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57화 (357/605)

357화. 간섭

자유도시연맹과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로벨이 막 볼탄 반도 공작이 되었을 때 자유도시연맹의 축하사절을 맞이한 적 있었다. 워낙 많은 곳에서 사신이 찾아와 길게 대화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안면 정도는 익혀두었다.

“에휴. 사정이 달라요. 그때는 장미성이었는데 지금은 늑대성이잖아요.”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로벨이 발끈해서 따져 물었다.

“그게 뭐? 어때서?”

“저도 이런 말 하긴 싫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성이 작고 투박하잖아요.”

“...치.”

어린 집사의 고충도 이해는 되었다. 사절단의 진짜 목적은 늑대성의 군사동향 감시지만, 표면적으로는 볼탄 반도와 자유도시연맹의 문화교류였다.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만큼 외적인 것도 꼼꼼히 신경 써야 했다.

“그리고 로드릭 상회의 기회이기도 해요. 리암 수사표 맥주와 뉴-로드릭 마을 벌꿀을 홍보해야죠.”

“응? 꿀은 없잖아?”

“조만간 생기잖아요. 미리 홍보해두는 거죠. 이런 국가적 행사가 어디 흔한가요?”

“...사기 아니야?”

아무튼,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했다.

어린 집사에게 전부 맡길 수 없어서 로벨도 발 벗고 나섰다. 그 결과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학자, 악사, 시인, 광대 등을 상대해야 했다.

볼탄 반도의 우수한 학문과 예술을 보여주기 위한-솔직히 말하면 조금이라도 덜 망신당하기 위한-인재들인데, 문제는 로벨의 학식과 심미안이 아주 짧다는 것이다.

“옛날 생각나네.”

로벨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모시고 에르나 왕국 사절단을 맞이한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각종 행사가 있었다. 로벨은 그랜드 챔피언 자격으로 검술시합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잘 모실걸...”

에릭 공작이 들으면 약 올리느냐고 길길이 날뛸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로벨이 근심걱정에 앓는 소리를 내자 지혜로운 펄프 대장이 위로했다.

“술과 음식 이외에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시지요. 조금 엉성해도 괜찮습니다.”

“어린 집사가 얕보이면 안 된다는데?”

“시 낭송이나 별자리의 이름으로 얕보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크흠. 저들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로벨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펄프 대장은 두리뭉실하게 설명하다가 포기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 소위 늑대 공작이라 불리는 사람이 대외적으로 어떤 이미지인지 말하기 힘들었다.

소문은 1마일을 지날 때마다 2배로 몸을 부풀리니, 언어해 건너 자유도시연맹에 어찌 소문이 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로벨이 10피트 거인이라 황소를 머리부터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고 해도 ‘과연 그렇군!’ 할 것이다.

“흠...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해야지.”

로벨은 지근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다시 ‘제가 볼탄 반도 제일의...’이라는 사람들을 불렀다. 밀알 한 톨만치도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에 허우적거렸지만,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광대는 뽑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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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 마침내 자유도시연맹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예정보다 하루 빨랐지만, 바닷길은 본디 종잡을 수 없는지라 예상 범위였다.

로벨은 꽃단장한 모닝스타를 타고 도시 밖으로 나가 사절단을 맞이했다. 하늘은 깨끗하고, 햇살은 따뜻하며, 바람은 시원했다. 완연한 봄 날씨였다.

지난밤에 비가 내렸지만 어린 집사의 표정은 밝았다. 로드릭 항에서 노스폴드 시티로 이어지는 ‘늑대 도로’는 자갈을 깔아 만든 포장 도로였다. 자유도시의 상인은 궂은비에도 진창이 되지 않는 가도에 내심 감탄했을 것이다.

어린 집사의 기대대로 사절단의 표정이 밝았다.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십니까?”

로벨은 모닝스타의 찰랑이는 갈기를 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포비아 왕국의 샤프론과 달리 작고 둥글둥글한 터번을 쓴 중년 남자였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가볍게 때려 앞으로 나섰다.

“볼탄 반도 공작 겸 포클랜드 후작 로벨 로드릭이오.”

“자유도시연맹 상원의회 소속 조반니 루소입니다. 작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로벨은 상원(Senate)이 뭔지 몰랐지만, 눈치껏 외교관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혹시 기사 비슷한 건가 싶어 어린 집사를 힐끔 보았는데,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는 거 봐서 기사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굳이 말에서 내릴 필요 없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성으로 안내하겠소.”

과묵한 몬트가 ‘조랑말’을 끌고 앞으로 나왔다. 조반니 의원은 고마움을 표시하고 조랑말에 올랐다. 사실 배에 싣고 온 승용마가 있지만, 땅 주인이 권하는 말을 타는 게 볼탄 반도 예절이라 오해하여 거절하지 못했다. 뭐, 그런 예법은 없다고 말해줘도 성의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이 내 고향이오. 조상 대대로 300년 동안 통치해온 땅이지.”

로벨은 늑대성을 자랑스럽게 소개했지만, 조반니 의원과 자유도시 사절단은 늑대성의 아담한, 솔직하게 말하면 왜소한 외형에 살짝 실망했다. 성이나 도시나 프란시스 가문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부족한 가문의 위용을 인간으로 채워 넣었다.

“저 병사들은...”

“내 부하들이오.”

