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6화 (366/605)

366화. 자리

로벨 로드릭 공작이 돌아왔다.

인어해의 거친 파도를 건너 간악하고 간사한 4만 5천 명의 이교도 용병을 무찌르고 영광을 거머쥔 채 돌아왔다.

“4만 5천 명?”

“원래 전쟁기록은 0하나 더 붙이는 거예요. 저 멀리 동방대륙 허풍쟁이들은 최소 단위를 10만으로 삼고 심심하면 100만 군대 운운하는데요.”

“...그게 말이 돼? 그 숫자가 한곳에 모이면 기근이 발생할 텐데? 나라가 망하지 않아?”

“에이, 원래 그러는 거라니까요. 그런 허풍이 은근히 잘 먹히기도 하고요.”

로벨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착장 분위기를 보면 4만 5천 명쯤 무찌르고 온 분위기였다.

“로드 로벨 로드릭!”

“로드 로벨 로드릭!”

풍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로벨의 귀환이 벌써 알려진 듯 수많은 사람이 로드릭 항으로 마중 나왔다. 구성원을 면밀히 살피면 마녀 키르케와 늑대성 식구들, 헨리 피터 상회장을 비롯한 로드릭 상회 사람들, 호른 가문, 켈트 가문, 바이란 가문 등 인근 기사 가문 식솔 등이었다.

“돛을 접어라! 노를 내려라!”

이안 선장이 크게 소리쳤다. 기함 푸른고래 호가 정선을 준비하자 뒤따르는 크고 작은 갤리선이 차례로 돛을 접고 노를 꺼냈다. 바닷일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멋진 광경이었다.

로벨은 선교에 올라 부두를 바라보았다. 고향 땅, 고향 사람이 반가웠다. 아무리 크고 멋진 자유도시도 나고 자란 고향 마을만 못했다.

“이래서 금의환향하는 거겠지.”

로벨이 손을 흔들자 자지러지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마녀의 해괴한 웃음이 가장 또렷했다.

“저 마녀가 진짜. 나이도 있는데 체통 좀 지키라니까.”

어린 집사가 상기된 얼굴로 투덜거렸다. 고향에 돌아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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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도 개선식이 따로 필요 없었다.

로드릭 항에서 로드릭 시티까지 가는 길이 개선식이었다. 노인들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시했고, 청년들은 박수와 환호로 승리를 축하했으며, 소년소녀는 과일과 빵을 가져와 나눠주었다. 주머니가 무거운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팔다리가 불편한 병사조차 인생에 몇 번 없을 영광의 순간을 만끽하며 활짝 웃었다.

로벨은 시큼한 사과를 한 입 베어 우물거리며 말했다.

“기분 좋은 일이긴 한데, 왜 저렇게 난리야?”

까탈스러운 어린 집사는 사과에 벌레가 있는지 유심히 살피며 대답했다.

“우리 땅-볼탄 반도를 침략한 외국 군대를 무찌르고, 역으로 쳐들어가서 본때를 보여줬잖아요. 솔직히 통쾌하죠.”

“그런 이유야?”

“덤으로 금은보화를 잔뜩 가져왔고요.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은 용병이든 징집병이든 한동안 부자라고요. 그들이 가져온 금화가 딴 데 가지 않으니까 이웃으로서 기쁠 만하죠.”

아직은 낯선 개념이지만, 애국심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페닝은 정직했다. 자유도시에서 가져온 금과 은으로 로드릭 시장이 번창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구나.”

로벨이 역사와 경제를 아우르는 철학 속에서 헤맬 때 고깔모자 친구가 불쑥 끼어들었다.

“기사님, 기사님, 기사님이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모닝스타가 저리 가라는 듯 푸릉- 거렸다. 마녀 키르케는 시끄럽다는 듯 지팡이로 툭툭 때렸다. 어린 집사가 사과를 한입 깨물고 투덜거렸다.

“뭐에요? 제 걱정은 안 해요?”

“집사님은 겁쟁이라 기사님 뒤에 숨어 있었을 텐데요. 기사님이 멀쩡하면 집사님도 멀쩡하겠죠.”

“뭐라구요? 이 마녀가 진짜...!”

