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0화 (370/605)

370화. 정정

울프 용병단은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대열을 갖추었다. 역시 정예는 정예였다. 하지만 상대는 바다의 재앙이자 뱃사람의 악몽이었다. 인간의 방진 따위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해일을 향해 무기를 겨눈 기분이었다.

“주군! 피하십시오!”

호른 경이 칼과 망치를 빼들고 로벨 앞을 막았다. 저 거대한 몸뚱이에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아니, 타격은 고사하고 1초라도 저지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저게 용이 아니라고?’

수룡(水龍)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커도 너무 컸다. 숫자로 들은 20야드와 실제로 목도한 20야드의 차이였다. 혹은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도시의 종탑만한 것이 사방팔방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니 체감상 3배쯤 크게 느껴졌다.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아바레스터들은 쿼럴을 입에 물고 윈드라스를 죽어라 감았다. 전원이 숙련된 사수라 금방이었다.

“쏴! 쏴버려! 덩치가 크니까 맞히기도 쉽겠네!”

외팔이가 손도끼를 고쳐 쥐고 고함쳤다. 제 딴에는 격려였을 것이다.

“주군! 빨리 피하십시오!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호른 경이 애타게 외쳤다. 저 덩치가 덮치면 열에 하나 살아남기 힘들었다.

로벨은 호른 경의 충성-혹은 충성 이상의 무언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른 경을 이상하게 보았다.

“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경이오.”

“예, 예? 그게 무슨...?”

“경의 용맹함은 잘 알지만 상대가 안 좋소. 그 짧은 무기로 저 거대한 놈의 급소를 찌를 수 있겠소?”

...라고 설득할 시간이 부족했다. 로벨은 호른 경을 무시하고 허풍쟁이를 불렀다.

“랜스!”

그것은 평범한 랜스가 아니었다. 동방에서 가져온 파괴의 힘이자 마왕(魔王) 버그베어를 격퇴한 전설의 무기, 바바 야가의 창이었다. 인간에게 쓰기는 너무 패악하여 그동안 봉인했는데, 용이란 이름을 듣고 모처럼 꺼내왔다.

시 서펜트가 해안으로 올라왔다. 상하로 요동치던 몸뚱이가 좌우로 흔들렸다. 몸짓만 보면 평범한 뱀인데, 크기가 오베리아 갤리선만 했다.

“이... 이익...”

용병들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물릴까봐 무서운 것이 아니라 깔려 죽을까봐 무서웠다.

“그대로 대기해!”

로벨이 바가 야가의 창을 한 바퀴 돌려 옆구리에 끼웠다. 창대를 창받침에 걸 수 없었다. 시 서펜트의 집채만 한 머리가 30야드 앞으로 다가왔다.

“가자, 모닝스타!”

로벨은 성질만큼이나 용감한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때렸다. 산양처럼 폴짝 뛰며 달려갔다. 각진 머리통이 삽시간에 다가왔다.

쒸에에에에엣-!

시 서펜트의 주둥이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동방 카펫을 연상시키는 붉은 혓바닥과 롱소드 길이의 송곳니가 얼핏 보였다.

흔히 머리가 삼각형인 뱀은 독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시 서펜트도 해당되는지 궁금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저 이빨에 물리면 독이 있든 없든 즉사였다.

로벨과 모닝스타는 한 덩이의 생물이 되어 주둥이를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뱀 머리가 포탄처럼 땅을 뒤집었다. 로벨은 10피트나 되는-그러나 상대적으로 짧아 보이는 바바 야가의 창을 위로 쳐올렸다.

‘외팔이가 옳은 말을 할 때도 있네.’

덩치가 크니까 때리기 쉬웠다. 새까만 창끝이 시 서펜트의 몸통을 강타했다. 콰과강-!

갑옷처럼 촘촘히 돋은 비늘이 산산이 깨지고, 수 천 파운드의 수압을 견디는 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새빨간 핏물 사이로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몸이 두 쪽 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천 년 동안 바다의 제왕으로 군림해온 시 서펜트도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씨에에-! 씨에에에엑-!

공포일까? 아니면 분노일까? 시 서펜트가 몸을 둥글게 말기 시작했다. 모닝스타는 휘말리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지금이다! 쏴라!”

“눈을 노려! 눈깔을 맞춰!”

