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손수건
로벨의 제안은 꽤 합리적이었다.
로벨이 요구한 곳은 안토니오 항이 아니라 이미 점령된, 정확히는 완전히 파괴된 크레타 항이었다. 안토니오 시민 입장에서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것이 자유도시연맹의 특징이기도 했다.
“왕이나 제후가 다스리는 땅이면 순순히 내줄 리 없지만, 이곳은 자유도시니까.”
“예! 맞아요! 12개의 개별적인 국가가 연합한 것이죠. 여기 사람에게 크레타 시티는 잘해야 동맹국? 그보다 못한가? 아무튼 남남이죠!”
로벨과 어린 집사의 설명에 펄프 대장이 의문을 가졌다.
“그럼 굳이 저놈들과 협상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로벨은 잠깐 멈칫했다. 설명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유능한 어린 집사가 나섰다.
“늑대성과 볼탄 반도는 당연히 영주님꺼지만, 국왕 폐하와 여러 제후들에게 인정을 받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교역권리, 어업권리, 경영권과 부동산 등이 얽혀있는데, 이건 당장 알 필요 없죠?”
“아아, 그런 것이군.”
펄프 대장은 완벽히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해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완벽한 설명 뒤에 사족을 붙였다.
“그리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어.”
“누구한테 말입니까?”
“전부 다. 자유도시연맹의 모든 도시가 갈등할 거야.”
크레타 시티는 초토화가 되었지만, 안토니오 시티는 크레타 시티의 소유권을 넘겨 화를 피했다. 이것은 여러 도시에게 고민할 거리를 주었다.
‘우리가 희생하지 않아도 재산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고?’
자유의 또 다른 뜻은 방임이니 진정한 의미로 자유도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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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예상대로 4개 도시가 협상을 요청했다. 대부분 비둘기파가 장악한 도시들이었다. 처음부터 전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거래에 선뜻 응했다.
하지만 모든 도시가 평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악마도 부릴 수 있다는 황금으로 아이란드 왕국, 알베니아 왕국, 모나카 왕국의 용병을 사들였다. 그 숫자가 4천 5백 명이었다.
“아주 작정했군. 사생결단을 낼 모양이야.”
파도 평야에서 싸운 용병의 2배였다. 그때와 달리 어중이떠중이와 풋내기가 대부분이지만, 그건 로벨 로드릭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아군의 전력을 검토했다. 파도 평야에서 손실된 병력을 제외하면, 기사와 기사 종자 310명, 울프 용병단 289명과 전향한 용병 322명, 페르젠 백작 등이 데려온 프리랜서 120명과 새로 합류한 용병 51명, 흑태자의 기사와 해적 용병 1,000여 명을 포함해 ‘진짜’ 병사는 2천 명이었다.
“그럼 저 5천 명은 식충이에요?”
“첫 전투에 농민병을 배치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야. 그들은 어느 정도 승기를 잡은 다음 투입해야 해.”
“에휴. 도움이 안 되는군요.”
로벨은 승률을 따져보았다. 용병이라 해도 철없이 전쟁터에 뛰어든 풋내기와 여러 전장을 오가며 단련된 베테랑은 달랐다. 게다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들은 과장 없이 일당백이었다. 충분히 해볼 만했다.
“문제는 싸울 장소인데...”
로벨은 안토니오 시티에서 패트로쉬 시티까지 상세히 그려진 지도를 살폈다. 상인들이 그린 거라 그런지 볼탄 반도 지도보다 정밀했다.
“성 안에서 싸우지 않을까요? 이쪽에 요새도 있잖아요.”
“여긴 해안 요새야. 육지 쪽의 방어시설이 허술해서 수성하지 않을 거야. 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담장이 있는 게 유리하잖아요?”
“저들은 상인이잖아. 싸우는 것은 용병이고. 성벽 위로 대포알이 날아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분명 회전을 지시할 거야.”
근 1만의 숫자가 싸울만한 장소는 많지 않았다. 로벨은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가 전장이야.”
어린 집사는 로벨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세필로 지명이 새겨져 있었다. 매의 들판.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만을 끼고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숲도 없고, 언덕도 없었다. 기사들이 좋아할 전장이었다.
“저들이 바보도 아닌데 여기서 싸울까요?”
