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1화 (361/605)

361화. 기억력

로벨은 어느 남부 용병 가슴에 꽂힌 아론다이트를 회수하여 옆으로 뿌렸다. 공기가 찢어지며 부우웅- 소리가 났다. 핏물이 씻겨나가듯 빠져나갔다. 펄프 대장은 검명(劍鳴)이 신기해서 잠시 보고를 멈췄다.

‘어떻게 하면 칼에서 저런 소리가 나냐?’

처음 만났을 때도 강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예 인간인가 싶었다.

“그중 몇 명이야?”

로벨이 기다리지 않고 질문했다. 펄프 대장은 반쯤 놓친 내용을 끄집어내어 마저 보고했다.

“사지 멀쩡한 포로들로 322명입니다.”

용병의 문제는 몸값이 비싼 것만 아니다.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아군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로벨은 남부 해안까지 이어진 기나긴 추격전 끝에 항복한 자유도시연맹 포로들을 훑어보았다. 깨지고, 부러지고, 잘려나간 용병은 그럴 경황이 없지만, 몸뚱이 건사한 용병은 퍽 느긋했다. 이쯤 했으면 고용주에 대한 의리는 지켰다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해 새 고용주를 모실 자세가 되어 있었다.

“임금을 못 주는데, 신뢰할 수 있어?”

“패전해서 전향한 놈들은 급료를 주지 않는 게 이 바닥 룰입니다. 대신 약탈... 이 아니라 전리품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해 줘야지요. 전쟁이 끝나면 남는 것이 없으니 더 악착같이 싸웁니다.”

“그래? 그럼 전부 고용해.”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밀어 넣고 항복한 용병들을 다시 보았다.

전쟁을 생업 활동으로 삼은 작자들이라 조금 전까지 죽어라 싸운 적을 앞에 두고도 시시덕거렸다. 울프 용병단의 급료와 복지를 듣고 어떻게 하면 입단할 수 있냐고 진지하게 묻는 자도 있었다. 가만히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불과 10분 전에 목이 날아갈 뻔한 사내였다.

“공작! 공작, 대승이오! 대승했소!”

페르젠 백작이 피에 젖은 무기를 수행원에게 던지고 환호했다. ‘내가 아는 로드릭 공작이라면 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 ‘이 영광을 술과 고기로 표현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등등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모두가 기쁜 것은 아니었다. 적을 죽이고 승리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쇠토막이나 보릿자루를 얻으려고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주군,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천박한 상인들을 억류하고, 재산을 압류해야지요?”

기사들은 눈치를 보았다. 로벨이 화친을 제안하거나 종전을 선언하면 낭패였다. 하다못해 볼탄 반도 각 도시에 침투한 자유도시 상인의 재산이라도 털어먹어야 했다.

로벨을 과소평가한 걱정이었다. 고작 상인을 털어먹으려고 322명의 전향자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바다를 건너 적의 본진을 칠 것이오.”

“...인어의 바다를 건너가자는 말씀입니까?”

엄청난 발언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장사치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열변하던 기사조차 말을 잊었다. 로벨은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북해도 건넜는데, 인어해는 못 건널 이유가 있소?”

“그,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까? 자유도시연맹의 해군은 막강합니다. 지상에서야 주군을 당해낼 자가 없지만, 아무래도 바다는 다르잖습니까.”

로벨의 제1추종자 호른 경도 우려를 표시했다. 로벨은 전투 직후에도 활력이 넘치는 기사들을 한 번씩 보았다.

“해군은 걱정할 것 없소.”

“묘책이 있습니까?”

“이해관계가 잘 맞은 벗이 적의 해상전력을 제압할 것이오. 우리는 그저 뱃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오.”

호른 경은 ‘주군도 벗이 있습니까?’ 따위를 물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진실도 때로는 모욕이 될 수 있었다.

“자유도시연맹의 해군을 상대할 전력이라면... 에르나 왕국은 아닐 테고...”

머리가 좋은 기사들은 금방 답을 찾았다.

