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4화 (364/605)

364화. 작전

로벨의 사소한 고민과 별개로 기사의 결투는 장렬했다.

호른 경의 마상창 실력은 볼탄 반도가 인정하지만, 4천 5백 명의 자유도시연맹 용병을 대표해 나온 남부 기사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헤비 랜스가 서로를 비켜내고 어깨와 옆구리를 찔렀다. 쾅-!

세게 때리면 부러지는 마상시합용 버드나세가 아니라 참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진짜 랜스였다. 제대로 맞으면 판금을 뚫고 들어갔다. 어깨와 옆구리라고 무사할 수 없었다. 체자레 경은 크게 휘청거렸고, 호른 경은 안장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호른 경!”

로벨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적군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아군 진영에서 탄식이 흘렀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호른 경이 비적비적 일어났다. 로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아직 괜찮아...”

호른 경은 낙마할 때 삐뚤어진 헬름을 고쳐 쓰고 롱소드를 뽑았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숨이 턱턱 막히지만,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체자레 경도 겨우 낙마를 면했을 뿐 멀쩡하지 않았다. 아니, 상처만 보면 호른 경보다 심했다. 호른 경이 창이 뱀브레이스 틈새를 파고들어 더블릿의 사슬을 찢은 것이다.

“패트릭 호른 경이라 했소?”

“로벨 로드릭 공작을 모시는... 자작나무 숲의 호른이오.”

체자레 경은 어깨에 박힌 창날을 뽑았다.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포비아 왕국의 기사는 소문대로 대단하군.”

체자레 경은 안장에서 더블 플레일과 숏소드를 꺼냈다. 승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시 돌격했다.

호른 경은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플레이트 아머가 아무리 단단해도 말 위에서 휘두르는 철구에 맞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갑옷은 버텨도 사람이 버티지 못한다.

붕-! 부웅-!

쇠사슬에 달린 쇳덩이 두 개가 요란히 스쳐 갔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숨이 거칠어졌다. 한 번은 요행히 피했지만, 두 번은 자신이 없었다. 말 위의 상대와 싸우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했다. 일단 쫓아갈 수가 없었다.

‘주군이라면 이럴 때도...’

호른 경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떠올렸다. 그리하면 영웅소설에서는 어떤 영감을 받아 극적인 역전을 하는데, 현실은 좀 달랐다.

‘주군은 낙마한 적이 없잖아!’

로벨을 모방하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로벨이라면 첫 격돌에서 머리통을 날렸을 것이다.

그 사이 체자레 경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이번에도 두 갈래 플레일이 쏘아졌다.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나 피할 수 없었다. 호른 경은 롱소드를 내밀었다.

‘사슬을 부순다!’

철구를 때리면 칼이 부러지거나 손목이 박살날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사슬을 감아 궤도를 빗겨내는 것이다.

촤르륵- 깡-!

운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평소 단련을 열심히 해서일까, 철구가 머리를 때리기 직전 칼끝이 사슬에 닿았다. 원심력을 잃은 한 쌍의 철구는 예정보다 짧게 휘돌며 칼날을 감았다. 호른 경은 반사적으로 체중을 실어 아래로 당겼다.

체자레 경은 플레일 자루를 꽉 쥐고 버텼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창에 찔린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차라리 플레일을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억지로 버티다 도리어 끌려갔다.

“우와아아아!”

멀리서 보면 굉장한 광경이었다. 호른 경이 칼을 수직으로 휘두르자 상대 기사가 균형을 잃고 낙마한 것이다. 호른 경은 역전의 용사답게 역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낙마 충격으로 ‘컥! 커컥!’ 거리는 체자레 경을 발로 차 뒤집고 올라탔다. 체자레 경은 숏소드를 휘저으며 저항했지만 무기가 안 좋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손바닥 크기의 대거였다.

“좋은 결투였소.”

호른 경은 허리춤에 송곳처럼 가느다란 파냐드 대거(Poniard Dagger)를 뽑아 체자레 경의 헬름 틈새로 밀어 넣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잠깐 보였으나 금방 사라졌다.

호른 경은 칼날을 좌우로 비틀어 확실히 마무리했다. 칼끝이 신경에 닿은 듯 팔다리가 들썩였다. 힘든 싸움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은 기사 옆에 나란히 눕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뻣뻣한 다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일어났다. 앞뒤로 수천의 군대가 보였다. 이곳이 전장의 중심이었다.