“싸우게 해야지.”
로벨은 전장에서 선을 그었다. 어린 집사가 지목한 해안 요새가 3마일이 되지 않았다.
“이쪽에 5천의 농민병과 포병대를 배치할 거야. 점령은 못해도 위협이 되니까.”
“아하? 요새를 구하러 오게 한다?”
“혹은 차 떼고 포 떼었으니 2천 명 정도는 해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차(Rook)가 아니라 쫄(Pawn)을 뗀 거잖아요.”
어린 집사가 오류를 지적했다. 로벨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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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공작이 지휘하는 7천 5백 명의 군대가 움직였다.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대군이었으니 하루가 지나지 않아 크레타 시티 외 11개 도시와 3개 요새에 소식이 전해졌다. 자연히 히스테리한 반응이 나왔다.
“우리 도시에 못 오게 막아! 나가서 막으라고!”
자유도시연맹의 상하원 의원들은 수완 좋은 사내들이었다. 다만, 그 수완 중에 전쟁수행은 없었다. 크레타 시티가 불에 타 이성이 마비되었을 수도 있고, 전 재산을 털어 모집한 4천 5백 명의 용병으로 자신감이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용병들을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 났다.
그러나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으로 장사하는 용병들은 신중했다. 피가 끓어오르는 철부지 용병들은 겁 없이 날뛰었지만, 일군을 이끄는 용병대장들은 냉철하게 적을 살폈다.
“해안 요새를 공격할 속셈이군.”
“호오? 정석대로 나오시겠다?”
로벨 로드릭 군은 바닷가의 도시와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다. 5천 5백 명의 군사로 요새를 포위하고, 2천 명의 군사로 지원군을 견제하는 모양새가 확실했다. 그 2천이 정예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자유도시연맹의 절반이었다.
자유도시연맹의 지휘관은 고용주의 압박과 용병들의 재촉, 그리고 수적 우위의 자신감으로 마침내 매의 들판으로 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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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종(種)을 통틀어도 수천의 동족이 한곳에 모여 죽고 죽이는 일은 희귀했다.
그것은 무리 짓는 짐승의 본능과 탐욕이 필요하며, 아이러니하게 본능을 억누르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했다.
척. 척. 척. 척...
철편, 사슬, 가죽, 양모, 솜 등등. 연약한 피부와 부실한 뼈를 보호하기 위해 껍질을 덕지덕지 붙이고, 적의 껍질을 부술 수 있는 이빨을 날카롭게 세우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무지개를 향해 비스듬히 걸어갔다.
머리 위에서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오른편에서는 짠내나는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왼편에서는 욕설과 기도문이 쉼 없이 들려왔다. 이번이 여섯 번째 전투인 베테랑 용병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길! 싸울 거면 빨리 싸우자! 더워서 뒤지겠다!”
전장의 분위기는 무겁고 뜨거웠다. 한껏 광을 낸 모리안 아래로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창을 쥔 손바닥이 끈적거리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미리 방광을 비워서 다행이었다.
전열의 어깨너머로 이번 적이 보였다. 먼 곳의 동방인은 ‘유라피아 대륙인’이나 ‘칠왕국인’이라 합쳐서 부르지만, 인어해 북쪽에서 나고 자란 용병과 남쪽에서 나고 자란 용병은 닮은 점이 별로 없었다. 피부색도, 털색도, 복장도, 심지어 공용어의 느낌도 달랐다.
‘그래도 이 좆같은 기분은 똑같겠지.’
기도문이 한층 커졌다. 부모가 독실한 신자였는지, 아니면 조실부모하고 수도원에서 자랐는지 기도문을 길게도 암송했다. 보통은 세 구절 정도만 외우는 편이었다.
“옛 신이시여, 어린 양을 굽어 살펴주셔서.”
저쪽도 옛 신의 어린 양이란 사실은 애써 잊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재촉해 우익에서 좌익까지 900야드의 진영을 살폈다. 공격을 담당하는 우익은 흑태자가 지휘하고, 수비를 담당하는 좌익은 페르젠 백작이 지휘했다. 수차례 회전을 겪은 노련한 기사들이니 걱정 없었다.
“이렇게 보니까 장난 아니게 많네요.”
