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60화 (360/605)

360화. 불바다

전쟁을 원하는 것은 호수성만이 아니었다. 저 남쪽 자유도시의 상인 중에도 전쟁과 전쟁이 빚어낼 권력을 탐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전장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 였다.

“전군 정지.”

“전군 정지! 정지하라!”

“모두 멈추라고!”

로벨 로드릭 공작이 이끄는 3,500명의 대군이 파도 평야 초입에 모였다. 끝에서 끝을 보면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굉장한 숫자였다. 그러나 로벨은 침음을 삼켰다. 숫자는 많지만 탐탁지 않았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추고 우람한 전투마에 오른 기사들은 그래도 볼 만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이끌고 온 병사들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잡병이었다. 갑옷 비슷한 것을 입은 자는 열에 하나 찾기 힘들고, 창 비슷한 것만 가져와도 다행이었다.

기사 종자 역할로 따라온 어린 집사가 원인을 밝혔다.

“쳇. 늙고 병든 자들 우선으로 징집했겠죠.”

영지민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로벨도 영주라서 잘 알았다. 그러나 ‘자산가치’가 떨어지는 영지민만 골라 온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방패세를 걷어 용병을 고용할걸...”

“돈 벌려고 찾아온 기사들이 방패세를 낼 리가 있나요.”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파도 평야 남쪽 진영을 살폈다. 자유도시연맹의 군대, 정확히 말하면 자유도시연맹이 막대한 황금으로 고용한 33개의 용병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2,200명이었다.

“병사 수는 우리가 많지만, 정면으로 붙으면 필패야.”

로벨 로드릭 군의 제대로 병사는 울프 용병단 320명과 몇몇 백작이 크게 인심 써서 데려온 프리랜서 150명이 전부였다. 실제 전투 능력이 있는 병력은 기사와 기사 종자를 포함해도 800명 내외였다.

“전력차이가 2배... 아니, 3배니까.”

“2.75배에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래도 기사잖아요? 기마전으로 가면 이길 수 있지 않아요?”

“이런 땅에서?”

파도 평야는 그 이름처럼 굴곡이 심했다. 말 타고 못 달릴 정도는 아니지만, 유연하게 치고 빠지는 기마전을 치르기는 힘들었다.

“기사를 투입하는 것은 한 번뿐이야. 그리고 그 한 번으로 이겨야 하고.”

로벨은 전장을 두루 살피며 전략과 전술을 짜냈다.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기사들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병사들이 웅성웅성 소란을 피울 때쯤 결론을 내렸다.

“구릉성으로 철수하자.”

“주, 주군?”

“공작님!”

기사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파도 평야를 내주겠다는 뜻이었다. 무적무패 기사, 필승의 지휘관 로벨 로드릭 답지 않았다.

페르젠 가문의 젊은 기사가 랜스를 왼손으로 옮기고 항의했다.

“남부 해안을 전부 뺏겼는데, 파도 평야까지 포기한단 말씀입니까? 대체 싸울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튜트 경! 무례하오!”

호른 경이 우렁차게 호통쳤다. 튜트 경이라 불린 페르젠 가문 기사도 찔끔했다. 입 밖에 꺼내놓고 보니 너무 나갔다. 로벨은 그 외 다른 기사들을 보았다. 김이 빠진 듯 무기를 치우고 바이저를 걷어 올렸다.

“여기서 싸우는 것은 좋지 않아.”

“그럼 어디서 싸울 생각입니까?”

“그건 두고 봐야 하오.”

바이저를 올린 것이 실수였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모두가 무례한 것은 아니었다. 호른 경, 켈트 경, 랭스터 경 등은 로벨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동쪽으로 이동한다!”

“동쪽! 동쪽이라고! 니 왼쪽이 동쪽이다!”

기사뿐만 아니라 프리랜서 사이에서도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벨은 구릉 위에 진을 친 자유도시연맹 군대를 돌아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추격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바다를 건너온 부대라 군마가 부족했다.

@

볼탄 반도 전쟁이 시작된 지 스무날이 지났다. 자유도시연맹의 전함이 프란시스 항구를 봉쇄한지는 보름이 지났고, 남부 해안 마을을 차례로 점령한지는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은 파도 평야를 차지하고 북상 중이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이끄는 볼탄 반도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거점을 내주었다. 그것도 싸우지 않고 그냥 주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거면 화가 날지언정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사와 용병들은 로벨 공작이 예전 같지 않다고, 겁쟁이가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참나. 걱정도 많다.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이것보다 어려울 때도 이겼는데. 육! 사! 짝!”

