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2화 (362/605)

362화. 협상

로벨은 달이 찰 때까지 술을 마시고 어린 집사와 모닝스타에 의지해 군영에 돌아왔다.

긴 항해로 피곤할 텐데 잠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과 전향 용병의 경우 고향에 돌아왔다는 흥분과 처참히 죽은 동향 사람의 동정으로 싱숭생숭했다.

“고향은 무슨! 저들 중에 크레타 시티 출신이 몇이나 된다고요?”

“그래도 인어의 바다 남쪽이잖아.”

로벨은 남쪽 용병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둥근 터번을 쓴 남부인이 에르나 왕국이나 네일 공국을 짓밟으면 북군(北軍)도 비슷할 것이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기사 나리 오셨다! 야, 일어나!”

펄프 대장, 애꾸눈, 외팔이, 허풍쟁이, 겁쟁이, 과묵한 몬트, 싸움개, 발가락 등 소대 이상을 지휘하는 고참 용병들이 찾아왔다. 따로 모이라고 한 적 없지만, 소위 말하는 짬밥이 있어 눈치껏 기다리고 있었다.

“울프 용병단 외 611명 출진 준비가 끝났습니다.”

“답 없는 농민병들이 문제긴 한데, 기사 나으리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그렇게 말하지 마. 호른 경한테 따로 말할게.”

로벨은 부대정비를 간략히 보고받고 칭찬했다. 기사 나리를 경외하는 외팔이, 겁쟁이, 싸움개 등은 몹시 좋아했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펄프 대장과 애꾸눈은 심각했다.

“내일 바로 안토니오 시티를 공격합니까?”

“응. 시간이 없으니까.”

왜 시간이 없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 근처 지리를 잘 아는 용병을 데려와. 행군로를 짜야 하니까.”

로벨이 고민 없이 일을 진행하자 놀랍게도 외팔이가 의문을 표시했다.

“그런데 무턱대고 가도 될깝쇼? 대포 말고 공성무기도 없는데...”

“응. 괜찮아.”

로벨은 술기운에 작게 트림하고 이어 말했다.

“내일은 싸우지 않을 거야.”

정통 바바리안의 후예 외팔이 상식으로 ‘도시를 점령한다’와 ‘싸우지 않는다’가 이어지지 않았다. 로벨의 명령을 이해하려고 안간힘 쓰다가 포기했다.

‘에라이! 기사 나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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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시티에서 가장 흔한 이름은 안토니오였다. 빵 굽는 안토니오, 기와 굽는 안토니오, 대패질하는 안토니오, 흥정하는 안토니오 등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안토니오라면 안토니오 시티를 대표하는 상원의원 안토니오였다.

“그, 그 야만인들이 이곳에 온다고?!”

안토니오 의원이 발작을 일으켰다. 크레타 시티로 만족하고 물러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으나, 기대는 그저 기대였다. 흑태자와 늑대 공작의 악명이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멍청한 얼굴로 사람을 속이는 악마였어!”

“의원님, 이제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뭘 어찌해! 성문을 닫고 용병을 불러야지!”

“하, 하지만...”

안토니오 시티는 생활공간이 전쟁공간인 북방의 도시와 달랐다. 시민을 피난시킬 아성도 없고, 군대를 주둔시킬 요새도 없었다. 커다란 담장 수준의 외성에 하찮은 보루만 듬성듬성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방어시설-해자, 도개교, 마시쿨리-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안토니오 시티는 바다와 거래하는 상인의 도시였다. 외적과 싸우는 기사의 요새가 아니었다.

“용병들이 도, 도망가고 있습니다. 상대가 너무 안 좋다고...”

로벨 로드릭&흑태자 연합군은 7,500명에 이르렀다. 그저 지나가는 것만으로 땅이 황폐해질 대군이었다.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용병은 진작 도시를 떠났다. 그냥 떠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소 원한이 있는 시민을 폭행, 살해하기도 하고, 적군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시민병을 모집해라! 시민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말해! 아니, 아니다. 내가 가지. 내가 연설을 하면...”

