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7화 (367/605)

367화. 여우

로벨은 해먹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 햇살을 만끽했다. 오래된 성 특유의 이끼 냄새, 곰팡이 냄새, 벌레 먹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고성에서 자란 로벨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냄새였다.

‘옛날 생각이 나.’

로벨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덧 추억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늑대성 정원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아만다 성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호른 성이란 이름이 더 익숙한 옛 성의 안뜰이었다.

“주군, 이곳에 계셨습니까?

호른 성의 주인이자 자작나무 숲의 영주이며 로벨의 충직한 봉신인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인 패트릭 호른 경이 피곤한 얼굴로 찾아왔다. 로벨은 허리 힘으로 상체를 일으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오시오?”

호른 경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로벨 앞머리에 붙은 낙엽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그냥 두었다. 예쁜 것은 오래 봐야 좋았다.

“주군을 집안에 모시고 어찌 편히 쉬겠습니까?”

“그, 그런 거요? 미안하오.”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낸 로벨은 무안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군이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보통 그렇게 말하지만...”

“빈말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호른 경은 엉덩이 붙일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바닷바람에 까칠해진 정원석과 해먹 하나 지탱하기 힘든 늙은 나무가 전부였다. 로벨은 옆자리를 내줄까 생각하다 그만뒀다. 왠지 부끄러웠다.

“지금쯤이면 늑대성이 떠들썩하지 않겠습니까. 걱정되지 않습니까?”

호른 경은 늙은 나무에 기대서서 말했다. 로벨은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생각 없이 대답했다.

“뭐, 페르젠 백작이잖소.”

그냥 뱉은 말인데 의미심장했다. 호른 경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긍정했다.

“하긴... 페르젠 백작이군요.”

다시 생각해도 그럴듯했다. 두 기사는 소리 없이 웃었다.

@

유라피아 대륙에는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란 속담이 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주인’이란 동방대륙 속담과 비슷하지만, 호랑이를 본 적 없는 유라피아 대륙 사람들은 사자가 이해하기 쉬웠다.

“그때 내가 창을 이렇게, 이렇게 휘두르며 뭐라 외쳤는지 아시오?”

“...뭐라 외쳤소?”

“도망갈 땐 가더라도 불알은 챙겨가라 남부 촌놈들아!”

“우하하하핫! 과연 백작이시오!”

로벨이 없는 승전축하연회는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독무대였다.

재력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무시할 수 없는 페르젠 가문 후광에 전장에서 쌓은 나름의 유대감이 더해져 젊은 기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때문일까, 선대부터 앙숙인 헤르만 가문의 기사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페르젠 가문의 기사 하나가 실컷 웃고서 헤르만 백작을 향해 눈을 흘겼다.

“거, 헤르만 백작도 같이 싸웠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오.”

메인 홀의 모든 눈이 늙은 기사를 향했다.

“그러지 마시오. 호수성의 백작은 나이가 있으니 일선에서 싸우기 힘들지 않소.”

“프란시스 항구에서 사절단 놈들을 혼내줄 때는 아닌 것 같았소만.”

“그때도 헤르만 백작은 아니 계셨소.”

“아, 그랬소? 이거 실례했군.”

사과와 두둔을 가장한 멸시와 괄시가 오갔다. 헤르만 백작은 술잔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수염을 가렸다.

“역시 전장에 나서기는 힘드신가 보구려.”

“전쟁을 강력히 주장하길래 난 또...”

만약 로벨이 저리 말한다면 손님에 대한 예의로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늙은 기사라고 조롱하려고 초대했느냐’ 쏘아붙이면 할 말을 잃고 쩔쩔맸을 것이다. 군주가 기사를 비웃는 것은 마냥 웃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젊은 기사들도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아닌 페르젠 백작이 저러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욕하면 결투를 신청할 텐데-싸우는 것은 다른 기사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은 우리 같은 젊은 기사의 역할 아니오. 으하핫! 괜히 호수성의 기사들을 괴롭히지 맙시다!”

부드득-!

헤르만 백작의 어금니가 심하게 갈렸다. 어느새 입으로만 전쟁을 외치고 피를 묻히지 않은 늙다리 취급받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귀족원에서 헤르만 가문의 입지는 대단히 좁아진다. 싸우지 않는 기사는 전쟁을 주장할 수 없다.

‘로벨 로드릭...’

그러나 페르젠 백작을 탓하지 않았다. 저 우둔한 백작은 꼭두각시였다. 자신이 꼭두각시인줄 모르는 꼭두각시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 줄을 쥐고 있는 자를 보아야 했다.

‘멍청한 늑대소굴인 줄 알았는데, 간사한 여우가 하나 있었군.’

@

“에취!”

주방에서 접시를 살피던 어린 집사가 돌연 재채기했다. 마녀 키르케가 기겁해서 식기를 치웠다.

“에잇! 더러워! 더러워요!”

어린 집사는 코를 훌쩍이고 그냥 가져가라 손짓했다.

기사 종자와 수행원은 나무접시에 음식을 담아주지만, 페르젠 백작을 포함한 기사들에게는 트랑쇼와르(Tranchoir:빵으로 만든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었다. 위생과 품위에서 높이 살 수 있지만, 재질이 재질인 만큼 관리가 쉽지 않아 꼼꼼히 살펴야 했다. 쥐가 먹었거나 눅눅해진 것은 쓸 수 없었다.

“분위기는 어때요?”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트림하고...”

“기사들이 원래 그렇죠.”

어린 집사는 괜찮은 빵접시를 골라 일손을 돕는 아낙에게 주었다.

연회가 끝나면 먹고 남은 빵접시는 아낙들이 가져갔다. 빵 자체는 아무 맛도 없지만, 빵에 스며든 고기 기름과 걸쭉한 스튜 때문에 가난한 농민 및 도시 빈민들은 귀한 식재료로 여겼다.

