 달려왔다. 시 서펜트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크고 작은 나무 사이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성난 인간과 달아오른 망치를 피할 수 없었다. 쿵!

@

슐츠 경은 시 서펜트 머리 위로 뛰어올라 워 해머를 휘둘렀다. 계획에 없는 짓이었다. 쇠뇌를 쏘고 작살을 던지던 용병들이 기겁해서 무기를 치웠다.

“저, 저 미친 나으리가...!”

애써 버린 호칭이 다시 튀어나왔다. 허나 미친 나으리는 개의치 않았다.

“대머리 손의 목숨값이다!”

어느 생물이나 마찬가지지만, 뇌가 있는 곳이 약점이다. 체중을 실은 망치로 머리를 때리니 20야드의 거체가 단번에 주저앉았다. 세상 미친 기사도 관성은 어쩔 수 없어 나가떨어졌다. 모두가 무모하다 욕하는 가운데, 수준이 비슷한 한 사람만 칭찬했다.

“그대는 참된 기사요!”

시 서펜트 대가리에 뛰어들어야 기사라면 유라피아 대륙의 기사 대부분은 기사 작위를 반납할 것이다.

로벨은 슐츠 경을 돕기 위해 자갈밭을 뛰어갔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호른 경 침착하게 뒤따르며 명령했다.

“저것이 바다로 도망가게 둬서 안 된다! 어부를 도와라!”

기사들이 섞이는 바람에 공격을 못하게 된 용병들은 무기를 팽개치고 방파제로 달려갔다. 피와 쇠와 나무로 채워진 황량한 해변에는 불처럼 분노한 시 서펜트와 얼음처럼 차가운 세 명의 기사만 남았다. 슐츠 경은 좌우에 선 기사들을 힐끔 보고 은근히 뿌듯한 투로 말했다.

“용을 잡는 것은 역시 기사의 일이지.”

“용이랬다가 아니랬다가 정신 사나우니 통일 좀 하시오.”

호른 경이 짜증을 섞어 타박했다. 이런 위험한 싸움은 내키지 않았다. 특히 소중한 주군을 모시고 말이다. 그러나 로벨은 아드레날린이 혈관 곳곳에 스며들어 한껏 들떠있었다.

“내 경험상 오늘 잡은 저것은 정체가 무엇이든 용으로 알려질 거요.”

그리고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았다. 시 서펜트는 고통이 가라앉은 듯 침착하게 머리를 돌렸다. 수직으로 가느다란 동공이 인상 깊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럼 용을 잡아 봅시다.”

기억에 남기려면 살아남아야 했다.

로벨은 오늘을 추억하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용 사냥이 끝났다. 대단히 성공적인 사냥이었다.

겁을 상실한 슐츠 경이 혓바닥을 잡아 찢는 동안 호른 경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쑤셨고,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를 때 로벨의 두 명검이 턱을 뚫고 머리를 휘저었다. 울프 용병단과 갯바위 마을 사내들이 그물에 매달려 몸부림을 막았기에 가능했다.

사냥이 끝난 깊은 밤 바닷가는 고요했다. 괴수의 괴성과 악에 받친 기합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잔잔한 파도 소리와 낮은 숨소리만 감돌았다.

조금 전의 치열한 싸움이 거짓 같았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근육과 겨울바람에 빠르게 식는 땀과 피 흘리는 뱀의 시체는 현실이었다. 애꾸눈이 떨리는 손으로 안대를 만졌다.

“...해치웠나?”

“쉿! 쉿!”

허풍쟁이가 쓸데없는 추임 넣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현실에 부활 클리셰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뇌에 바람구멍이 났는데 살아나면 그건 좀 문제 있었다.

“용이 죽었다. 용이 죽었어.”

“기사 나리가! 용을 해치웠다!”

한 명이 소리치자 또 한 명이 소리쳤다. 달빛 아래 너부러진 거대 바다뱀 사체가 현실로 느껴졌다.

