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짜증
자유도시연맹 해안 ‘매의 들판’에서 치러진 대회전은 로벨 로드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흑태자와 기사들은 적의 좌익을 짓밟은 후 울프 용병단과 뒤얽힌 적의 본진을 그냥 지나쳐 페르젠 백작을 괴롭히는 우익의 뒤를 때렸고, 그것으로 장장 3시간에 걸친 전투가 끝났다.
“우아아아아!”
“저 자식이? 야! 저놈 잡아!”
한여름의 초원이 피와 시체로 뒤덮였다. 그리고 울프 용병단은 시체를 하나하나 뒤집으며 전리품을 챙겼다. 숨이 붙은 용병은 숨을 끊어주었는데, 가끔 사지 멀쩡하면서 죽은 척하는 용병이 있어 낭패를 겪었다.
로벨은 전투의 열기가 식은 저녁 들판을 천천히 거닐었다. 간간이 일어나는 소란을 애써 무시하고 큰 공을 세운 친구를 찾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군, 추한 꼴을 보여 면목이 없습니다.”
호른 경은 다소 볼품없이 들것에 실렸다. 호른 경의 기사 종자와 수행원이 갑옷을 벗겨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역삼각형의 상체에 조밀한 근육과 굵직한 핏줄이 인상적이었다. 바다 위로 지는 석양 때문일까? 로벨의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상처가... 심하오?”
호른 경은 수행원에게 멈추라고 손짓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성인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된 자작나무 숲 출신 종자가 안절부절못했다.
“별거 아닙니다. 창끝에 조금 긁혔을 뿐입니다.”
“...내 용병들도 그리 허세를 부리곤 하오.”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사내란 종자들이 문제였다. ‘자존심만 살아가지고...’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호른 경의 상처를 가까이 살폈다. 기분 탓일까? 가슴 근육이 부풀고 아랫배가 쏙 들어갔다.
“힘주지 마시오.”
“...예.”
왼쪽 옆구리가 시퍼렜다. 노을빛으로도 감춰지지 않을 정도였다. 갈빗대가 최소 3개는 부러졌을 것이다.
“청새치 호를 빌려주겠소. 볼탄 반도로 돌아가 정양하시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대단한 배려였다. 4천여 명을 태우고 온 7척의 갤리선 중 하나를 내어준다는 뜻이었다.
“주군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로벨은 그러지 말고 먼저 돌아가라 강권하려다 그만두었다. 싸우지만 않으면 이곳에서 치료해도 괜찮을 듯했다. 이제 큰 싸움은 없을 테니까 수레에 태워 천천히 따라오게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진 않지만 호른 경이 안 보이면 불안했다.
“조, 좋을 대로 하시오.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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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도시연맹의 의회가 있는 패트로쉬 시티가 발칵 뒤집혔다.
전 재산을 털어서 모은 4천 5백 명의 용병이 고작 2천 명의 북쪽 군대를 상대로 반나절 만에 전멸했다. 그것도 일방적이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이끄는 야만인 군대의 사상자는 2백 명이 되지 않았다. 7천 3백 명의 전력이 고스란히 남아 남진을 계속했다.
“4천 5백 명으로 고작 2백 명을 해치웠으면, 얼마가 있어야 막을 수 있는 거야?”
자유도시의 상인답게 셈이 빨랐다. 도시민 전부가 무기를 쥐고 나가도 당해낼 수 없었다.
“미친 짓이었어! 미친 짓이었다고! 밥 먹고 싸움만 하는 놈들한테 전쟁을 걸다니! 의회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능한 의원들을 잡아서 인질로 보내자! 그리하면 살 수 있다!”
공포는 무엇보다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로벨 로드릭 연합군이 1마일 가까워질 때마다 환자가 2배로 늘어났다. 패트로쉬 시티의 고상한 의원들이 광장에 나가 진정시켰지만 소용없었다. 누군가 의회건물에 불을 질러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로벨과 흑태자가 패트로쉬 시티 성문에 도착했을 때는 반쯤 불탄 도시와 초췌한 얼굴로 항복을 선언하는 12명의 시의원만 있었다.
