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56화 (356/605)

356화. 지구

켈트 가문의 장자 조나 켈트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기사 로벨 로드릭 공작을 부름을 받고 뛸 듯이, 아니, 날듯이 기뻐했다.

기사 종자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패배자, 낙오자, 겁쟁이 취급을 받아온 기사 가문 후계자에게 무적무패 기사의 부름은 옛 신의 면죄부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각 지방의 기사와 기사 종자들은 다음 같이 생각했다.

“오래도록 충성한 켈트 남작의 명예를 생각해서 기회를 주는 거지.”

“자기 사람은 철저히 챙기는 것이 로드릭 공작의 좋은 점이야.”

심지어 부친인 켈트 남작조차도 그리 생각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대한 임무를 맡겨준 로벨의 보살핌에 감격해 작은 성의를 보내왔다.

“웬 사슴 가죽이에요? 비싸 보이는데요?”

“나도 몰라. 켈트 남작이 보냈는데?”

“그 양반이 무슨 일이지? 아! 아들내미 잘 부탁한다는 뇌물인가?”

“그럼 헨리 피터 상회장한테 보내야지. 왜 나한테 보냈을까?”

역사에 길이 전해질 위대한 기사와 집사지만, 정치와 사람은 잘 몰랐다. 꽁으로 생긴 재물에 생각 없이 좋아했다.

자유도시연맹의 일이 중요하다 하나 거기에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눈 녹은 진창에 망가진 도로를 고치고, 보리를 심을 춘경지를 살피고, 국왕에게 새해 선물과 밀린 세금을 보내고, 봉신들의 신년 인사를 받고, 식량이 떨어진 가난한 빈민과 농민을 살피다 보면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참, 에르나 왕국의 모험가가 외해를 건너 서쪽 끝에서 새로운 땅을 찾았대요.”

“새로운 땅이라고?”

로벨은 보리빵을 크게 찢어 스프에 담갔다.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해결해야 하니, 아침이 되면 늑대성 식구가 모두 모여 그날 업무와 함께 먹을 것을 나눠갔다.

“외해를 건너면 지금껏 아무도 가지 못한 세 번째 대륙이 있데요. 땅이 기름져서 씨를 뿌리면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황금이 돌보다 흔해서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고 해요.”

어린 집사가 두 손을 모으고 꿈꾸듯이 말했다. 기름진 땅과 반짝이는 돌을 사랑하는 늑대성 집사에게 세 번째 대륙-Third Continent은 지상낙원이었다. 그러자 현실적인 듯 현실적이지 않은 용병들이 껄껄 웃었다.

“에이, 거짓말 마쇼. 외해로 나가면 낭떠러지가 있어서 세상 밖으로 곤두박질치잖소.”

“내 고향의 수도사 영감이 말하길, 그 절벽 아래에는 거대한 문어 괴물이 있어서 배를 통째로 삼킨다 하오.”

로벨은 푸른고래 호보다 큰 문어를 떠올리기 위해 끙- 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문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실패했다. 어린 집사가 황당무계한 듯 따져 물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믿어요?”

“그런 거라니?”

“세상의 끝이라니, 낭떠러지라니, 문어 괴물이라니...”

어린 집사가 혐오스럽게 쳐다보자 펄프 대장 이하 ‘상식인’이 일제히 반발했다.

“어허! 믿고 자시고가 아니라 사실 아니오!”

“바닷가 출신은 다 아는 이야기요.”

“내 아는 사람 중에도 세상 끝을 보고 온 사람이 있지.”

어린 집사는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혹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나요?”

“잉? 뭔 말 같지 않은 소리요? 땅은 당연히 평평하지!”

어린 집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구(Earth)가 지구(地球)라는 사실이 증명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미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로벨이 무지함에 고통받는 어린 집사와 흥분한 용병들을 중재했다.

“서드 컨티넨트는 낭떠러지에 닿기 전에 나오나 보지.”

“오오! 그렇군요!”

“역시 기사 나리야! 현명하셔!”

“에헴. 에헴.”

어린 집사의 표정이 한층 괴로워졌다. 허무맹랑한 기사 소설 좀 그만 보고 전문서적을 읽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로벨은 수준이 비슷한 용병들의 찬양을 한껏 즐긴 후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바다 건너는 왜?”

어린 집사도 왜 서드 컨티넨트 이야기를 꺼냈는지 헷갈렸다.

“그냥 생각난 김에 말해봤어요. 아, 맞다. 거기서 가져온 작물 중에 ‘감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른 봄에도 잘 자라고 거친 밭에 심어도 되어서 일 년 내내 배불리 먹을 수 있대요.”

용병들이 또다시 ‘와하핫!’ 웃었다.

“세상에 그런 작물이 어디 있소?”

“그런 것이 있으면 악마의 농간이지!”