“내가...”

흙먼지를 많이 먹어 목이 칼칼했다. 헬름을 벗고 흉갑 아래 넣어둔 비단 손수건을 꺼냈다. 때마침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과 손수건을 일으켰다.

“나 패트릭 호른이 승리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 만세! 볼탄 반도 만세!”

로벨은 즉시 아론다이트를 뽑아 치켜들었다. 그에 호응해 울프 용병단이 병장기를 흔들며 함성 질렀다. 결투를 지켜본 좌우익의 부대도 지지 않고 소리 질렀다. 2천 명이 기세로 4천 5백 명을 압도했다.

“와아아! 와아아아! 와아!”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로벨은 호른 경이 이겼다는 사실에,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빠르게 명령했다.

“펄프 대장! 그대로 전진해! 적 사거리까지 멈추지 마! 과묵한 몬트! 우익에 신호를 보내! 기사들을 돌진시켜!”

기세가 올랐을 때 공격하는 것은 전장의 상식이다. 펄프 대장은 애꾸눈과 발가락에게 전진을 명령했다. 동시에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가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우웅-!

두 사람의 나팔은 중대 단위로 퍼져갔다. 100야드마다 위치한 나팔수가 차례로 벨을 올리고 고동 소리를 내었다. 부우웅-! 부웅-!

로벨 로드릭 군이라 불리는 거대한 생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살금살금 흔들리다 어느 순간 번개처럼 오른손이 휘둘러졌다. 흑태자와 켈트 남작이 지휘하는 500여 기의 기마부대였다.

기사들은 바다 위로 저무는 태양을 옆구리에 끼고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흙먼지가 해일처럼 일어났다.

“역시 잉그비아 왕국의 영웅이야.”

양국의 기사들이 뒤섞였음에도 완벽하게 돌격대형을 갖추었다. 한 자루의 잘 벼려낸 창처럼 보였다.

“펄프 대장, 속보로 올려.”

“속보! 속보! 에라이! 비켜라!”

펄프 대장은 로벨 옆에서 명령을 하달하다 답답한지 직접 뛰쳐나가 깃발을 잡았다. 선두의 크로스보우맨이 완보에서 속보로 올리자 후미의 풋맨은 구보로 뛰었다.

“집사, 작전이 뭐냐고 물었지?”

“예?”

“저게 내 작전이야.”

어린 집사는 ‘저게’ 뭔지 한참을 찾았다. 정답은 가까이 있었다.

울프 용병단은 거의 뛰다시피 이동했는데, 놀랍게도 대열이 망가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비스!”

“파비스 설치!”

애꾸눈이 명령하자 크로스보우맨은 즉시 등 뒤의 대형 방패를 풀어 땅에 세웠다. 발판을 붙이고 말뚝을 박는데 20초가 걸리지 않았다. 방향과 간격도 거의 일정했다.

“전술의 기본은 철저한 훈련이야. 그런 의미에서 울프 용병단은 최고의 전술병기야.”

“1, 3소대 사격준비!”

“2, 4소대 대기! 대기해!”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 중대가 사격자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유도시연맹의 용병은 좌익이 녹아내리는 선제공격에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용기를 쥐고 명예를 향해 달리는 기사는 말할 것도 없어. 기사가 왜 기사인지, 용병과 무엇이 다른지 알게 될 거야.”

볼탄 반도와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들은 호른 경의 활약에 눈이 반쯤 돌아갔는데, 지금은 자신들끼리도 경쟁이 붙어 완전히 미쳐버렸다. 앞을 막으면 아군이라도 베어버릴 기세였다.

자유도시연맹 측에도 기사와 기마 용병이 있었지만 차원이 달랐다. 어설프게 뛰쳐나온 남부 기사는 순차 공격에 쓸려나갔고, 명예를 모르는 기마 용병은 말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그러자 숫자만 많을 뿐 통제되지 않는 보병은 흥분한 전투마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호른 경이 띄운 기세에 흑태자의 카리스마가 더해진 결과였다.

“사격 개시!”

“쏴라!”

