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1화 (371/605)

371화. 미끼

로벨 일행은 갯바위 마을 중앙에 자리한 슐츠 가문 저택으로 이동했다.

영주의 집이니까 예의상 '저택'이라 표현했을 뿐이다. 실제 모습은 잉그비아 왕국 웨스텅 성보다 못했다. 잔가지로 만든 울타리는 새끼 고양이도 막지 못하고, 메마른 우물은 황량한 앞마당의 흉물이며, 해풍에 삭은 기둥과 곰팡이 핀 내벽은 미관을 넘어 생존의 위협이 되었다.

슐츠 경은 노복(老僕)에게 명령했다.

“촌장에게서 먹을 것을 얻어오라.”

심지어 겨울 식량조차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 마을 주민이 아니었으면 폐가에 들어와 주인 행세하는 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평소에 무엇을 하오?”

호른 경이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다. 슐츠 경은 부끄럼 없이 대답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덫을 놓아 새를 사냥하오. 서쪽에 작은 숲이 있어 계절이 맞으면 과일을 구해오기도 하오.”

페닝이 나올 구석이 하나 없는 진짜 가난한 마을이었다. 내심 술과 고기를 기대한 마녀가 한숨 지었다.

“이런 곳은 도적도 피해가겠네요.”

“도적? 가끔 찾아오지.”

슐츠 경이 워 해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벨은 슐츠 경의 갑옷이 제멋대로인 이유를 깨달았다.

잠시 뒤, 늙은 하인이 먹을 것을 가져왔다. 삐쩍 골은 청어, 바닷물에 절인 무, 썩기 직전의 정체 모를 고기 한 덩이와 열흘쯤 지난 귀리빵 서너 개였다. 마을의 식량을 탈탈 털어 온 모양이나 기대 이하로 형편없었다. 체격 좋은 울프 용병단이 먹기에 양도 모자랐다.

로벨은 고민 끝에 무례를 범하기로 했다.

“외팔이, 수레에서 우리 식량을 꺼내와.”

슐츠 경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부끄러움 혹은 민망함. 가난해도 기사는 기사였다. 손님을 접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였다. 로벨은 슐츠 경을 위해 화제를 바꿨다.

“시 서펜트를 잡을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기사와 마녀와 용병이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빈약한 음식을 씹으며 회의를 시작했다.

“그거 꼭 잡아야 합니까요? 여기 꼴을 보니까 괴물을 잡는다고 살림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데요?”

놀랍게도 외팔이가 한 질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나더니 제법 바른말을 했다. 물론,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슐츠 경이 중얼거렸다.

“내 가문과 내 마을을 모욕하는 건가?”

그 동안 지켜본 슐츠 경의 성격상 협박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외팔이가 '그렇다' 대답하면 침착하게 칼을 빼서 목을 칠 것이다. 로벨이나 호른 경이 제지하면 결투를 신청할 테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아뇨! 아뇨! 그럴 리가 있숩니까요? 거시기 뭐냐, 이사를 가거나 생업을 바꿔보자, 그런 의견이지요. 으하하... 하...”

기사 공포증을 가진 외팔이가 기사와 싸울 리 만무했다. 싸움개와 맨앳암즈들이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 안도의 한숨인데, 일부 아쉬워하는 한숨도 있었다.

호른 경이 손뼉을 쳐서 잡소리를 걷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놈을 잡아 주군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 이견을 받지 않으니 범위 내에서 방법을 제시해라.”

산전수전회전공성전 다 겪은 용병이지만, 아가미가 없어서 수중전은 겪어보지 못했다.

“바다에 숨은 녀석을 어떻게...”

“이럴 때는 선조의 지혜를 빌려야지요.”

일행 중 가장 현명한 애꾸눈이 말했다. 선조와 지혜가 거론되니 경건해졌다.

“우리 조상이... 용도 잡았어?”

“용이 아니라 큰 뱀이잖아.”

“그게 그거지. 용은 뱀과(科) 아니야?”

로벨은 조용하라고 탁자를 두드리고 턱짓했다.

“그래서, 무슨 방법인데?”

애꾸눈은 과도한 관심에 불편해했다.

“옛날이야기에 종종 나오지 않습니까. 용이 좋아하는 것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리는 겁니다.”

“용이 좋아하는 거?”