애꾸눈이 제일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다 자란 회색곰도 맞으면 ‘아야!’하며 도망갈 강철 화살이었다. 신화적인 괴물이라 해도 눈깔에 맞으면 안 좋았다. 냄비 뚜껑만한 눈이 상하좌우로 닫히며 피를 뿌렸다.

“역시 애꾸눈!”

이어지는 쿼럴은 두꺼운 비늘에 튕겨 나갔지만, 위협을 주기 충분했다. 시 서펜트는 기세를 잃고 팔딱팔딱 뛰었다.

“우아앗!”

“너무 가까워!”

체급이 깡패란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냥 날뛰는 것도 위험했다. 싸움개가 장창을 찔렀으나 창날만 부러트렸다. 외팔이는 차마 다가갈 용기가 없어 손도끼를 던졌다. 출신이 보장하는 도끼 던지기의 명수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후퇴! 후퇴!”

“자, 잠깐! 기사 나으리는 어쩌고!”

울프 용병단은 위기의식과 시 서펜트 너머로 사라진 로벨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때, 로벨만큼 용감하고 대책이 없는 기사가 움직였다. 슐츠 경이 겁먹은 전투마를 윽박질러 요동치는 시 서펜트에게 달려갔다.

“저, 저 미친 나으리가?”

용 잡아달라고 할 때 생긴 애칭(?)인데, 지금은 의미 그대로 사용했다. 허세 넘치는 용병 기준으로도 자살행위였다.

“흠!”

하지만 악마가 인정한 기사는 달랐다. 슐츠 경은 워 해머 두 개를 꺼내며 안장에서 뛰어올랐다. 로벨이 가끔씩 선보이는 기행인데, 로벨보다 힘이 좋은지 더 높이 날았다. 허풍쟁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애칭을 버릴 때가 되었다. 살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퍼퍽-!

슐츠 경은 워 해머를 반바퀴 돌려 뾰쪽한 가시로 시 서펜트의 몸통을 찍었다. 몸무게와 갑옷무게가 더해진 해머질은 비늘이 단숨에 깨트렸다. 싸움개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저런 인간이 또 있네?”

시 서펜트는 전신의 비늘을 타다닥- 부딪치며 몸을 흔들었다. 슐츠 경의 몸이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신기한 것은 그 와중에도 표정변화가 없었다.

“이쪽이야!”

울프 용병단 기준으로 원조 ‘저런 인간’이 돌아왔다. 몸부림을 피해 멀찍이 떨어진 로벨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왔다. 수평으로 뻗은 아론다이트가 반짝였다.

씨에에에에-!

시 서펜트는 터지고 찍히고 찢어져서 마침내 전의를 상실했다. 거머리처럼 매달린 슐츠 경을 떨구기 위해, 혹은 뱃가죽을 찢어대는 로벨을 피하기 위해 바다로 몸을 돌렸다.

“우아왁!”

“히익-!”

시 서펜트의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수컷 코끼리만한 굵기를 채찍이라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울프 용병단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로벨은 모닝스타와 함께 옆으로 몸을 눕혔다. 그 사이 시 서펜트가 도주했다.

“어, 어? 슐츠 경?”

슐츠 경은 마지막까지 시 서펜트 몸뚱이에 매달려 있었다. 순순히 보내지 않으려는 듯 한 팔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팔로 마구 워 해머를 휘둘렀다. 경탄할 투지지만, 아쉽게 유의미한 타격은 주지 못했다.

“그만! 그만하시오! 위험하오!”

로벨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슐츠 경도 그리 생각했는지 바다에 빠지기 전 손을 놓았다. 눈빛과 몸짓이 많은 것을 표현했다.

‘저놈을 저리 보내면 안 되는데...’

시 서펜트는 바다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새빨간 피와 비늘이 붙은 살점이 떠올랐다가 파도에 쓸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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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잠깐 사이 엉망이 된 짐을 수습했다. 죽다 살아난 터라 분위기가 안 좋았다. 외팔이와 싸움개는 용이 진짜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애꾸눈과 허풍쟁이는 늑대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건의했다.

“이번에 숨통을 끊었어야 하는데...”

용맹무쌍한 슐츠 경은 시 서펜트를 놓친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호른 경은 아무 활약도 못한 것이 머쓱해서 헛기침했다.