“이제 슬슬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어린 집사는 메인 홀을 힐끔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서 물었다.

“반응? 무슨 반응요?”

“무슨 반응인지도 두고 봐야...”

쾅-!

메인 홀에서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작은 소음은 쓸려가듯 사라졌다. 칼, 도끼, 망치, 철퇴 따위가 숟가락보다 흔한 장소라 비무장 하인은 우려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최고의 칼잡이와 유년기를 보낸 한 명만 활짝 웃었다.

“그렇지! 그래야 기사놈이지!”

어린 집사가 신분 차별인지 직업 편견인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마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홀로 나갔다. 기사들의 큼직한 등판 너머로 으르렁거리는 짐승들이 있었다.

“어? 싸움 났어요?”

기사 하나가 힐끔 돌아보았다. 늑대성의 고깔모자 마녀가 누구인지 알기에 무례하다 타박하지 않았다.

“싸움이 아니다. 결투다.”

“날씨도 좋은데 왜 싸우고 그래요?”

“싸움 아니라고.”

“여기서 싸우면 안 되는데? 안 말려요?”

“싸움이 아니... 휴우. 듣던 대로군.”

마녀는 까치발을 들고 싸움을 구경했다. 젊은 기사들이 칼자루를 잡고 으르렁거리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누구랑 누구에요?”

“파도성의 기사 바엘 남작과 호수성의 기사 베일 경이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두 가문이 상대방의 피를 탐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니까.”

기사는 설명하다가 멈칫했다. 주군의 연인이라 하나 평민 처녀에게 시시콜콜 상황 설명하는 것은 격이 떨어졌다.

그때, 마녀가 서운하지 않게 중재하는 기사가 나타났다.

“칼에서 손 떼시오.”

켈트 남작이 경고했다. 연륜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무게감이 있는 기사였다. 칼자루를 잡은 기사는 물론이고, 파도성과 호수성의 백작도 흠칫했다.

“주인이 없는 성에서 멋대로 결투를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오? 공작 앞에서도 그리 칼을 잡을 수 있소?”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지만, 기사의 자존심은 이성을 따라가지 않았다.

“저자가 먼저 손을 떼야 할 것이오.”

“저자가 사과하기 전까지 막지 마시오.”

“사과? 본인이? 어째서?”

“나의 주인을 모욕하지 않았소!”

두 기사는 호랑이 굴에서 차마 칼을 뽑지 못하고 앙칼지게 싸웠다. 마녀 키르케는 두 기사보다 켈트 남작에게 집중했다. 뿔난 고양이를 어떻게 말릴지 궁금했다. 그 덕분에 켈트 남작의 입술이 슬쩍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하?’

마녀는 까치발을 내리고 주방을 보았다. 어린 집사가 소리 없이 켈트 남작을 응원하고 있었다. 300년 정통성을 자랑하는 백작들이 간사한 여우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나만 쏙 빼놓고. 칫!”

@

헤르만 백작은 정치와 모략에 능하여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오만한 페르젠 백작과 비열한 바엘 남작 옆자리를 주었을 때부터 의도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항할 카드가 없었다. 결투에서 지면 정말 무능력자가 되고, 운이 좋아 이겨도 주군의 성에서 허락 없이 결투한 책임을 져야 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소. 본인은 이만 돌아갈 테니 공작이 오면 잘 해명해 주시오.”

“흥! 그러시오! 따지고 보면 호수성이 있을 자리가 아니지!”

페르젠 백작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헤르만 백작이 발을 빼자 이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둔한 놈. 오늘의 승자는 네놈이 아니라 로벨 로드릭 공작이다.’

헤르만 백작을 비롯한 호수성 기사, 기사 종자, 수행원이 일제히 빠져나가자 연회장이 고요해졌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아직 초저녁도 되지 않았잖소?”

“허나 주군도 아니 계시니...”

이런 일이 좀처럼 없기에 다들 웅성거렸다. 어린 집사가 두 손 모으고 ‘그래요. 다들 집에 가요. 집에 빵 없어요? 우리 겨울 식량 축내지 말고 가라고요!’ 어쩌고 기도한 것은 아야와 이야카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옛 신은 어린 집사 편이 아니었다. 실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러니까 헤르만 백작이 로드릭 시티를 떠나고, 페르젠 백작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해 어수선함이 극에 달했을 때, 로벨과 호른 경이 아성 문을 활짝 열고 나타났다.

“주군께서 오셨다!”

로벨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덩치가 좋거나 목소리가 우렁찬 것과 다른, 눈짓하나 손짓하나가 이목을 끄는 존재감이었다. 삭풍에 식어가는 화로에 풀무를 꽂고 세차게 바람을 넣은 느낌이었다.

“늑대성의 주인이 돌아왔다!”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 오셨다!”

젊은 기사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오늘 연회의 호스트인 이유도 있고, 직·간접적으로 맺어진 주종관계인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솔직하게는 뭇 기사들의 영웅이었다.

여기서 그럴듯한 대사를 하면 아주 좋을 텐데, 로벨은 연극에 재능이 없었다. 로벨은 수백 개의 눈이 부담되어 주저하다가 겨우 한 마디 했다.

“맛있게 먹고 있소?”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동시에 한숨 쉬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후광에 눈이 먼 기사들은 ‘화장실이 급하오?’나 ‘생긴 게 왜 그 모양이오?’ 소리를 해도 열렬히 호응했을 것이다.

“공작님을 위해 잔을 듭시다!”

“로드릭 가문의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볼탄 반도의 영광을 위하여!”

페르젠 백작은 분위기에 떠밀려 아랫자리로 내려왔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백작 본인조차 그러했다. 볼탄 반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명백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