로벨은 영광스러운 개선식이 풋내나는 사랑싸움으로 변하기 전에 화급히 말을 돌렸다.

“난 멀쩡한데, 호른 경이 안 좋아.”

마녀 키르케는 딴소리하는 로벨이 야속해 입술을 삐죽였다.

“닥터 줄리안이 살피고 있어요.”

“그래도 한번 가봐. 닥터한테 미안하지만 난 키르케가 더 믿음직스러워.”

마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역시나 마녀 특유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히히힛! 히히힛! 기사님이 그렇다면 봐줘야죠! 금방 다녀올게요!”

마녀는 신이 나서 행렬 뒤쪽으로 빠졌다. 기분 좋은 용병들이 마녀를 보고 아는 척했지만 무시했다. 외팔이의 으르렁거림과 허풍쟁이의 욕설이 아득히 들려왔다. 어린 집사가 듣기 괴롭다는 듯 귀를 후비고 말했다.

“영주님이 자꾸 그러니까 사람들이 영주님 애인인 줄 알잖아요. 영주님이 결혼 안 하는 것도 저 마녀 때문이라고 소문이 났어요.”

“설마?”

“설마가 아니라니까요. 영주님 나이에 독신이 어디 흔한가요. 심지어 호른 경까지 얽혀서 이상한 소문이... 가만, 호른 경은 자기 성에서 쉬면 되는데 왜 늑대성까지 따라오는 거예요?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로벨의 시선이 스르륵- 돌아갔다. 교외로 나들이 나온 곱상한 아낙들이 로벨과 눈을 마주치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공작님이 나를 봤어!’, ‘아니야! 나야! 나!’, ‘어쩜... 소문보다 훨씬 멋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로벨의 얼굴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린 집사가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렸다.

“아니죠? 에이, 아니죠?”

“응. 아니야.”

대답이 조금 빨랐다. 어린 집사가 쌍심지를 올렸다.

“뭐가 아닌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니까 뭐가요?”

“...아무튼 아니야.”

4천 5백 명의 적을 앞에 두고도 덤덤한 기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의심 많은 집사가 대단한 건지, 부상 입은 기사가 대단한 건지 생각해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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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남쪽에서 피와 재로 수확을 하는 동안 북쪽에서는 가을작물이 노랗게 익어갔다. 로드릭 시티 동남쪽 추경지도 계절을 거스르지 않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이삭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하늘하늘 흔들렸다.

로벨은 평소 자주 올라가는 보루 끝자락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기사와 사색은 시인과 전쟁만큼 어울리지 않기에 강제로 옆자리에 앉힌 아야와 이야카마저 불편해했다. 어린 집사가 미운 정 가득한 늑대들을 위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로벨은 상체를 고정하고 고개만 돌렸다. 장소가 장소라 보는 사람이 어지러웠다.

“...백작 말이야”

“어느 백작이요?”

매의 들판에서 전사한 200명은 대부분 페르젠 백작 일파의 병사들이었다.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었지만, 금화로 채울 수 없는 게 머릿수라 한동안 전쟁은커녕 노역을 부리기도 힘들 것이다. 따라서 파도성은 근심할 필요 없었다.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 말씀이군요?”

“응.”

자유도시연맹과 싸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호수성이었다. 일이 잘 풀렸다고 하나, 그냥 두기 찝찝했다.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주군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옛! 주군이요. 영주님의 주인은 옛 신과 국왕 폐하 밖에 없어요.”

“응. 옛 주군.”

어린 집사는 저리 비키라고 이야카를 발로 툭툭 쳤다. 성질이 많이 죽은 수컷 늑대는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피해주었다.

“얄밉지만 대놓고 질책할 건덕지는 없어요. 직접적으로 반항한 것도 아니고, 방패세도 제대로 냈고요.”

“구렁이야.”

“너구리죠. 늙은 너구리.”

어린 집사는 로벨 옆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도시 외벽이 보이고, 그 너머로 개울이 흐르는 넓은 호밀밭이 보였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하고 가슴은 웅장했다.

“영주님이 여기 올라오는 이유가 있었군요? 전 일하기 싫어서 도망친 줄 알았어요.”

“그, 그럴 리가?”