“기회가 또 있지 않겠소?”

슐츠 경은 워 해머에 달라붙은 살점을 떼어내며 가로저었다.

“영악한 놈이라 육지로 올라오는 일이 거의 없소. 오늘 호되게 당했으니 더욱 몸을 사리겠지.”

“그럼 방금 전은?”

“지원군이 온 것을 알고 기습한 것이오.”

호른 경은 ‘설마?’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면 사람보다 영리했다.

전투 중에 줄행랑쳤던-비전투원의 당연한 행동이다- 마녀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저 멀리 동방대륙에서는 시 서펜트를 이무기라 불러요. 천 년을 수행해서 용이 되는 영물이죠.”

“응? 용 아니라면서?”

“전설이란 게 동네마다 다르잖아요. 아기용이라 부르는 거죠. 정말 천 년을 사는지는 모르지만 엄청 오래 살기는 해요. 오래될수록 덩치도 크고요.”

“그렇다면 머리가 좋은 것도 이해되는군.”

로벨은 징징거리는 허풍쟁이를 한 대 쥐어박은 후 재출발을 명령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시 서펜트에 관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해가 서쪽 숲으로 기울었다. 바닷바람이 상쾌하지 않고 끈적이게 느껴질 무렵, 슐츠 가문이 다스리는 갯바위 마을에 도착했다.

“어, 음, 호른 나으리 마을보다 작은뎁쇼?”

바다로 길게 뻗은 천연 방파제 안으로 모래와 자갈이 가득한 해변이 있었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조각배와 조각배로 쓰이던 판자뭉치가 기우뚱기우뚱 쓰러져 있고, 말뚝에 묶어둔 성긴 그물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해초처럼 굴러다녔다.

밀물에도 파도가 닿지 않는 마른 땅에는 30호 남짓한 가구가 모여 있었다. 배를 만들고 남은 판자를 이리저리 짜 맞춰 벽을 세우고, 건초와 마른 가지로 지붕을 얹은 다음, 해풍에 날아가지 않게 평평한 돌을 올려 밧줄로 묶어두었다.

요약하면 바다의 짠내만큼이나 가난함이 물씬 나는 마을이었다. 죽어 가는 감수성을 총동원해도 좋게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어어! 어이! 도련님이 오셨구만!”

“슐츠 나으리가 오셨으라!”

궁핍하고 척박한 곳에도 사람은 살았다. 울프 용병단을 보고 꽁꽁 숨어 있던 마을 주민이 슐츠 경을 보고 반갑게 뛰쳐나왔다. 얼굴과 갑옷, 심지어 타고 있는 말까지 부티가 흐르는 로벨은 보이지 않는지 슐츠 경에게 몰려들었다.

“어이구!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요!”

“대머리 손이 죽었습니다요. 흑.”

로벨은 영지민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여자와 아이와 몸이 성치 않은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파도에 삼켜졌나 보군요.”

“뱀에게 삼켜졌거나.”

시 서펜트가 출몰한지 30일이 지났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을 것이다.

“그런데 저 나으리들은 누구십니까요?”

대머리의 부고를 알리며 눈시울을 붉히던 노인이 로벨 일행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마을주민 전부가 덤벼도 당해내기 힘든 무장집단이니 경계할 만했다.

“‘나으리’는 말을 탄 두 사람이고, 나머지는 공작을 따르는 하인들이다.”

하인들이 발끈했다. 물론 속으로 말이다. 시 서펜트 옆구리에 망치질하던 광기 어린 모습이 아직 생생했다.

“공작이라구 하시면... 진짜로 늑대 공작님을 모시고 오신...”

“그래. 볼탄 반도의 영웅이자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시다.”

하루 물질해서 하루 허기를 채우는 가난한 시골 어민도 로벨 로드릭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기꺼운 얼굴로 달려와 대뜸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구원하러 오셨군요! 오오!”

“국왕 폐하 만세! 공작 폐하 만세!”

“옛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공작이 왔는데 옛 신은 왜 찾고 국왕은 왜 찾는지, 공작 폐하(Princ's Majesty)란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패트릭 호른 경이고, 그 옆에 분이 공작님이시다.”

“...응. 내가 공작이야.

로벨이 뚱한 표정으로 정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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