로벨의 추종자 호른 경 등은 의심하지 않았다. 외팔이, 허풍쟁이, 겁쟁이 등은 태평하게 주사위 게임까지 했다. 한편, 신입 추종자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봐, 지금 태평하게 놀 때가 아니지 않나?”

몰트 도너반 남작이 울프 용병단 대화에 끼어들었다. 외팔이가 은화를 쓸어 담으며 되물었다.

“그런데 나으리는 왜 여기 계십니까요?”

“왜? 난 여기 있으면 안 되나?”

몰트 남작이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기사 공포증이 남아 있는 외팔이는 눈을 피하며 ‘안 될 거야 없지만...’ 중얼거렸다.

몰트 남작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구색이라도 맞추려고 병사를 끌고 왔는데, 이제 막 영주가 된 몰트 남작은 수행원 두 명이 전부였다. 군영을 차리지 못해 슬그머니 울프 용병단 숙영지에 묻어갔다.

허풍쟁이가 돈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 신앙심이 부족한 몰트 남작을 위로했다.

“기사 나으리는 우리 기사 나으리가 어떤 분이지 모르시나 봅니다? 혼자서는 끼니도 못 챙겨 드시지만, 싸움 나서 쳐 죽일 때는 백이고 천이고 다 때려잡습니다요. 기사 나으리는 어떨지 몰라도, 저희는 솔직히 저 남부 돼지들이 불쌍합니다요. 뭔 배짱으로 우리 기사 나으리한테 시비를 걸었을 깝쇼?”

“...호칭 좀 구분하는 게 어떤가? 왜 죄다 나으리야?”

몰트 남작은 나무 밑동에 기대어 까칠한 수염을 만졌다. 못 배운 용병들이야 그렇다 처도, 호른 경이나 랭스터 경 같은 무명 높은 기사들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보면 로벨의 군사능력은 진짜였다. 그러나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남쪽 땅을 포기하고 얻는 것이 무엇일까. 그 답은 잠시 뒤 알 수 있었다.

“도너반 나으리! 나으리! 기사 나으리가 부르십니다!”

“아, 좀! 호칭을 구분하라니까!”

@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땀에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묘하게 색기가 있었다. 얼굴선이 가늘고 눈썹이 가냘파 여자라 해도 믿을 법했다. 기사 중 몇몇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간단하오. 아군의 장점을 살리고 적의 약점을 공략하면 되오.”

“...그 논리는 다 통하잖소. 칼싸움도 잘 막고 잘 때리면 이기지. 그래서 장점은 뭐고, 약점은 뭐요?”

거듭되는 후퇴에 불만이 가득찬 페르젠 백작이 톡 쏘았다. 로벨은 괘념치 않았다.

“아군의 장점은 경이오.”

“보, 본인이오?”

페르젠 백작은 기습적인 칭찬에 당황했다. 로벨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 있는 경들이 아군의 장점이자 볼탄 반도의 전력이오. 승리의 열쇠라 할 수 있소.”

철이 덜 든 기사들은 철없이 좋아했지만, 호른 경 등은 전술적으로 해석했다.

“기마전력 말씀이군요.”

로벨은 말이 통하는 기사가 있어 기뻐했다.

“그렇소. 적의 주력은 용병이고, 인어의 바다를 건너느라 군마를 거의 가져오지 않았소. 정찰병이-발가락과 흉내쟁이가 확인한 바 적의 기병은 200기가 되지 않소.”

기사의 천적은 산술이라 숫자가 나오자 바짝 긴장했다. 로벨은 걱정을 덜어주었다.

“반면, 아군은 경들과 경들의 종자를 합쳐 400기 이상이오. 숫자로 2배고, 용맹함을 따지면 10배가 넘소.”

로벨이 계산까지 하자 열렬히 환호했다.

“그야 지당한 말씀입니다!”

“천한 것이 말을 탄다고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

격렬한 삶을 사는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로벨은 원형 테이블에 지도를 펼치고 작전을 설명했다.

“적은 약점은 긴 보급선과 낮은 기동력이오. 파도 평야를 내준 것은 적의 본대를 묶어두기 위함이오.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아침이면 이곳 구릉성에 도착할 것이오. 그러니 오늘이 기회요. 경들은 안장을 가볍게 하여 서쪽으로 우회하시오.”

