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용
“용? 요오옹이요?”
어린 집사가 비웃었다. 기사를 상대로 대단히 무례하지만 아무도 타박하지 않았다.
“심심하면 공주를 납치하고, 젊고 잘생긴 기사 칼에만 죽는 그 변태 괴물이요?”
“공주를 납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어린 집사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사래 쳤다.
“뭣들 해요? 쫓아내요.”
어린 집사에게는 지휘권이 없지만, 심적으로 동조한 용병들이 한 걸음 다가갔다. 미친놈을 성안에 들인 책임이 컸다.
“잠깐만. 기다려.”
용병들을 제지한 것은 의외로 최고 지휘관이었다. 시선이 로벨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텄네. 텄어.’
기사 소설 마니아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깜짝 파티에 초대받은 시골 영애 같았다. 편력 기사를 쫓아내기는 글렀다.
“정말 용이 있소? 영웅의 시련이자 시험이며, 옛 신의 사도를 가로막는 악의 화신 용이 맞소?”
“영웅과 사도를 어떻게 알아보는지 모르지만, 용은 분명하오.”
로벨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진지해졌다.
“트림하면 정말 불똥이 튀오?”
중요한 문제였다. 불을 못 뿜으면 참된 용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린 집사에게는 아니었다. 철부지 주인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정말 용이 있으면 진작 난리가 났죠. 트롤 두어 마리만 나와도 그 지역이 뒤집히는데요.”
“그, 그런가?”
로벨은 어린 집사 핀잔에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팔랑귀의 숙명이라고 할까, 슐츠 경이 입을 열자 다시 혹했다.
“용은 바다에 산다. 소문이 나기 힘들지.”
“용이 바다 생물이라고요? 이제 하다하다...”
로벨이 어린 집사를 제지했다.
“잠깐. 잠깐. 용도 개성이 있고 취향이 있을 텐데 꼭 동굴에 살라는 법은 없잖아? 뱀 중에도 바다뱀이 있는데?”
“...하아.”
로벨이 저럴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린 집사는 타깃을 슐츠 경으로 고정했다.
“좋아요! 용 비슷한 괴물이 있다 치고! 그게 우리 영주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경은 로드릭 가문의 기사도 아니잖아요?”
슐츠 경은 고분고분 인정했다.
“그렇다. 공작은 본인을 도울 의무가 없다.”
“하! 그런데 멋대로 문지기를 때려눕히고 들어왔어요?”
“나는 요구가 아니라 부탁을 하러 왔다. 부탁을 하려면 일단 만나야지.”
“그러니까 무슨 자격으로 부탁을 하냐고요!”
슐츠 경은 로벨을 보았다. 볼탄 반도의 내로라하는 가문들을 꺾고 제후에 오른 기사답지 않게 순한, 아니, 맹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슐츠 경은 의심하지 않았다.
“공작은 영웅이니까.”
“...영웅?”
“공작이 말한 것과 비슷하오. 오직 영웅만이 용을 죽일 수 있소. 그리고 본인이 아는 영웅은 무적무패 기사 로벨 로드릭 공작뿐이오.”
아부라는 자각이 없는 아부였다. 그리고 로벨의 취향을 저격하는 아부였다.
“흠흠. 흠. 일단 조사해 보겠소. 흠. 흠.”
어린 집사와 30인의 용병이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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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이 있고, 흡혈귀가 있는데, 용이라고 없을 이유는 없다. 수많은 신화와 각지의 전설, 그리고 벽난로 앞 동화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괴물이었으니 지금껏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마도의 수호자일까?”
“용이요? 아니에요.”
마녀 키르케가 딱 잘라 말했다.
“왜?”
“음... 동화에서 용이 하는 일을 생각해보세요.”
용은 가진 힘에 비해 하는 짓이 유치했다. 전쟁을 부추기지도 않고, 저주를 퍼붓지도 않고, 심지어 성실하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영웅담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 깊은 지하와 어두운 늪에서 조용히 지내는데, 갑자기 영웅이란 작자가 찾아와 ‘너는 악당! 너는 괴물!’하면서 칼침을 놓았다.
“듣고 보니 그러네... 왜 굳이 그 험한 곳에 찾아가서 죽이는 거야?”
“기사님 말대로 시험이라서?”
로벨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마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요정이 주방에서 장난치거나, 흡혈귀가 침실에 숨어드는 상상은 하지만, 용이 지붕에 불을 뿜는 상상은 안 하잖아요? 그런 괴담도 없고요.”
“아하, 너무 허무맹랑해서 안 믿는구나?”
“어린 집사 좀 보세요. 아직도 안 믿잖아요.”
로벨은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어린 집사를 힐끔 보고 납득했다.
“용이라... 하셨습니까?”
용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호른 경이 난감한 얼굴로 주군을 보았다. 어린 딸에게 배불뚝이 굴뚝요정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가장의 얼굴과 비슷했다.
“잉그비아 왕국 전설이나 네일 공국 신화에서 가끔 나오지만, 실제로 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최초일지도 모르잖소?”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그래서, 가기 싫소?”
로벨이 목을 살짝 움츠리고 물었다. 호른 경은 심장이 멎은 듯 주춤했다.
“가, 가야지요! 주군이 가시면 당연히 따라갑니다!”
이걸로 용 사냥 원정대-마녀 외에 모두 반대한 작명이다-가 정해졌다. 로벨, 슐츠 경, 호른 경, 마녀, 외팔이, 애꾸눈, 허풍쟁이, 싸움개 외 맨앳암즈 9명이었다. 슐츠 경은 2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에 우려를 표시했지만, 겨울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 확실치도 않은 용 때문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는 부담되었다.
“용은 매우 크고 대단히 강하오.”
“안 그래도 궁금했소. 자세히 좀 이야기해보시오.”
