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불청객
승전축하연회는 여러 의미로 성공적이었다.
전쟁의 주역이었던 기사들은 사흘에 걸친 폭주(暴酒) 끝에 어질어질한 머리와 빵빵한 배를 붙잡고 돌아갔다. 술이 깨면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기둥을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춘 로벨 로드릭 공작, 술통에 머리를 감은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 그리고 사자처럼 찾아와 당나귀처럼 도망간 몰드 헤르만 백작.
“힛! 이제 까불지 못하겠죠.”
어린 집사는 헤르만 백작이 망신당한 것을 떠올리며 웃다가 연회지출비에 울상 지었다. 겸양과 사양을 모르는 기사들이라 무지막지하게 먹고 마셨다. 옛날 세습 기사 시절 로드릭 가문이었으면 연회 한 번으로 파산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좀 쉬어도 되지 않아?”
“어허! 그럴 틈이 어디 있어요? 지금 벌려놓은 사업이 한둘인 줄 아세요? 뉴 로드릭 마을에 양봉업자도 만나야 하고, 소금 광산과 버팅거 시티의 수익 정산도 해야 하고, 크레타 시티에 건설자재도 보내야 하고, 월동준비도 해야 하고...”
“으아...”
큰 고비는 넘겼지만 바쁜 나날은 계속되었다. 우선 로드릭 가문의 새 영토가 된 크레타 시티를 재건하기 위해 관리와 재원을 마련했다. 마침 적임자가 있었다. 로드릭 상회 프란시스 시티 지부장 마틴 루드였다.
“그거 좋군요. 상회 직원보다 자유도시 행정관이 폼나지요. 아, 이제 자유도시가 아닌가요?”
“...공작령이긴 하지만, 운영방침은 자유도시와 다를 것이 없어요.”
“그래도 좋아하니까 다행이야.”
푸른고래 호와 백상아리 호에 금과 은과 울프 용병단 북군 30명을 태워 보냈다. 마틴 지부장, 아니, 마틴 수석 행정관은 영리하고 성실하니 지원만 해주면 2년 이내에 도시를 정상화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찾아왔다. 다사다난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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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건초더미에 쇠스랑을 꼽고 힘껏 끌어당겼다. 여름에 베어서 가을에 말린 보리건초가 묵은 먼지를 뿌렸다. 앞발을 얌전히 모으고 구경하던 아야와 이야카가 요란하게 재채기했다. 에취-! 취잇-!
“저리 가라니까.”
로벨은 늑대 남매에게 눈을 흘기고 건초를 한 움큼씩 엮었다.
겨울이 시린 것은 사람이나 말이나 똑같아서 삭풍이 들기 전에 마구간을 꽁꽁 싸매야 했다. 보통은 농민 서너 명을 불러서 시키지만, 어린 집사 등쌀에 도망 나온 영주는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쇠스랑을 잡았다.
“푸르르-”
모닝스타가 마구간 밖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콧김을 뿜었다. 로벨은 전우의 재롱이 싫지 않아 콧등을 긁어주었다.
“이거 끝나면 놀아줄게. 기다려.”
오해였다. 모닝스타는 놀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건초더미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흐룬팅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로벨보다 예민한 아야와 이야카는 한가롭게 하품했다.
“누구야?”
“꺄아!”
뾰족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로벨은 칼자루를 놓고 건초더미를 빙 돌아갔다. 낯익은 꼬마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지미네 쌍둥이?”
시내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지미와 루시의 쌍둥이 꼬마였다. 겨울바람에 발그레 진 뺨과 새끼 곰처럼 잔뜩 껴입은 옷이 귀여웠다.
늙은 촌장이 포대기에 싸서 토닥토닥 재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훌쩍 커서 강아지처럼 발발거렸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늑대성의 문지기는 볼탄 반도 최고의 용병이다. 7살짜리들이 숨어들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희는, 저희는 그냥, 말이 보고 싶어서...”
로벨은 기사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이다. 걸음마를 졸업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꼬마가 올려다보기에 부담스러웠다. 로벨은 한쪽 무릎을 꿇어 쌍둥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여기 있는 말은 전투마야. 성격이 나빠서 앙! 하고 깨물지도 몰라.”
“푸르릉! 푸릉-!”