“흑태자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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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vs 자유도시연맹 전쟁은 하이랜드의 고르곤 공작과 내전으로 천문학적인 빚이 생긴 에드워드 일가에게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로드릭 가문과의 동맹을 빌미로 합법적인 약탈을 자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자유도시연맹도 제3국의 참전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피 냄새에 군침을 삼키는 무리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다만, 이처럼 빨리 끼어들 줄은 몰랐다.

루치오 의원은 피를 흘리기도 전에 살을 탐하는 잉그비아 해적들이 믿기지 않았다. 만약 자유도시연맹이 볼탄 반도에서 승리했으면 인어해 가장 깊은 곳까지 흘러온 잉그비아 해적은 참담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흑태자 에드워드, 이 자가 무슨 생각으로...”

흑태자의 생각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 로벨 로드릭이 게으른 남부 돼지한테 패한다고? 하하핫! 웃기지도 않지!”

“이미 웃으셨는데...”

자유도시연맹의 해군이 프란시스 항구를 봉쇄한 사이,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그비아 왕립 해군이 크레아 시티를 잿더미로 만들고 반짝이는 것을 쓸어 담았다. 자유도시연맹 해군의 최대위기였다.

파도 평야에서 승리한 로벨 로드릭 공작이 볼탄 반도의 모든 거점항을 장악하고, 잉그비아 왕국 해군이 기항지가 점령하니, 자유도시연맹 해군은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되었다.

약탈과 징발로 현지조달이 가능한 육군과 달리 바다 위의 해군은 보급 없이 싸울 수 없었다. 사흘이면 식수가 동나고, 나흘이면 식량이 바닥났다. 자유도시연맹의 제독은 프란시스 시티 봉쇄를 풀고 저 남쪽 페트로쉬 항으로 물러났다.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이끄는 약 4천 명의 대군이 뻥 뚫린 바닷길을 넘어 무방비한 크레아 시티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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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물통 위에 앉아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꼭 끌어안았다. 어린 집사가 공들여 빗겨준 머리는 바닷바람에 산발이 되었고, 값비싼 정향유로 닦은 갑옷은 소금에 절어 끈적끈적했다.

“호른 경, 내 비밀을 알려주겠소. 난 바다가 싫소.”

호른 경은 헛기침으로 웃음을 삼켰다.

“썩 대단한 비밀은 아니군요.”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까칠했다. 자고 일어나면 땀이 흥건한데, 식수를 아끼느라 씻지도 못했다. 고약한 악취가 선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뱃멀미까지 도지니 죽을 맛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옷을 훌훌 벗고 바다에 뛰어들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체통 이전의 문제가 있었다.

“주군, 크레타 항입니다.”

로벨은 축 처진 눈꺼풀을 올렸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뱃전 너머로 굴곡진 땅이 보였다. 땅이 분명했다. 검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하얀 갈매기가 끼룩- 끼룩- 울며 날아다녔다.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드디어 도착했다앗!”

로벨만큼이나 바다를 싫어하는 기사들이 뱃머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안 선장이 소란 피우지 말라고 외쳤으나 듣지 않았다.

“후하아... 이제 좀 쉴 수 있겠어요.”

어린 집사가 활짝 웃었다. 사실 일이야 이안 선장과 선원들이 다 했지만, 육지 사람에게는 배를 타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그러나 육지가 육안으로 보이자 휴식의 기대가 사라졌다. 로벨보다 먼저 온 동맹군은 잉그비아 왕립 해군이라 쓰고 사략 해적이라 읽는 자들이었다. 인어해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크레타 항구를 폐허로 바꾸어 놓았다.

“이... 이... 망할 잉그비아 놈들이...!”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만 보물이 아님을 잘 아는 어린 집사가 분노했다. 유라피아 대륙 남과 북을 잇는 최고의 교역항을 망가트렸다.

“저들은 북해에 거점을 둔 잉그비아 왕국인이니까. 내해 무역에 관심이 없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로벨은 전쟁에서 ‘아무리’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집사의 어깨를 두드리고 이안 선장을 불렀다.