“소용없을 겁니다. 시민들도 피난 가고 있습니다.”

바다를, 해군을 너무 믿었다. 육지에 올라온 포악한 야만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아... 옛 신이시여! 정녕 우리를 버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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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수만의 도시민을 공포에 밀어 넣은 로벨이지만, 말 못할 고충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흑태자와 합류하여 더욱 커졌다.

“식량이야.”

로벨이 구유통에 걸터 앉아 말했다. 모닝스타가 귀를 쫑긋거렸다.

7,500명이면 어지간한 도시 인구였다. 하루에 먹고 마시는 소비량이 도시 전체의 소비량과 비슷했다. 아니, 1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의 건장한 사내들이라 훨씬 많았다. 더욱이 자유도시는 교역도시였다. 농사를 짓지 않으니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도 얻을 것이 없었다.

“상인의 발길이 끊기면 그 콩도 안 나와. 그때는 풀을 먹어야 할 거야.”

콩과 귀리를 섞은 여물을 우적우적 씹어 먹던 모닝스타가 웃기지 말라는 듯 ‘푸르릉-’ 거렸다.

“그래. 그 전에 항복을 받아야지.”

“이제 말하고 대화하십니까?”

호른 경이 웃으며 다가왔다. 로벨은 무안해서 헛기침했다.

“보통 말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군요. 대륙 곳곳을 다녔으나 이런 녀석은 본 적이 없습니다.”

호른 경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쓸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모닝스타는 수컷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야와 이야카도 한 수 접어주는 가지런한 이빨로 호른 경의 손을 깨물었다.

“으거걱!”

장난이 아니었다. 컨틀렛에 끼우는 가죽 장갑이 아니었으면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로벨은 끔찍한 사고에도 그만 ‘풉!’하고 웃었다. 예의 바르고 점잖은 모습만 보이는 호른 경이 말에게 물려 비명 지르니 우스웠다.

“주군?”

“푸릉?”

호른 경과 모닝스타가 깜짝 놀라 로벨을 쳐다보았다. 로벨이 소리 내어 웃은 것을 오랜만에 보았다. 아니, 처음 보았다. 크게 깔깔거리며 웃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에 비해 큰 웃음이었다.

“어, 음. 조심하시오. 모닝스타는 낯을 많이 가리니까.”

“...낯을 가리는군요.”

호른 경은 멍들 것이 분명한 손등을 주무르며 모닝스타를 보았다. 모닝스타가 진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멀리서 훔쳐보는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의 시선을 의식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호른 경도 출타한 정신을 집어넣고 본래 목적을 꺼냈다. 잊으면 안 될 중요한 보고였다.

“안토니오 시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로벨은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와서?”

“지금이니까 보낸 것 아니겠습니까. 장사치가 원래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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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대표해 찾아온 사람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늑대성에서 1천 3백 마일 떨어진 남부 도시에 아는 사람은 사실 뻔했다.

“사절단장 대행 안토니오 의원이셨군.”

로벨은 자신의 기억력이 쓸만하다는 것에 만족했다. 흑태자 기사들을 몰라본 것은 바닷바람과 수염 탓이 분명했다. 반면, 안토니오 의원은 행복하지 않았다. 늑대 공작을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은 몰랐다.

“일전에는 결례가, 결례가 참 많았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예의 바른 기사라면 겸양해야겠지만, ‘예의’와 ‘기사’가 한 문장에 나오는 일은 콩 심은 곳에 보리가 자라는 일보다 드물었다. 특히 승패가 갈린 전쟁터에서는 말이다.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오.”

로벨이 팔짱이 끼고 말하자 기사들과 용병들이 사납게 웃었다. 안토니오 의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아직 자존심이 남아있는 듯했다.

로벨은 그런 자존심이 싫지 않았지만, 그래도 7,500명의 위장을 책임져야 했다.

“항복이오? 아니면 선전포고요?”