어린 집사가 창과 망치를 들고 따라왔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공작쯤 되는 기사가 종자 없이 다니면 보기 안 좋다고 기어이 기사 종자 노릇을 자처했다. 이제 제법 키도 크고 수염도 까칠해서 병장기 몇 개 정도는 가뿐했다.
“이제 슬슬 작전을 말해주세요.”
어린 집사가 나직이 물었다.
로벨은 크로스보우맨을 전진 배치하는 북군 지휘관 애꾸눈과 파이크맨의 대열을 다듬는 남군 지휘관 발가락을 번갈아 살폈다.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기사만 유능한 게 아니었다.
“무슨 작전?”
“아무리 영주님이라도 저 많은 용병을 이기긴 힘들잖아요. 기막힌 작전이 있는 거죠? 그렇죠?”
로벨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지평선을 가득 메운 자유도시연맹 군대가 보였다.
“많긴 많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2.25배에요. 교환비가 1대 2 나와도 진다고요.”
어린 집사가 핀잔 주었지만 로벨은 딴소리로 답했다.
“저렇게 많이 고용했으니까, 자유도시연맹은 남은 돈이 없겠지?”
“어... 그렇겠죠? 아무리 부자가 많아도 저 숫자는 한두 푼이 아니니까요.”
“이번에 이기면 확실히 끝나겠네. 잘 됐어.”
어린 집사는 어떻게 이길 거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튼 이길 생각이니까 믿기로 했다.
그때, 적진의 인간 장벽 앞으로 말 한 필이 달려 나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알지 못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기마 용병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사 출신인가?”
“기사가 용병짓을 왜 해요?”
“사고 쳐서 쫓겨났거나, 찢어지게 가난하면 할 수 있지.”
로벨은 백기가 있는지 살핀 후 어린 집사에게 말했다.
“랜스.”
“예?”
“결투신청이야.”
로벨의 짐작대로였다. 자유도시연맹에 고용된 기사는 울프 용병단의 150야드 앞에서 말을 세우고 창을 들었다.
“나는 알베니아 왕국의 자유기사 체자레 시니아다! 북쪽의 기사 중 누가 나와 겨뤄보겠는가!”
로벨은 저거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무기를 꼭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안 돼요! 체자레인지 체지방인지 듣도 보도 못한 기사인데 영주님이 나설 필요 없잖아요?”
“저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주군께서 나서기에 격이 떨어집니다.”
어느새 다가온 호른 경이 동조했다. 로벨은 무기를 안 내놓는 기사 종자와 결투를 방해하는 수행기사를 번갈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자는 기사야. 명예롭게 대해야 해.”
로벨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심장이 덜컹했다. 주군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경이? 왜?”
“이번 전쟁에서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로벨의 표정이 풀렸다. 그런 이유라면 화낼 수 없었다.
“좋소. 하지만 위험하면 바로 물러나시오.”
로벨은 말로만 격려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안장주머니를 뒤적였다. 눅눅한 비스킷이랑 먹다 남은 육포랑 기름종이에 쌓인 암염이 차례로 나왔다. 휘하 기사에게 자랑할 물건은 아니었기에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아, 찾았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 간신히 원하는 것을 찾았다. 포클랜드에서 가져온 비단 손수건이었다.
“창과 방패를 내리는 것이 옳으나 손에 익지 않은 무기로 싸우기는 힘들 터. 이것으로 나의 대리인임을 증명하시오.”
호른 경의 얼굴에 감격이 떠올랐다. 고삐를 시종에게 맡기고 두 손으로 손수건을 받았다. 전장만 아니면 전투마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주군의 이름으로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늠름하게 앞으로 달려갔다. 로벨은 뿌듯하게 호른 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아니었다.
“왜, 왜 그랬어요?”
어린 집사가 더듬더듬 따졌다. 로벨은 시선을 고정하고 반문했다.
“뭐가?”
“손수건이요! 손수건!”
“그러니까 뭐가?”
어린 집사는 혹시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린 후 나직이 윽박질렀다.
“기사에게 주는 손수건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호른 경이 정체를 알아채면 어쩌려고요!”
로벨은 큼직한 눈을 깜박였다. 기사 소설 마니아가 손수건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호른 경과 체자레 시니아 경이 번개처럼 격돌할 때 로벨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저한테 물어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