“저쪽에 정박할 수 있어?”

이안 선장은 선원들을 방해하는 기사 소굴에서 빠져나와 꾸겨진 체면과 모자를 고쳐 썼다.

“부두를 장악한 잉그비아 놈들한테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흑태자가 있을 거야. 정중히 요청해.”

수기(手旗)라서 길게 보내기 힘들다는 점을 설명하는 대신 대충 알겠노라 답했다. 잠시 뒤, 두 선단 사이에 복잡한 신호가 오가고, 마침내 두 영웅이 한곳에 모이게 되었다. 역사로 보나 실제로 보나 장관이었다. 6척의 무장 카락과 7척의 무장 갤리어스가 나란히 붙자 부두는 보트 한 척 내릴 곳 없이 가득 찼다.

로벨은 호른 경 외 자랑스러운 볼탄 반도 기사를 거느리고 크레타 항구를 밟았다. 흑태자와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이 연락을 받고 마중 나왔다.

“나의 벗! 어서 오시오! 그대의 요청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 적을 분쇄하고 승리를 쟁취했소!”

“한달음에 약탈하고 방화했겠죠.”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쭉이며 중얼거렸다. 매튜 경이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했다.

로벨은 발뒤꿈치로 어린 집사의 발등을 밟고 두 팔로 흑태자와 포옹했다. 희고 검은 갑옷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볼탄 반도를 도와주어 고맙소.”

“우리 사이에 당연한 일 아니오.”

흑태자는 계절에 안 어울리는 망토를 옆으로 걷으며 함께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로벨은 호의를 받아들여 나란히 폐허 속을 걸었다.

흑태자는 위대한 승리와 푸짐한 전리품에 흥분해서 전투 과정을 떠들었지만 로벨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눈으로 봐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라피아 대륙에는 수많은 도적이 있는데, 그중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도적이 해적이었다. 해적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과 상관없는 먼 곳의 마을을 약탈하기에 자비가 없고, 한정된 공간에 재화를 채우기에 지독하고 꼼꼼했다.

로벨은 3층 옥상에 줄줄이 목 매달린 사내들과 팔다리가 잘린 채 꼬치에 꽂힌 아낙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볼탄 반도의 기사들도 필요하면 약탈을 하지만, 이렇게 무자비하게 굴지는 않았다.

비위가 약한 기사와 나이가 어린 종자가 헛구역질했다. 길가의 해적들이 낄낄거리며 조롱했다.

“공작이 오면 곧장 안토니오 시티로 진격할 계획이라 임시 막사만 설치했소. 이쪽이오.”

며칠 전만 해도 인어의 바다 각지의 상인이 모여 목청껏 흥정했을 시장이 시체와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제대로 된 형상을 유지하는 것은 흑태자가 세운 임시 막사뿐이었다.

흑태자가 돌아오자 여기저기 흩어진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해적 못지않게 한몫 단단히 챙긴 듯 표정이 밝았다.

“로드릭 공작, 오랜만이오. 본인을 기억하시겠소?”

“황금평야 전투 이후 처음 뵙는구려. 잘 오셨소.”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들은 고향 친구처럼 로벨을 맞았다. 로벨은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어물쩍 대응했다. 로벨의 기억력이 나쁜 탓이 아니다. 긴 항해로 수염들이 풍성해져서 구분이 안 갔다. 로벨이 곤경에 처하자 흑태자가 구원했다.

“자자, 그쯤하고 들어갑시다. 공작이 볼탄 반도에서 대승한 이야기를 들어야지 않겠소. 기왕 이리된 거 오늘은 배터지게 마시고 내일 작전을 세웁시다.”

로벨은 흑태자의 체면이 상하지 않게 적당히 호응하며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을 불렀다.

“아군을 성 밖에 주둔시키시오. 이곳은 더 털어갈 것이 없으니 불만도 없겠지만, 혹여나 불평하는 자가 있다면...”

로벨은 잠깐 숨을 골랐다.

“내일 정오에 안토니오 시티를 점령할 거라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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