체인 메일, 스케일 메일, 러멜러(Lamellar) 등으로 중무장한 울프 용병단이 언덕길 좌우에 도열해 있었다. 로벨과 사절단장이 지나가면 번뜩이는 창을 세워 경의를 표시했다. 실전의 흔적이 가득한 병장기와 구령이 없어도 일사불란한 동작은 평화로운 자유도시출신 상인을 기죽이기 충분했다. 로벨은 주눅 든 사절단을 보며 어린 집사 말을 듣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배치하는데 반대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야하는데, 울프 용병단을 배치하면 오히려 의심하지 않을까?’

‘생각이 없는 것과 능력이 없는 것은 별개예요.’

예절이란 것은 나라마다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잘 먹이는 것’은 동일했다.

사절의 의도가 불순하다 해도, 풍족한 음식과 향기로운 술은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기 충분했다.

버팅거 시티 출신 광대가 재미난 마술을 선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에게 내가 고른 광대라고 자랑했다. 펄프 대장이 미리 준비한 금화를 던져주며 치하했다.

이어서 사트로 시티 출신 악사가 연주를 시작했는데, 끈적끈적한 발라드였다. 애써 띄운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펄프 대장은 미리 준비한 흉내쟁이와 싸움개를 투입해 성 밖으로 쫓아냈다. 이래저래 준비한 것이 많긴 했다.

적당히 배가 차고,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자 웃고 떠드는 것 이상의 지적 활동이 시작됐다. 양국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작금의 경제는 장원에서 자급자족하며 잉여작물을 판매하는 단계를 벗어났소. 거시적인 흐름에 따라 효율적인 작물을 재배해야 마땅하오.”

“장원은 경제의 최소 단위이자 생존의 필수 요소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충족시키는 사회의 기본 바탕이오. 장원이 붕괴되면 수십만의 농민이 어디서 무엇을 한다 말이오?”

자유도시연맹의 학자와 볼탄 반도의 학자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분야가 매우 방대했는데, 아무래도 상인 출신이 많다 보니 지리와 기후, 그리고 경제가 주를 이루었다.

“추운 지방에서 자란 양이 질적으로 우수한 것은 당연하오. 잉그비아 왕국에서 모직물 사업이 번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요.”

“북쪽이 춥고 남쪽이 덥다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요. 가장 더운 곳을 지나면 다시 추워지지. 잉그비아 왕국이 언제까지 양모 사업을 독점할 순 없을 거요.”

어린 집사는 ‘들었죠? 들었죠?’하는 얼굴로 로벨과 펄프 대장을 쳐다보았다. 지구가 둥글다는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 그러나 쓸데없는 관심이었다. 기사와 용병은 졸음을 참는 것도 버거웠다.

로벨은 이해하기 힘들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경제학과 지리학에 귀를 닫고 조반니 의원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사절단의 목적은 뻔했기에 길게 끌 이유가 없었다.

“그대도 그렇겠지만, 나는 내가 나고 자란 내 고향을 사랑하오.”

로벨답지 않게, 기사답지 않게 무난한 서두였다.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조반니 의원은 소문 무성한 늑대의 군주가 무엇을 말할지 몰라 바짝 긴장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고향을 아끼고 그리워하지요.”

로벨은 술잔을 비운 후 멀찍이 두었다. 진지하게 대화할 시간이었다.

“저 남쪽의 형제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듯한데, 나와 내 부하들은 거친 바다를 좋아하지 않소.”

조반니 의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조나 켈트라는 애송이 기사가 술에 취해 떠든 말이 있었다. 자유도시연맹에게 퍽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허나, 공작님께서는 북해를 건너 잉그비아 왕국을 정벌하지 않았습니까?”

“정벌이라...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 자리에 없어 다행이군.”

서늘한 말이었다. 조반니 의원은 흠칫해서 술잔을 들었다. 로드릭 시티 대장장이가 특별 제작한 대형 조끼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기 좋았다.

“그 일은 어디까지 흑태자의 벗으로서 에드워드 3세 일가를 도운 것이오. 보시오. 볼탄 반도가 잉그비아 왕국 내정에 티끌만큼이라도 간섭하고 있소?”

북해 무역건으로 열심히 간섭하고 있지만, 그 부분은 거론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지금까지 말씀은, 저희 자유도시연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시겠다는...”

“그야 물론이오. 피를 흘려 금화로 메꾸는 것보다 술과 기름에 금화를 담는 것이 보기 좋지 않소?”

어린 집사가 사전에 일러준 말로, 자유도시연맹 상인들의 오랜 농담이었다. 좋게 말하면 평화적인 해결이 좋다는 뜻이고, 까놓고 말하면 용병을 사는 것보다 적장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 싸다는 뜻이었다.

‘거래를 터주면 전쟁은 없다는 말인가. 크응... 소문과 달리 영리하고 계산적이군. 하긴, 그러니 10년 만에 볼탄 반도를 장악했겠지.’

정작 로벨은 ‘자유도시의 술은 금화를 넣으면 맛있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착각은 언제나 자유였다.

“공작님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만,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벨은 의회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이해했다. 그래서 더 이상 닦달하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상원의원도 즐기시오. 자유도시의 상인들은 수다를 좋아하지 않소.”

“...그것은 단언컨대 오해지만, 볼탄 반도의 용맹한 기사들이 보기에 그럴 수 있겠지요.”

로벨의 가죽은 두꺼워서 빈약한 가시에 상처받지 않았다. 조반니 의원도 무리하게 말싸움하지 않았다. 사절단의 환영 연회는 나흘간 이어질 테니, 우정을 가장하고 진실을 탐닉하기 충분했다. 정말 나흘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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