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59화 (359/605)

359화. 선포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인질 교환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로벨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로벨이 붙잡은 인질은 자유도시연맹의 명망 높은 시의원과 대상인의 식솔인데, 저쪽이 붙잡은 인질은 이제 갓 성인이 된 철부지 기사와 볼탄 반도 기준으로 하찮은 자유민 상인이었다.

물론, 로벨은 켈트 가문의 장자와 로드릭 상회 총책임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도시연맹이 오해하는 것을 정정해주지도 않았다.

본디 아쉬운 쪽이 굽히는 법이라 자유도시연맹에서 조나 켈트 경과 헨리 피터 상회장을 태운 푸른고래 호를 보내왔다. 로벨은 로드릭 항의 관리자인 호른 경과 켈트 가문의 주인 켈트 남작을 대동하고 완전무장한 채 항구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지 않았어?”

하루 앞서 온 쾌속정 황새치 호의 보고가 맞다면 지금쯤 도착해야 한다. 로벨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컨틀렛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그러나 진짜 초조한 것은 배가 안 오면 교수형과 참수형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사절단과 아들의 생사가 걸린 켈트 남작이었다.

“저기! 저기 옵니다! 저기 옵니다요!”

허풍쟁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돛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공작도, 남작도, 사절단도, 모두가 안도했다.

“푸른고래 호와... 자유도시연맹의 전함이군요.”

푸른고래 호 뒤로 두 척의 전함이 따라왔다. 3개의 돛대에 3단 돛을 활짝 펼치고 60개가 넘는 노를 젓는 자유도시연맹의 전함이었다. 예전에 프란시스 항구에서 본 오베리아 갤리선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크기였다.

“그렇지. 맨몸으로 올 리 없지.”

“우리 쪽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로벨 역시 맨몸으로 나오진 않았다. 울프 용병단 320명을 해안에 집결시키고, 팔코넷 20문을 수레에 실어 배치했다. 갤리선이 아무리 커봐야 탑재할 수 있는 함포 수는 10문이 넘지 못하니 화력은 울프 용병단이 유리했다.

자유도시연맹의 함장도 전력 차이를 인정한 모양이다. 돛을 접고 노를 내려 속도를 급격히 줄였다. 덩치가 큰 만큼 선회력이 떨어져 만(灣)에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인질을 데려갈 보트를 따로 보낼 것이다.

반면, 선주님의 든든한 포진을 본 푸른고래 호는 거칠 것 없이 항구로 달려왔다. 자유도시연맹 기함에서 당황하여 정지신호를 보낼 정도였다. 해적질로 젊은 날을 보낸 이안 선장을 우습게 본 조치였다. 이안 선장은 생식기와 관련된 비속어로 즉답하고 냉큼 로드릭 항에 들어왔다. 어째 유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부두에 발판을 내린 후에는 웃을 수 없었다. 주인이 맡긴 임무를 실패하고 인질로 돌아온 죄인이었다.

켈트 경은 헨리 피터 상회장 뒤에서 쭈뼛거리는 아들을 보았다. 사지가 멀쩡하여 안도하는 듯하더니, 돌연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못난 놈...”

조나 켈트 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군께 누를 끼치지 말라고 그리 말했거늘, 대체 네가 한 것이 무엇이냐?”

“죄,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 못난 놈 같으니...”

그래도 장남이라 손찌검은 하지 않았다. 혹은 보는 눈이 많아 참는 듯했다.

로벨은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대신 자기 식솔부터 챙겼다. 긴 항해 탓인지, 아니면 마음고생 탓인지 부쩍 해쓱해진 헨리 피터 상회장을 다독였다.

“고생 많았어. 뒷일은 내게 맡기고 집에 가서 쉬어.”

“...영주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길게 이야기하고자 하면 하루밤을 꼬박 지새울 수 있지만, 시간과 장소가 따라주지 않았다. 자유도시연맹의 전함에서 작은 보트를 보내왔다. 어디까지 상대적 의미로 ‘작은’이지, 로드릭 항에 정박한 어선만 했다. 인질과 인질의 몸종을 태우기 충분했다.