“에헴! 헴!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왜 까불어요?”
어린 집사가 콧대를 세우고 뻐겼다. 로벨을 호위하는 기사들과 용병들이 껄껄 웃었다. 혈기가 강한 젊은 의원은 욱했지만, 의장을 비롯한 노인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유도시를 벗어난 적 없는 청년은 북쪽의 기사가 자기들 같은 줄 알지만, 세상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저들이 얼마나 통제 불능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싹싹 빌어야 할 때였다. 젊은 공작이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말이다.
“전쟁에서 지면 항복하는 것은 당연한데, 자비가 필요한가?”
7천 개의 창칼을 병풍으로 삼으면 밥 먹었냐는 물음도 협박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자비와 항복을 운운하면 말할 것도 없었다. 자유도시연맹 의장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보상을... 피해보상을 하겠습니다. 얼마가 들든, 얼마가 걸리든...”
젊은 의원이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치를 줬다. 전쟁배상도 최대한 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도시간의 분쟁은 항상 그렇게 처리되었기에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
“글쎄... 당신들을 죽이고, 도시를 태우고, 금붙이와 은붙이를 가져가는 편이 깔끔하지 않겠소? 다른 곳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은데?”
로벨의 얼굴은 평온했다. 목소리도 높낮이가 없었다. 따라서 협박이 아니었다. 정말로 고민 중이었다. 귀하게 자라 눈치가 부족한 젊은 의원도 비로소 분위기를 깨달았다. 금화가 문제가 아니었다. 1만 5천 명의 도시민 목숨이 걸려있었다. 의장이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말했다.
“지금 도시를 약탈하면 얼마 남지 않은 금화 부스러기를 가져갈 뿐입니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매년 보상금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 금액이 결코 작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한 번 더 눈치 보았다.
“크레타 항의 소유권을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연맹의 선박은 아직 멀쩡하니 멀지 않은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로벨은 보일 듯 말듯 웃었다. 배부른 맹수가 작은 사냥감을 보며 웃는 느낌이었다.
“아직 해상권을 잃지 않았으니 싸움이 길어지면 피 보지 않겠는가, 이 뜻이오?”
“저희가 어찌 감히 공작님께...”
자유도시연맹의 의장은 유능했다. 크레타 항을 원하는 것은 지속적인 교역을 원한다는 뜻이니, 그런 로벨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지금 화친하지 않으면 이후 바다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노라 협박했다. 내용을 알면 대단히 무례했다. 머리 나쁜 기사들은 이해 못했지만, 머리 좋은 어린 집사는 크게 발끈했다. 하지만 로벨은 로벨이었다. 비굴한 것보다 당당한 것을 좋아했다.
“그럼 배상금에 관해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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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vs 자유도시연맹의 전쟁이 끝났다. 보리가 여무는 초여름에 시작해서 과일이 익어가는 초가을에 끝났으니 무려 117일에 걸친 긴 전쟁이었다. 그만큼 변한 것도 많았다.
“얻은 것은 많은데, 나가는 것도 많아요.”
우선 전쟁 배상금의 3할을 흑태자에게 양보해야 했다. 잉그비아 왕립 해군이 아니었으면 인어해를 건너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흑태자와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공성병기로 써도 될 묵직한 금화자루를 배에 실으며 매우 기뻐했다.
내부적으로 나가는 금액도 상당했다. 용병들에게는 전투 횟수에 따라 전쟁수당을 줘야 하고, 의무종군일을 초과한 기사들에게는 복무일수에 따라 부대 유지비를 줘야 했다. 추가로 공이 있는 기사에게는 봉토를 하사해야 하는데, 가진 것이 폐허가 된 크레타 시티뿐이라 시내에 구획을 나눠 하사했다. 다행히 불만은 없었다. 나중에 도시를 재건하면 큰돈이 될 거라 여겼다.