모닝스타가 모함이란 듯 거세게 항의했다. 유니콘의 피가 흘러서 여자와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것보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무섭게 생긴 용병이 있지 않았어?”
그 답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나왔다.
“앗! 영주님!”
옛 촌장의 손녀딸이자 여관주인 지미의 아내 루시였다. 로벨과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다.
“아하, 엄마를 따라 왔구나?”
루시는 치맛자락을 쥐고 앙증맞게 달려왔다. 쌍둥이를 포함한 세 아이의 엄마지만, 어릴 적 백마 탄 기사님 앞에서는 아직도 수줍은 소녀였다.
“이를 어째! 얌전히 기다리라니까! 영주님을 귀찮게 하면 어떡하니!”
“그리 귀찮지 않은데... 그보다 무슨 일이야?”
로벨이 쌍둥이를 변호하자 루시는 뒤늦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계란하고, 양젖하고, 과일주를 조금 가져왔어요. 어린 집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당번이기도 하고...”
“그래? 여관 일도 많을 텐데, 고마워.”
로벨이 감사하자 루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시장 상인들은 고귀한 공작님이니 위대한 영웅이니 떠들지만, 옛 영지민에게는 정다운 영주님이었다.
“호호호, 일이 많기는요? 이맘때면 항상 한가하죠. 손님도 한 명뿐인걸요.”
웃으며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로벨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 건초를 묶었다. 루시는 고귀한 영주님이 험한 일 하는 것을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감히 방해해서 안 되는지 고민했다. 로벨이 고민을 덜어주었다.
“여관에 혼자 머무는 손님이 누구야? 기사? 행상인?”
“큰 칼을 차고 큰 말을 탄 것이 기사 나으리 같은데...”
“편력 기사야?”
“잘 모르겠어요. 그이는 숙박비만 잘 내면 상관하지 않으니까요. 영주님이 지켜주시니 행패 부리는 악당도 없고요.”
로벨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자주 듣는 찬사지만 들을 때마다 낯간지러웠다.
“이 시기에 편력 기사라...”
그들은 자유기사라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용병이나 진배없었다. 전장에서 죽는 기사보다 셋째나 넷째로 태어나 이름 말고 물려받은 게 없는 기사가 흔하기 때문이다.
“올겨울을 여기서 날 생각일까요?”
“글쎄?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지?”
로벨은 새 건초를 꺼내기 위해 쇠스랑을 잡았다. 루시는 바쁘신(?) 영주님을 너무 오래 방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인사했다.
“저희는 이만 갈게요. 그이가 기다려서... 얘들아, 영주님께 인사드려야지. 아니! 공손하게!”
로벨은 쇠스랑을 지팡이처럼 집고 늙은 농부처럼 인사를 받았다.
“조심해서 가.”
루시는 쌍둥이와 손잡고 성을 내려가다 새삼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떨 결에 수다를 떨었는데, 돌이켜보니 진귀한 경험이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동경해 온 기사님이고, 볼탄 반도에서 가장 고귀한 공작님이었다. 옛 촌장의 손녀로 친분이 있다고 하지만 이리 마주할 분이 아니었다.
‘어머나! 어머나! 내가 미쳤나 봐!’
꿈에서 깨어나니 새로운 꿈이 시작되었다. 오늘 저녁에 낯익은 울프 용병단 병사들이 찾아와 영주님께 무례한 게 네년이냐고 잡아가지 않을까. 아니지. 아니야. 그럴 거면 아까 사람을 불러 혼냈겠지. 혹시 영주님도 내게 호감이 있었던 걸까? 밤중에 몰래 찾아와 그이 몰래 오붓한 시간을 보내자고 하면... 으악! 정신 차려, 루시! 넌 이제 애 엄마야!
쌍둥이는 웃다가 울다가 소리치다가 낙담하는 모친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어른의 세계는 심오하여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루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로운 늑대성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옛날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으시네?”
소박한 행동도, 다정한 성격도, 앳된 얼굴도 숲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젊은 시절 그대로였다. 도저히 30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드시나?’
로벨의 영지민다운 소박한 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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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루시와 쌍둥이 아이를 금방 잊었다. 마구간 공사를 끝내고, 모닝스타와 여러 전투마를 다독이고, 어린 집사의 추적을 피해 주방으로 도망가느라 깊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짧은 해가 서쪽 들판을 넘기 전에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지미와 루시네 여관에 묵는 그 편력 기사가 늑대성을 찾아왔다.