크로스보우 제1, 3소대가 일제히 격발했다. 볼탄 반도 최고의 사수가 모인 울프 용병단에서 다시 최고의 사수를 골라 편제한 제1소대였다. 우글우글 모인 과녁을 내키는 대로 후벼 팠다. 십수 명이 와르르- 쓰러졌다.

“쏴, 쏴라! 쏴!”

자유도시연맹 용병도 즉시 반격했다. 길고 짧은 화살이 두서없이 날아들었다. 숫자는 많지만 제멋대로였다.

울프 용병단의 화살비가 짧고 굵게 쏟아붓는 소나기라면, 자유도시연맹의 화살은 사방으로 휘날리는 가랑비였다. 정말 재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파비스 뒤에서 안전하게 버텼다.

“2소대, 4소대! 발사!”

“발사! 발사!”

소나기가 다시 쏟아졌다. 쇠뇌의 등자를 밟고 낑낑거리며 장전하던 자유도시연맹 용병이 또다시 우르르- 무너졌다.

실전과 실전 같은 훈련으로 다져진 순차사격의 위력이 드러났다. 이어서 1, 3소대가 재사격하자 원거리 승부가 갈렸다. 자유도시연맹의 용병대장은 좌익을 찢어발기는 북쪽 기사들과 묵직하게 화살비를 날리는 울프 용병단 사이에서 결단을 내렸다.

“돌격! 돌격! 적의 본진을 쳐라! 난전이 되면 기사 놈들도 날뛰지 못한다!”

수적 우위를 생각하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적어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다 말발굽에 전멸하는 것보단 나았다.

“파이크맨! 앞으로!”

울프 용병단의 장기가 크로스보우 사격이라 하나, 그것만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여 명의 장창병이 발을 맞춰 선두로 나갔다.

“창 세워!”

구름을 휘젓던 창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창벽을 흔히 고슴도치로 비유하는데, 숙련된 창병에게 조금 실례였다. 파이크의 길이는 10피트에서 15피트에 이르렀다. 길이만큼 무게가 만만치 않아 창대를 고정하고 버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가시 하나하나가 살아있었다. 그것은 아주 큰 차이였다.

“찔러라!”

적이 가까이 오자 크게 한발 내디디며 창을 뻗었다. 순간적으로 2피트 이상 길이가 늘어나 다수의 적이 절명했다.

“제길! 계속 가! 창벽을 허물어!”

한번 찌른 창을 회수하기란 쉽지 않다. 자유도시연맹 용병이 창대를 후려치며 파고들었다.

“스피어맨!”

파이크 아래로 5~6피트 길이의 짧은 숏스피어가 나타났다. 열심히 창날을 치우고 다가온 자유도시연맹 용병은 복병을 맞아 다시 쓰러졌다. 이쯤 되자 전의가 남아나지 않았다.

“맨앳암즈! 앞으로!”

“더러운 배신자들아! 너희 차례다!”

“수급 하나당 금화 하나다! 싸워라!”

마지막은 칼과 도끼였다. 단병기를 가진 울프 용병단과 전향한 용병이 창대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창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적을 시원하게 때려눕히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 너무 세잖아!”

“이 자식들! 대체 뭐야!”

울프 용병단은 집단전술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기량에서도 앞섰다. 외팔이가 도끼로 찍고 바클러로 때리며 껄껄 웃었다.

“싸우는 시늉하며 고용주 등쳐먹는 너희 남부 것들하고 다르지! 어디 바바리안 도끼맛 좀 봐라!”

외팔이가 특별히 무례하진 않았다. 외팔이 수준의 조롱과 폭력이 수십 곳에서 벌어졌다.

로벨은 승기를 잡은 중앙과 우익을 두루 살핀 후 페르젠 백작이 이끄는 좌익으로 관심으로 옮겼다. 자유도시연맹의 최정예 부대-우익을 상대해야 하는 만큼 쉬운 곳이 아니었다.

‘뭐, 페르젠 백작이니까.’

자존심과 경쟁심이 가득한 페르젠 백작이었다. 로벨과 흑태자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 2배나 많은 적을 이길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흑태자가 적을 분쇄하고 울프 용병단이 전장을 장악할 때까지는 버텨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볼탄 반도는 백작들의 힘을 좀 빼놓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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