“오오! 적의 배후를 기습합니까?”

이만큼 설명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기사가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한심한 눈빛이 쏘아졌다. 로벨은 이해력이 남다른 기사를 칭찬하지 않고 마저 설명했다.

“잃은 땅은 잃은 순서대로 되찾는 게 그럴듯하지 않소? 스톤헤드 요새를 지나 남부해안으로 곧장 달리시오.”

기사들은 이제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아하! 적의 보급로를 끓는 것이군요?”

“아니오.”

로벨은 깔끔하게 부정했다. 로벨의 작전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좋아하던 기사들이 꿀 먹었다.

“적이 그리 생각할 것이오. 200기의 기마전력을 모두 남쪽으로 보내 접안시설이 있는 부두를 지키겠지. 그러니 경들은 해안에 도착하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다시 북상하시오.”

자신이 제법 똑똑하다고 믿어온 기사도 혼란을 느꼈다. 로벨은 좀 더 쉽게 설명했다.

“경들이 말발굽을 적시고 올라오면 본인과 본인의 군대가 성 밖으로 나가 적을 칠 것이오. 다시 말하겠소. 이 작전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도, 적의 별동대를 타격하는 것도 아니오. 적의 기병대를 유인한 후 본대를 포위 섬멸하는 작전이오.”

@

인어의 바다 남쪽 최정예 33개 용병단이 하루 만에 전멸했다.

해안가를 점령하고 내륙으로 야금야금 진격하자 승리를 확신했던 자유도시연맹 의원들은 하루아침에 33개 용병단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전쟁하고 인연이 없는 자유도시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보고 들은 것은 있어 수천의 군대가 하루 만에 전멸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알았다.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 공작...”

“허명이 아니었군. 무서운 자야.”

인어의 바다 동남쪽 12개 자유도시와 3개 요새를 대표하는 연맹의회가 들썩였다. 심지어 매파와 비둘기파를 대변하는 두 당파의 신경전까지 이어져 혼잡했다. 책임론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온건파 의원도 있고, 양비론에 입각해 괜한 짓을 벌였다고 질책하고 싶은 중립의원도 있었다. 하지만 대세를 따르는 것은 강경파였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오! 애당초 한 번의 파병으로 끝낼 생각도 없었소! 2차, 3차 용병단을 보내면 악명 높은 늑대 공작이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오!”

‘우리는 버틸 수 있느냐?’는 물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지만, 분위기상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도 애써 자위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전함은 무사하니까...”

국왕과 제후들의 재산이 땅이라면, 자유도시 상인의 재산은 함선이었다. 전쟁은 철저히 지상에서 벌어졌기에 의원과 의원의 후원자들이 가진 배는 모두 무사했다. 조금 전까지 말이다.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 났어요!”

그때, 의회 관리인이 고상한 몸짓으로 회장에 난입했다. 체면과 격식을 중시하는 일부 의원이 대노했다. 그러나 관리인은 간이 빠져서 고용주의 호통을 산뜻이 무시했다.

“보, 볼탄 반도의 군대가 크레아 시티 항구에 나타났습니다!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야만인들이 어찌!”

고상한 의원들이 체통 없이 벌떡! 일어났다. 크레아 시티에 기반을 둔 의원은 얼굴의 핏기가 사라졌다.

“규모가!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중형 카락이 6척? 아니 7척인가? 아, 아무튼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수비대도 모두 도망쳐서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크레아 시티 의원이 기어이 뒤로 넘어갔다. 행동력이 좋은 의원은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걷어 올리고 뛰쳐나갔다. 그쪽 도시에 주요 상권을 가진 모양이다. 비교적 침착한 의원은 상황을 분석했다. 정보가 부족하지만 단서는 있었다.

“카락이라고? 그건 외해에서 쓰는 범선이 아닌가? 볼탄 반도 공작은 범선이 없어. 만약 있다고 해도 북해에 있을 텐데...”

외해와 북해가 거론되자 연관된 단어들이 떠올랐다.

지금 바다를 주름잡는 해상강국은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정통의 강호 에르나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근래에 외해 개척으로 이름을 높이는...

“잉그비아 왕국! 저놈들이 잉그비아 왕국과 손을 잡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