“여기 퍼주고, 저기 퍼주고, 거기 퍼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어요.”
어린 집사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외설적인 신체 부위로 묘사되는 오랜 친구는 속지 않았다.
“내가 아는 집사라면 그래도 충분히 남겼을걸? 그렇지?”
로벨이 은근하게 떠보자 어린 집사가 히쭉히쭉 웃었다.
“크레타 항구의 모든 권리는 영주님 앞으로 되어있어요. 이것만큼은 흑태자한테도, 백작들한테도 양보하지 않았죠.”
크레타 시티는 인어의 바다 중간에 위치하여 유라피아 대륙과 동방대륙을 연결하는 중간 기항지였다. 로드릭 항, 프란시스 항, 크레타 항으로 잇는 인어해 항로를 완성할 경우 그 수익은 북부대로 전체수익의 몇 배가 될 것이다.
“와아, 그 정도야?”
“짐승이 옮기는 화물과 바람이 옮기는 화물은 천지차이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어린 집사는 크레타 시티의 중계무역 수익을 확인할 때마다 감탄했다. 0이 3개 이하면 하찮게 보일 정도였다.
“사실 이번 전쟁을 시작할 때 미친 거 아니냐 생각했는데, 이렇게 결과가 나오니까 몇 번 더 해도 될 거 같아요. 아예 연례행사로 할까요? 인어의 바다를 통째로 삼켜버리죠?”
“...살려줘.”
로벨과 어린 집사에게는 농담이지만, 그것이 농담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인어의 바다와 닿아 있는 여러 지방의 제후들이었다.
“자유도시연맹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그 증표로 도시 하나를 차지했다는군.”
“볼탄 반도의 늑대 공작... 그자를 가장 경계해야 하오.”
“이제 30대 중반이라 하지 않았나? 어디까지 세력을 확장할지 모르겠군.”
국가와 문화가 다른 수많은 제후 중 가장 크게 경계한 것은 다름 아닌 옆동네 후작이었다.
“이번에도 이겼군.”
포클랜드 시티의 자비에 후작은 풍문보다 먼저 소식을 접하고 고뇌했다. 세인은 이해할 수 없는 고뇌였다. 세작의 보고서를 가져온 수행기사가 코웃음으로 사족을 붙였다.
“흑태자가 돕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승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남부 해안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겠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자비에 후작은 3대째 충성해 온 젊은 기사를 경멸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흑태자와 인연 또한 로드릭 공작이 쌓은 힘이오. 정확히는 사트로 후작을 굴복시키고 검은 숲과 네일 공국을 우방으로 삼아 북쪽을 안정시켰기에 이렇게 남쪽으로 뻗어 갈 수 있는 것이오.”
앞서 말한 세력 중 하나라도 적대 중이었으면 4천이 넘는 대군을 바다에 띄우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다음이오.”
“다음이라 하시면?”
젊은 기사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이웃집의 상승세에 골치가 아픈 후작은 기어이 짜증을 부렸다.
“생각을 좀 하시오! 생각을! 경의 부친은 그러지 않았거늘, 경은 어찌 그 모양이오?”
젊은 기사는 화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한 기사라도 이리 모욕하면 안 되었다. 기사들의 모임인 귀족원에서 평판이 떨어지면 곤란한 것은 후작이었다. 어느 기사가 무례한 제후에게 충성을 바치겠는가.
자비에 후작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화를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재작년에는 북쪽을 정벌하였고, 올해에는 남쪽을 토벌했으니, 내후년에는 그 칼이 어디로 향하겠소?”
자비에 후작에게 안 된 일이지만, 그는 기사 복이 별로 없었다. 젊은 기사는 고심 끝에 입술을 떼었다.
“도, 동쪽일까요?”
“...나가시오.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