‘그래도 대화는 해야지.’

보트가 부두에 닿고, 남쪽 나라 특징이 강한 용병이 줄줄이 내렸다. 로벨은 습관적으로 숫자와 무장을 확인했다. ‘열다섯 명... 대단치 않아.’ 저 정도 무리는 로벨 혼자 상대할 수 있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십니까.”

용병 사이로 책임자가 걸어 나왔다. 조반니 상원의원과 비슷한 복색인데, 정수리에 올린 터번이 한층 크고 두층 높았다. 마녀 키르케가 밥 먹을 때 불편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아마도 위세를 부리기 위해 고쳐 쓰고 나왔을 것이다.

“저는 루치오 마테 의원입니다.”

로벨은 모닝스타 위에서 고개를 까딱였다. 위세로 따지면 터번 따위보다 전신 갑주가 효과적이었다.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루치오 의원과 남부 용병들은 내심 질렸다.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

로벨도 싸울 생각은 없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거듭되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고려하지 않았다.

“펄프 대장.”

로벨이 신호하자 펄프 대장이 사절단을 가로막은 창칼을 치웠다. 사절단은 작고한 모친이 살아 돌아온 것마냥 울먹이며 루치오 의원을 향해 뛰어갔다. 어린 집사가 못마땅해서 입맛을 다졌다.

“거, 잘 먹이고 잘 재워줬는데, 누가 보면 강제노역이라도 시킨 줄 알겠네.”

아무튼, 흉흉한 분위기에서 인질 교환이 끝났다.

로벨은 사절단과 하인이 보트에 오르는 동안 준비한 것을 꺼내놓았다.

“조반니 상원의원의 관이오. 그쪽 풍습을 몰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담았소. 서늘한 곳에 안치했으나 날씨가 좋아 좀 부패했소.”

루치오 의원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굶주린 포식동물을 경계하는 표정에서 배부른 포식동물을 경계하는 표정 정도지만.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본인은 자유도시연맹과 싸울 생각이 없소. 인질... 아니, 사절단 사람들도 최선을 다해 보살폈으니 내 진심을 알아주시오. 본국에 돌아가 잘 이야기해주시오.”

창칼로 무장한 탓에 설득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표정과 말투는 진지했다.

루치오 의원은 소문과 달리 어리고 곱상한 늑대 공작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기사들과 용병들이 아니면 늑대 공작 본인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지.’

루치오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의 뜻을 의회에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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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늑대성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컨틀렛을 벗어 던지고 흉갑을 차례로 풀었다. 삼십 평생 갑옷을 불편하게 여긴 적이 없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슴이 갑갑했다.

“그래도 이쯤 했으면 알아듣지 않았을까?”

어린 집사가 비누로 빡빡 문지르고 인두로 꼼꼼히 다림질한 우플랑드를 꺼내주었다. 갑옷 안에 받쳐 입는 더블릿도 충분히 두껍지만, 물오른 몸매를 감출 정도는 아니었다. 맨살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아는 유라피아 대륙이라 다행이었다.

“제가 자유도시 상인을 많이 만나보진 않았지만, 의심 많고 치졸하기는 유라피아 대륙 제일이에요. 에르나 왕국의 족제비 같은 상인들도 한 수 접어준다니까요.”

“그럼 잘 됐지. 그런 인간들은 앞에 나서는 일을 못해. 내가 잘 타일렀으니까 싸울 생각 못할 거야.”

로벨이 연륜 넘치는 공작처럼 말했다. 어린 집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의심했다.

“조반니 의원을 쏜 사람이 누군지 모르잖아요.”

“사절단 중 한 사람이야.”

“어떻게 확신해요?”

“직감.”

어린 집사는 관두자고 손사래 쳤다. 로벨 앞에서 벌어진 암살사건이다. 반드시 범인을 찾아야 했다. 애꾸눈이 현장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를 좁히고 있으니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급박하고 시간은 부족했다. 자유도시연맹 사절이 돌아간 지 3일째 되는 날, 볼탄 반도 남쪽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자, 자유도시연맹의 전함이 공격받았습니다!”