“용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대머리 손이란 어부였소. 해변에 건 그물을 걷으러 갔다가...”
로벨과 슐츠 경은 아랫것이 짐을 싸는 동안 용에 관해 이야기했다. 슐츠 경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지만 용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거 용 아니에요.”
마녀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슐츠 경의 표정이 티 나게 찌푸려졌다.
로벨은 마녀가 늑대성의 조언자이며 절친한 친구라고 알려주었는데, 잘못 짚었다. 슐츠 경이 불쾌한 것은 마녀 키르케가 천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거로 화낼 거면 어린 집사가 쫓아내라 마라 할 때 터졌을 것이다.
“그 덩치가 용이 아니면 무엇이냐. 설마 고래라고 할 생각이더냐.”
“고래도 아니에요. 비늘 난 것은 포유류가 아니니까요.”
“포, 포 뭐라고?”
“그건 큰 바다뱀(Sea-Serpent)이에요.”
로벨, 호른 경, 슐츠 경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진짜 바다뱀이었어?’
새삼스럽지만, 이들은 볼탄 반도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기사들이었다. 마녀는 위대한 기사들에게 가르침을 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에헴. 헴. 수룡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진짜 용은 아니에요.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불을 뿜지도 못해요. 지능이 높은 편이지만 지능 이상으로 욕심이 많아서 뱃사람을 종종 공격해요.”
세 기사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짜 용이야?”
“용의 사촌쯤 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용 비슷한 것이군.”
마녀는 타박하지 않았다.
“시 서펜트는 먼 바다 깊은 곳에 사는데, 왜 해안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호른 경이 슬쩍 눈치 주었다.
“용이 아니면 안 가도 되잖습니까?”
로벨은 아랫입술을 비틀며 고민했다. 그때 숙달된 수행원 허풍쟁이가 수레의 짐을 꽁꽁 묶은 후 보고했다.
“기사 나리, 짐 다 챙겼습니다요.”
이제 와서 관두기도 이상했다. 그리고 용이든 용 비슷한 뱀이든 흥미가 있었다. 겨울은 길고 새벽은 지루하니 난로 앞에서 늘어놓을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좋았다.
“그래도 가보자. 꼭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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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여행은 결코 권장할 것이 못 되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몸을 짓누르는 눈, 굶주린 짐승과 헐벗은 촌민이 여행자를 위협하니 셋 중 하나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어디까지 평범한 상인들 이야기지...’
그러나 기사와 마녀와 용병으로 구성된 무장집단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양털로 짠 망토를 겹겹이 두르고, 수레에 가득 실은 장작으로 어둠을 밝히며, 흉흉한 창칼로 사방을 경계하니 열흘 굶은 승냥이도 알아서 피해갔다.
“늑대도로에서 북부대로로 갈아탄 뒤, 뱀의 계곡 초입에서 북쪽 샛길로 빠지면 갯바위 마을이 나온다오.”
슐츠 경이 모닥불을 쬐며 느긋하게 말했다.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이 불 피우고, 천막 치고, 요리하고, 경계까지 서니 고향에 닥친 불운과 별개로 몹시 만족 중이었다. ‘역시 권력이 좋군...’ 따위의 헛소리를 들숨날숨처럼 토했다.
“지금 속도로 사흘쯤 걸리겠군. 멀지 않아 다행이오.”
로벨 역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생각보다 가깝다고 마냥 좋아했다.
호른 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벨이 대단한 기사라 하지만, 상대는 용-비슷한 것-이었다. 걱정하고 또 걱정해야 마땅한데, 두 사람은 태평하게 불이나 쬐고 있었다.
최고 지휘관과 길잡이가 태연하니 용병들도 그러했다. 용을 뒷산 멧돼지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고민해도 소용이 없소.”
로벨이 까만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호른 경은 속마음이 들켜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인지...”
“나는 경을 잘 아오. 분명 용을 잡을 방법을 고민 중일 것이오.”
그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 기사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 가진 정보는 20야드 덩치의 큰 바다짐승이란 것뿐이오. 어디에 숨었는지, 어떻게 싸우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오. 그러니 벌써부터 고민하지 마시오.”
“그것을 알면... 용을 죽일 수 있습니까?”
로벨은 멍청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중한 친구가 상처받지 않게 돌려 말했다.
“그것도 직접 봐야 알지 않겠소?”
직접 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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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로에서 이탈해 북쪽으로 하루 한나절을 가자 검고 거친 바다. 북해가 나타났다.
전쟁이네, 모험이네, 사방 곳곳을 헤매고 다닌 일행이라 겨울 바다가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소금기 묻어나는 바닷바람을 한 번 들이쉬고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저게 뭐야!”
이유는 모르지만, 무리를 지으면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것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허풍쟁이가 파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왜 또 지랄이야?”
“인어라도 나타났냐?”
허풍쟁이의 허풍을 잘 아는 울프 용병단은 피식피식-웃었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진짜 같은데?”
“우아아아앗!”
먼 바다에서 길쭉한 것이 솟아올랐다. 수평선의 돛대처럼 높이높이 솟다가, 제 무게를 못 이겨 아래로 휘어졌다. 풍덩- 거센 물보라가 일어났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잠시 뒤 다시 솟아나고, 완만히 휘어져 다시 잠겼다.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니 물결 모양이 되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는뎁쇼?!”
거대한 뱀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애꾸눈이 깜짝 놀라 명령했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창을 가진 용병은 창날을 세우고, 쇠뇌를 가진 용병은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이게 통할 거 같지 않은데?’
로벨은 슐츠 경의 지난 무례를 완전히 잊기로 했다. 시 서펜트는 용이라 해도 될 만큼 크고 빠르며 무시무시했다. 저런 괴물이 나타나면 도움을 청할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