이것도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벨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도시 한 바퀴까지는 아니어도 매일 십수 명은 되었고, 그들을 다 만나 줄 수 없기에 신원이 확실치 않으면 리암 수사와 페리 행정관이 일찍이 걸러냈다.
두 사람을 걸치지 않고 로벨을 만날 방법이 있다면, 로벨이 시찰을 나왔을 때 모닝스타 앞에 뛰어드는 것과 늑대성을 지키는 용병을 때려눕히는 방법뿐이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로드릭 시민이 만든 농담이었다.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의 더러운 성질머리와 산전수전 다 겪은 울프 용병단의 용맹함을 경고하는 반어적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유머감각이 부족한 사람이 있었다. 혹은 풍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우아아악! 우왁!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어린 집사 잔소리에 풀이 죽어 있던 로벨은 영주답게, 그리고 기사답게 벌떡 일어났다. 로벨의 칼과 갑옷은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엥? 뭐가 나타나요?”
반면, 현실감이 충만한 어린 집사는 어이없었다. 로드릭 시티 성벽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요새에 상시 주둔하는 300명의 용병이 탈영한 것도 아닌데 늑대성에 ‘적’이 나타날 수 없었다. 취객이 난동 부리는 거면 모를까.
하지만 세상은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성문지기를 때려눕히고, 추가로 내성 근무자까지 후드려 잡은 ‘적’이 있었다. 차림새가 이상한 적이었다.
“저것도... 갑옷이야?”
기사들이 좋아하는 풀 플레이트 아머인데 통일성이 없었다. 오른쪽과 왼쪽의 폴드런 문양이 제각각 달랐다. 브레스트 플레이트와 백 플레이트가 맞지 않아 삐뚤어졌고, 스커트 한쪽이 초라하게 깨져있었다. 정리하면 이 갑옷 저 갑옷에서 되는대로 파츠를 모아 입은 모습이었다.
‘진짜 가난한가 봐...’
로벨의 첫 소감이었다.
가난한 편력 기사는 로벨의 정체를 알고 워 해머를 슬그머니 치웠다. 피가 묻지 않은 것을 보아 살인은 피한 듯했다.
“본인은 슐츠 가문의 고르크 슐츠라 하오.”
“아, 그렇소?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어색하게 인사하다가 어린 집사의 사나운 표정을 보고 함께 으르렁거렸다.
“예의가 독특하시군. 어느 나라 예절인지 알아도 되겠소?”
‘슐츠’는 볼탄 반도에서 흔한 성이었다. 가장 오래된 수도원의 가장 오래된 족보에서도 나오기에 시초를 찾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유명한 성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느 나라 예절’ 운운은 국적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분위기부터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집 농담을 현실에 적용하는 기사였다.
“본인은 볼탄 반도 북서쪽 갯바위 마을 출신으로 마스터를 통해 볼탄 반도의 예절을 익혔으나, 금일 실천한 것은 예절과 무관하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오.”
“...그렇소?”
할 말을 잊게 하는 기사는 오랜만이었다. 여러 의미로 까다로운 불청객이었다.
“예의가 아닌 것을, 그러니까, 경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오. 그래서 이 일을 책임져야하는 것도 알 테고, 에, 그러니까 무슨 이유로 내 성에 쳐들어 온 것이오?”
로벨이 횡설수설하는 동안 혼쭐이 난 용병들이 병력을 모아왔다. 족히 30명은 되는 울프 용병단이 쇠뇌와 장창을 겨누었다. 최강의 기사와 최고의 용병단이었다. 제아무리 철갑을 두른 기사라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슐츠 경은 무덤덤했다.
“공작을 만나고자 매일 같이 청원을 하였으나 여드레째 답이 없었소.”
“그거야... 음... 그래서 쳐들어왔소?”
“여관 주인이 이 방법이 확실하다 하여 따라보았소.”
“지미가?”
아마 농담이었을 것이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저자가 문제다.
“본인을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소?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본인의 병사를 상하게 한 책임을 경과 경의 가문이 져야 할 것이오.”
로벨의 직위를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물론, 눈치코치 없는 불청객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내 땅에 용이 나타났소. 공작의 도움이 필요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