“예, 예? 예? 아니요! 아닙니다! 둘 다 아닙니다!”

로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 위해 볼살을 움직이다 포기했다. 전쟁과 수학의 천재지만, 연기는 못했다. 그냥 무덤덤하게-그래서 무섭게-다시 물었다.

“항복도 아니고, 싸움도 아닌데, 왜 찾아온 것이오?”

‘이 빌어먹을 야만인이! 니네 대가리에는 그거 밖에 없냐!’

표정관리가 안 되는 것은 안토니오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지요. 피를 보지 않고 평화와 금화를 서로 나누면 좋은 일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시오.”

“7만 5천 페닝을 내놓겠습니다. 공격을 멈춰주십시오.”

금전감각이 유난히 떨어지는 극소수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숨을 멈췄다. 늑대성의 한 해 예산이었다. 자유도시가 부유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런 거금을 선뜻 내놓을 줄은 몰랐다.

어린 집사가 눈빛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뭐해요? 일단 받아요! 인어해 도시는 다른 곳도 많잖아요!’ 로벨은 덤덤하게 흥정했다.

“15만 페닝.”

“1, 15만...!”

안토니오 의원과 그 수행원. 그리고 볼탄 반도와 잉그비아 왕국 기사가 모두 입을 벌렸다.

“말도 안 돼! 그 돈을 한 번에 내라고요?”

“물론이오. 우리가 떠나면 입 씻을 게 분명한데 한 번에 받아야지.”

“도시의 금화를 모두 모아도 그만한 금액은 안 나옵니다! 9만, 9만 페닝으로 합시다. 내 전 재산을 털어서 9만 페닝을 맞춰드리겠습니다.”

로벨은 자세를 바꿔서 턱을 괴었다. 무려 3개국의 시선이 로벨의 붉은 입술을 향했다. 승낙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수천 명의 목숨과 수만 페닝의 금화가 작은 입술에 달려있었다.

“역시 안 되겠소.”

“아, 안 된다니... 무엇이...”

“15만 페닝 이하로 협상할 수 없소.”

욕이 나올 뻔했다. 사람 수보다 많은 병장기가 아니었으면 분명 욕했을 것이다. 안토니오 의원은 분노와 실망을 꾹꾹 누르며 다시 협상했다.

“10만 페닝. 10만 페닝을 드리겠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그리하겠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흑태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칼질 한번 안 하고 2만 5천 페닝을 더 뜯었다. 맨주먹으로 공작위에 오른 수완이 저런 거구나 감탄했다. 하지만 잘못 보았다.

“여러 번 말하게 하는군. 15만 페닝 이하는 안 된다고 했소.”

안토니오 의원은 눈을 꽉 감았다.

‘이 자는 협상할 생각이 없다. 그저 분풀이할 생각이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안토니오 시티는 불타고 짓밟혀서 파괴될 것이다. 잠자는 사자를 깨웠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사자를 말이다.

흑태자도 그렇지만, 늙은 의원도 로벨을 잘못 보았다. 로벨은 교활한 협상가도, 잔인한 복수자도 아니었다.

“금화가 모자라면 현물도 괜찮소. 예를 들어, 크레타 항구의 소유권 같은 거 말이오.”

“...뭐라고 했습니까?”

“그쪽 도시가 가진 함선도 좋소. 아무튼 15만 페닝 상당의 재물이면 되오.”

로벨은 보기와 달리, 아니, 외모만 볼 때 보이는 것만큼 평화주의자였다. 진정한 평화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배와 항구를 내놓으란... 뜻입니까?”

“그리고 페닝도. 중요한 거니까 잊지 마시오.”

도시를 불태우면 원한이 늘어나지만, 배와 항구를 뺏으면 싸울 힘을 잃는다. 본토에서 무기와 식량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문을 남길 수 있다면 누가 세금을 걷든 상관하지 않는 교역상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원정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었다. 흑태자 이하 칼잡이들은 협상이 끝난 다음에야 협상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소감은 한마디로 요약되었다.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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