로벨은 칼집에 칼을 넣다 손가락을 벨 뻔했다.

“누가? 왜? 아니, 그 큰 전함을 어떻게?”

로드릭 상회 소속의 정보원은 귀하신 공작님의 질문에 버벅거렸다. 다행히 진짜 정보원은 따로 있었다.

“프란시스 항구에서 중무장한 기사들이 기습했습니다. 마침 물자보급 중이던 선원과 용병은 저항조차 못하고 도륙 당했지요. 기함 세바스티아 호는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그 호위함은 불에 타 가라앉았습니다.”

“응? 마틴 지부장?”

로드릭 상회 프란시스 시티 지부장 마틴 루드였다.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었다. 마틴 지부장은 모자를 벗어 정중히 인사했다. 그제야 낯선 이유를 깨달았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아니면 그냥 조상님 탓인지 정수리가 휑했다.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까지 측은하게 바라보자 마틴 지부장은 헛기침하고 모자를 고쳐 썼다. 본디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지만, 머리가 벗겨진 사람은 예외로 두었다. 로벨은 각막에 남은 민둥산을 지우고 앞 내용에 집중했다.

“기사들이 정박 중인 외국 전함을 공격해? 왜?”

“볼탄 반도의 주인이신 로벨 로드릭 공작님을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뭔 망아지도 웃을 소리를... 지들이 언제부터 영주님을 그리 따랐다고요!”

어린 집사가 분기탱천했다. 기사들의 의도가 너무 뻔했다.

“더 나가면 로드릭 공작님의 암살혐의까지 씌울 수 있습니다. 늑대성에서 암살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니까요.”

로벨은 기름칠하던 흐룬팅을 치웠다. 이곳에는 죄지은 사람이 없으니 칼을 쥐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누구야?”

어린 집사가 인정할 만큼 유능한 지부장이었다. 질문은 한 마디로 충분했다.

“호수성의 기사들이 주도했으나, 프란시스 가문을 포함한 대다수 남부 기사들이 동참했습니다. 책임을 묻기는 곤란할 겁니다. 그들은 충성심이라 주장할 테니까요.”

펄프 대장이 한 말이 머릿속에 계속 감돌았다. 전쟁은 어느 한쪽만 결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 결심을 로벨도, 자유도시연맹도 아닌 호수성과 비루한 기사들이 하여 불쾌했다.

“그 기함 세바... 무슨 호는?”

“기함 세바스티아 호는 무사히 항구를 벗어났습니다.”

“아무 피해도 없이?”

로벨이 거듭 확인하자 마틴 지부장이 이채를 띄었다.

“예. 선원 한 명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군.”

로벨은 멀찍이 둔 흐룬팅을 다시 가까이 당겼다.

“어린 집사, 소집령을 내려.”

“소, 소집령이요?”

어린 집사가 평소답지 않게 반문했다. 로벨은 폼멜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야,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전에 해명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디까지 사고잖아요?”

“한 번이면 사고지만 두 번이면 아니야. 나라도 믿지 않아. 그리고 믿고 싶지도 않을 테고.”

“왜요?”

로벨은 어린 집사를 돌아보았다. 로벨보고 맨날 순진하다고 놀리는데, 누가 더 순진한지 모르겠다.

“호수성의 기사들이 어떻게 자유도시연맹 사절단의 호위함을 알고 공격했을까?”

“그건 뭐, 그런 큰 배가 흔하지 않으니까요?”

“거긴 프란시스 항이야. 여러 나라의 배가 있는데 꼭 집어 공격하는 게 가능해? 게다가 교역도 아니고 보급이면 하루 밖에 정박하지 않을 텐데, 선원과 용병을 제압할 병력이 그렇게 빨리 모일 수 있을까?”

어린 집사는 마틴 지부장보다 똑똑했다. 정치와 군사도 관심이 없어서 신경 쓰지 않을 뿐,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보다 날카로웠다. 로벨의 의심을 곰곰이 생각한 후 결론지었다.

“한통속이었군요.”

정답은 며칠 뒤에 나왔다. 자유도시연맹이 전쟁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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