로벨은 남동생을 따라 도망치려는 아야를 꽉 붙들고 여기저기 꼬집었다.

어린 집사는 새끼 양과 뛰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기 좀 죽일까요?”

“어떻게?”

“봉신들을 초대하죠.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하고 호수성 백작이요.”

“...아하?”

어느덧 30살이 된 로벨은 말귀가 제법 통했다.

“나이를 먹어도 기사니까.”

“암요. 암. 주둥이만 살아있는 기사만큼 추한 것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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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축하연회는 꼭 해야 하는 관습이 아니지만, 안 하면 서운한 관행이기는 했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늑대성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술과 고기로 되새겨보자는 취지의 초대장을 뿌리니 열띤 호응으로 돌아왔다. 젊고 가난한 기사들에게는 첫 무용담이 되는 전쟁이기도 했으니 열흘 일찍 찾아와 자기들끼리 먼저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늑대 공작이 어쩌고, 무적무패의 기사가 어쩌고 해도 아직 새파란 애송이군.”

전쟁에 참가한 젊은 기사만 초대된 것은 아니었다.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도 함께 초대했는데,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가 어두웠다.

“속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주군을 연회장의 조롱거리로 삼으려는 겁니다. 가지 마시지요.”

선대 볼트 헤르만 백작 시절부터 충성해 온 중년 기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헤르만 가문의 기사들은 가풍 탓인지 정통적인 기사보다 자유도시의 정치가에 가까웠다. 오리지널 기사 자체인 공작의 노림수 따위 훤히 보였다.

“이렇게 대놓고 비웃겠다 하니 오히려 흥미가 생기는군.”

몰드 헤르만 백작은 최근 들어 하얗게 변한 수염을 만졌다.

“설마 참석하실 생각이십니까?”

“피할 이유가 없지.”

“공작과 공작의 충복들이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것을 신경 썼나. 명분을 주지 않으면 손을 쓸 수 없을 것이야.”

호수성의 노회한 백작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최강의 기사라고 으쓱거려봐야 혼례도 안 치른 애송이다. 어떻게 나오든 상대할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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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은 연회 준비로 떠들썩했다.

자유도시연맹에서 받아온 페닝도 있고, 추수가 끝나 한가로운 일손도 있어 순조로웠다. 볼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대연회가 벌써 세 번째였으니 제법 익숙해진 것도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테이블을 붙여요. 기사 종자들이 들어올 곳이니까 널널하게 의자를 두고요.”

어린 집사는 메인 홀과 연병장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전공이 높은 기사는 성 안에, 공이 없거나 명예가 부족한 기사 및 기사 종자는 성 바깥에 자리를 배치했다. 이 소식을 접한 호수성 기사들은 일제히 분개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문전박대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공작이 제 무덤을 파는군.”

하지만 헤르만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말 위에서 창을 휘두르는 것 밖에 모르는 젊은 공작은 역시 단순했다. 떠돌이 기사도 아니고 ‘백작’을 홀대하면, 그것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소홀히 대하면 누구의 명예가 더러워질지 생각 못한 듯했다.

“늑대라 칭하더니 정말 늑대가 된 모양이다. 어디 마음껏 짖어보라 하세.”

그러나 실제 상황은 생각과 좀 달랐다.

“어서 오시오, 백작!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오!”

“헤르만 백작이 오셨다! 길을 비켜라!”

어디 한번 오만방자하게 굴어보라는 의도로 반나절 늦게 도착했거늘, 타박은커녕 열띤 환영을 받았다. 심지어 성 안에 좌석까지 배정되어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찬 메인 홀에 깨끗이 비워진 헤르만 백작과 기사들의 자리가 사람을 무안하게 했다.

“공작님은... 어디 계시오?”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것은 집주인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거만하고 오만하게 상석에 앉은 페르젠 백작이 대답했다.

“공작님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기사를 위로하고자 호른 성으로 가셨소. 내일 정오쯤 오실 테니 일단 즐기시오.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인 본인이! 친히 백작을 환영할 테니 말이오.”

헤르만 백작 등줄기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너구리의 상대는 늑대가 아니었다. 엉뚱한 사냥꾼이 굴 앞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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