용과 관련된 전설은 어디에나 있었다. 세세한 설정과 전개과정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여자... 였나?”

“공주나 영애를 골라 납치하죠.”

“정확히는 ‘미녀’ 아닙니까?”

“공주가 이쁘잖아.”

“어? 너 공주 본 적 있냐?”

수군수군. 웅성웅성.

싸움개가 가장 큰 목소리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지적했다.

“다 좋은데, 우린 ‘미녀’가 없잖아?”

한 사람만 빼고 모든 시선이 마녀에게 쏠렸다. 호른 경은 무심코 로벨을 봤다가 뒤늦게 시선 처리했다.

“저보고 미끼가 되라고요?!”

마녀가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천방지축 키르케가 겁먹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열정이 넘쳐 흥분했다. 외팔이가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요! 안 돼요!”

시선이 외팔이로 옮겨졌다. 일부 용병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저 덩치는...’ 당연코 오해였다.

“저건 ‘미녀’가 아니잖습니까? 보나 마나 실패합니다요! 귀한 작전을 몹쓸 미끼로 날리면 안 됩니다요!”

“크앙!”

잠깐이지만 감격한 마녀가 외팔이의 종아리를 물어뜯었다. 겨울이라 가죽을 두툼하게 두른 외팔이가 비명을 지를 정도였으니 진짜 화난 듯했다. 로벨이 소란을 틈타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미끼를 쓰자.”

호른 경 빼고 사라진 시선이 다시 로벨을 향했다. 마녀가 입을 쩍 벌렸다.

“기, 기사님...? 진짜로 저를...”

“아니야. 키르케는 미끼가 아니야. 키르케는... 음... 쪼그매서 먹을 것이 없잖아?”

“풉!”

누가 웃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로벨이 이어 설명했다.

“시 서펜트가 용처럼 미녀를 좋아하는지는 확실치 않아. 하지만 ‘고기’를 먹는 것은 확실해. 그렇지?”

고기로 잡혀간 영지민이 한둘이 아닌 슐츠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로벨은 나이프로 청어를 푹 찌르고 말했다.

“낚시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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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과 갯바위 마을 주민이 바빠졌다. 우선 서쪽의 숲에서 대량의 통나무를 구해왔다.

여자와 아이만 남아 엄두를 내지 못한 아름드리나무도 곰 같은 기사와 용병이 교대로 도끼질하자 우지직- 우지근- 소리 내며 넘어갔다. 특히 로벨의 칭찬이 결정적이었다.

“오, 저거 보시오. 슐츠 경의 도끼질 솜씨가 대단하지 않소?”

“...제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보여드리지요.”

수십 년간 몸을 단련한 기사들이 경쟁 붙으니 숲의 생태계가 위태로울 정도였다.

“경은 기사면서, 후우, 후, 벌목이 익숙해 보이오?”

호른 경이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슐츠 경은 무표정하게 잔가지를 쳐냈다.

“이런 땅에서 먹고 살려면 전투훈련만 할 수 없소.”

그것은 짐승도 마찬가지였다. 얼추 손질된 통나무는 전투마에 엮어 해안으로 옮겼다.

슐츠 경의 전투마는 익숙한 일인 듯 금방 적응했는데, 호른 경의 전투마와 모닝스타가 심하게 반항했다. 특히 성질 더럽고 자존심 강한 모닝스타는 통나무를 묶으려는 애꾸눈을 뒷발로 차려고까지 했다. 로벨이 뒤늦게 나서서 달래주었다.

“그 못된 뱀을 혼내줄 중요한 작업이야. 착하게 굴면 이거 줄게.”

로벨 앞에서는 순한 강아지였다. 특히 맛있는 걸 줄 때는 그랬다. 로벨이 말린 사과를 꺼내자 언제 성질 부렸냐는 듯 잇몸을 뒤집었다.

“푸히힝-!”

이리되면 억울한 것은 호른 경의 전투마였다. 모닝스타가 눈알을 부라리고 ‘나도 일하는데 네까짓 게 감히?’하는 표정을 짓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작업에 동참했다.

쥐죽은 듯 고요한 마을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노인들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끌과 망치를 꺼내 산처럼 쌓여가는 통나무를 다듬었고, 머리 굵은 아이들은 해안가의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웠으며, 젊은 아낙들은 차갑게 식은 화로에 불을 피워 따뜻한 음식을 마련했다. 마을을 죽이는 시 서펜트 때문에 마을이 살아나니 아이러니했다.