가족과 재산을 잃은 어부가 엉엉 울었다. 공포와 분노로 미뤄왔던 슬픔이 이제야 터져 나왔다. 그물에 끌려가 죽을 뻔한 맨앳암즈는 투구를 벗어 던지고 환호했다. 전설 속의 용-비슷한 것-을 잡았으니 대대손손 자랑할 일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회수해 목숨을 건 용사들을 보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음... 잔치를 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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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사냥 후에 고기 잔치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냥에 참가한 기사와 병사는 물론, 구경꾼에게도 고기를 나눠주었다. 다만, 그 고기가 먹어도 되는 고기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건 없어?”

갯바위 마을은 가난한 마을이었다. 긴긴 겨울을 생각하면 밀알 한 톨 낭비할 수 없었다. 울프 용병단의 비공식 취사 전문가 허풍쟁이는 시뻘건 고깃덩이를 도마와 냄비에 쌓아 두고 고민했다.

“용 고기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긴 한데...”

외팔이가 질긴 고기를 썰기 위해 도끼질하다가 버럭! 짜증냈다.

“용을 본 사람이 없는데! 용 고기가 좋은 건 어떻게 알았데?”

“전설이라고. 전설. 왜 성질이야?”

용. 그러니까 시 서펜트의 비늘은 쇠처럼 단단하고 가죽은 쇠심줄보다 질겼다. 그나마 고기는 평범한 편이지만,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라 먹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그냥 버릴까?”

용병도, 마을주민도 찝찝해했다. 하지만 로벨과 슐츠 경은 가급적 고기를 사용했으면 했다. '정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선이 망가지고, 그물이 찢어졌소. 얼마 남지 않은 가축은 시 서펜트 위장에서 고기죽이 되었지.”

로벨은 겨울을 나는 가난한 영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애써 잡은 시 서펜트를 어떻게든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먹기 싫어하는데...”

마녀가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며 제안했다.

“용 고기를 먹으면 화살이 박히지 않는 강철 몸이 되어 죽지 않는다고 하면 어때요?”

“그걸 믿는 사람이 있겠어?”

무식한 외팔이도 손가락을 따보고 거짓이란 것을 알 것이다. 그러자 호른 경이 빙그레 웃었다.

“저들은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창한 효능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제게 맡겨주십시오.”

호른 경은 호언장담 후 허풍쟁이와 외팔이를 찾아갔다. 그들의 불만을 가만히 들어준 후 한탄하듯 한마디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놀라웠다.

용병들과 사내들이 모여 숙덕거리더니 너도나도 고기를 가져갔다. 외팔이의 작업 속도가 느리자 직접 도끼를 가져와 거들기도 했다.

“호른 경이 유능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뭐라고 한 것이오?”

호른 경은 감탄하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를 보고 헛기침했다.

“그... 남자한테 많이 좋은 거라고 했습니다.”

슐츠 경이 사레에 걸려 기침했다.

“정말이오?”

“정말이겠소?”

슐츠 경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반면, 순진무구할뿐더러 남자가 아닌 로벨은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한테 좋은 거? 그게 뭐요? 여자한테는 안 좋소? 아니, 내 얘기가 아니라, 키르케, 키르케가 궁금해하잖소.”

로벨이 적극적으로 묻자 호른 경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여, 여자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여자가 없어서...”

“그러고 보니 왜 독신자만 모인 거지? 다들 결혼 안 하시오?”

로벨은 눈을 반짝이며 기사와 마녀를 보았다. 크게 할 말이 없는 일행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아침 해가 찬란한 바다 마을에 순진한 눈빛과 음흉한 웃음소리가 감돌았다.

여담이지만, 이듬해 갯바위 마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뱀 고기가 정력에 좋다는 것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슐츠 경의 등이 부쩍 휘었는데, 그것은 볼탄 반도 역사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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