로벨은 두 발로 돌아다니며 함정을 점검했다. 적이 바다에서 오는 만큼 주 전장은 해변이었다.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를 바다쪽으로 비스듬히 파묻거나 서로 기대어 세웠다. 사람과 말은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지나다닐 만하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 20야드 길이의 뱀은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가 박힐 것이다.

가만히 보면 수성전과 비슷했다. 마녀는 수성전(守城戰)이 아니라 수성전(水城戰)이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동방어를 모르는 로벨 등은 뭐가 재미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심히! 조심히!”

힘 좋은 외팔이와 싸움개, 그리고 물질을 잘하는 어부 한 명이 조각배에 꽁꽁 묶은 돼지와 양을 실어 바다로 나갔다. 이번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미끼였다.

“사람이 아닌데도 올까요?”

“허기를 채우려고 먹는 거면 사냥감을 가리지 않을 거야.”

그 부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시 서펜트가 가축을 습격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바다짐승이라 지금껏 가축을 공격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맛에 눈을 뜰지도...”

말하고 보니까 너무 마녀스러웠다.

“좀 더! 좀 더! 조금 더 가!”

이번 사냥은 거리가 중요했다. 영악한 시 서펜트가 의심하지 않을 거리이며 동시에 미끼를 물었을 때 낚아챌 수 있는 거리를 가늠했다. 로벨은 시 서펜트가 기습할 때 나타난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좋아! 거기까지! 그만 가!”

거리가 꽤 멀어서 손나팔로 불러야 했다. 싸움개는 손을 흔들어 긍정을 표시한 후 함께 간 뗏목으로 갈아탔다. 사람의 손에서 멀어진 양이 구슬프게 울었다. 메에에에... 메에에... 마녀가 두 손을 모으고 발을 굴렀다.

“불쌍해요...”

“어차피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짐승 아니우. 사람이 먹나 뱀이 먹나.”

로벨은 조각배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넓게 살폈다. 울프 용병단은 뾰족뾰족하게 솟은 바리게이트를 두드리며 점검 중이고, 뱃사람은 방파제 밖으로 빼놓은 어선에 밧줄을 감고 있었다. 이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호른 경, 낚시해 본 적이 있소?”

반면, 호른 경은 오직 로벨만을 보고 있었다.

“주군께서 하사해주신 땅이 바다마을이지요. 제 어린 종자와 함께 종종 낚시를 합니다.”

그리고 슐츠 경을 힐끔 보았다. 똑같은 바닷가 영주라 그런지 묘하게 견제했다.

“그럼 낚시꾼의 마음으로 기다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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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그리고 기다림. 낚시란 표현은 틀린 게 아니었다. 지렁이 대신 돼지와 양을 드리우고, 명주실 대신 돛줄 십여 가닥을 드리운 거대한 바다뱀 낚시였다.

“하아아아- 품.”

세상의 모든 기다림이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그중 가장 지루한 기다림은 기약이 없는 기다림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은하수가 찬란하게 바다를 수놓았지만 시 서펜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구슬프게 울던 양도 지쳐 잠든 듯 조용했다.

쇠뇌를 끌어안고 바리게이트 뒤에 숨어 기다리는 애꾸눈 이하 사수들은 수마(睡魔)와 전초전을 치렀다. 그래도 그들은 처지가 나았다. 밧줄을 관리해야 하는 외팔이와 싸움개는 언제 입질이 올지 몰라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슐츠 경이 긴 침묵을 깨트렸다.

“오늘 밤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잖소?”

로벨 이하 칼잡이가 신음을 흘렸다. 부상이 심해서 며칠, 혹은 몇 달을 요양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로벨의 창이 무서워 이 근방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럼 괜한 고생을 하는 것이다.

“떠나면 다행 아니오?”

“아니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하니.”

로벨도 동의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

“용병들이 지쳤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교대로 쉬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른 경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기각했다.

“병사들은 쉴 수 있지만, 어부들은 그럴 수 없소. 미끼가 살아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결과적으로 로벨의 판단은 옳았다. 밤이 가장 깊은 제3경 무렵, 바닷물이 소리 없이 갈라지며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품 후 졸린 눈을 비비던 외팔이가 처음으로 발견했다.

“나, 나, 나타났다! 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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