“먹으면 머리에 뿔이 나고 엉덩이에 꼬리가 생길걸?”

어린 집사는 숟가락을 놓았다. 애꾸눈과 허풍쟁이가 야유하는 것은 어찌어찌 참아도, 외팔이가 조롱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똑똑한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무식한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더니,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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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영지에는 감자 같은 악마의 작물이 없기에 예년처럼 보리와 귀리를 파종했다.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지만, 농사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겨울이 지나도 땅은 쉬이 녹지 않아 괭이가 박히지 않았다. 쟁기와 농마를 빌려 어찌어찌 땅을 뒤집어도 흙을 고를 일손이 부족했다. 도시가 커지고 시장이 발달하자 젊은 사람이 너도나도 시내에서 일을 시작한 탓이다.

사실 이해는 되었다. 일 년에 두 번 소출 내는, 그것도 잘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농사일보다 오늘 당장 은화를 쥘 수 있는 도시일이 매력적이고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영주 입장에서 농지를 버려둘 수 없었다. 로벨은 로드릭 시티 외성 공사 이후 한 번도 강제하지 않은 노역을 지시했다.

“나, 나는 호츠만 씨 상단을 돕기로 했는데...”

“아이고, 오늘 일당은 날렸구나!”

성 밖으로 끌려 나온 청년들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남의 땅도 아니고 영주님과 자기 가족 땅 농사지으라는데 반항할 만큼 막나가진 않았다. 세상이 좋아져서 자유민처럼 지내지만, 본디 늑대성에 예속된 영지민이었다. 영주를 위해 7일 중 3일은 노역하는 것이 당연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헤츨링인 줄 안다니까! 이참에 법대로 해볼까요? 늑대성 안살림도 하고, 미사도 의무참석하고...”

사실 그 법도 로벨이 정하는 거라 매우 편파적이었다.

어린 집사가 혀로 채찍질하자 영지민은 흘러나온 불만을 주워 담고 농기구를 챙겼다. 그렇게 봄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땅을 뒤집고, 씨를 뿌리고, 발 맞춰 이삭을 밟으며 노래를 불렀다. 가까이 가면 구시렁구시렁 불만불평이 많지만, 멀리서 보면 봄처럼 포근한 광경이었다. 시골 장원에서 봄 농사는 의미가 깊었다.

“이렇게 한 해가 시작되었구나.”

볼탄 반도를 다스리는 공작이 되었어도 시골 영주의 감성을 버리지 못한 로벨은 늑대성 보루에 올라 봄노래를 들으며 뿌듯해 했다. 어린 집사가 실망할까봐 말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광산이니 무역이니 양봉업이니 하는 것보다 농사가 좋았다.

“컹!”

“컹컹!”

그런 로벨이 외로워 보여서일까, 네 발로 계단을 밟는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늑대 남매가 올라왔다. 로벨은 늙은 두 친구를 반겼다.

“너희도 노래 들으려고 왔니? 이리 와. 같이 보자.”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양쪽 옆구리에 앉혔다. 그러나 늑대성의 마스코트는 로벨이 심심할까봐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잠시 뒤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릉...”

아야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한창때에 비하면 탁하고 무디지만, 그래도 야성미가 가득한 아름다운 이빨이 드러났다.

“...같은 주인을 모시는데 이제 좀 알아봐라.”

로벨은 두 번째 방문객 목소리에 미소 지었다. 아야와 이야카만큼 반가운 사람이었다.

“어서 오시오, 호른 경.”

자작나무 숲의 주인이자 호른 성과 로드릭 항의 관리자 패트릭 호른 경이 정중히 목례했다.

교양 있는 군주와 기사라면 서로의 건강과 유행하는 갑옷 등을 정답게 이야기할 텐데,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온 터라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었다. 호른 경은 헛기침하고 곧장 방문 목적을 밝혔다.

“남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늑대성은 볼탄 반도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남쪽이라 하면 대단히 포괄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슈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왔다.

“...자유도시연맹에서?”

“청새치 호가 돌아왔습니다.”

로벨은 아야의 콧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기함 푸른 고래 호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아직 협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리 주시오.”

호른 경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편지를 꺼냈다. 외국에서의 체면 때문이지, 아니면 항해 중에 유실될까 걱정해서인지 고급 양피지에 몇 자 안 되는 내용을 담았다. 사실 양피지는 마지(麻紙)에 비해 40배나 비싸서 실용제일주의 늑대성에서는 쓰지 않았다.

“헨리 피터 상회장의 편지군. 으음... 그런가?”

사절단의 대표는 켈트 가문의 장자 조나 켈트지만, 실질적인 외교업무는 헨리 피터와 페리 피터 부자가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임무는 간단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은 자유의 도시를 적대할 생각이 없으며, 전쟁보다 평화적인 교역을 희망한다고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로드릭 상회 지부를 설치해 자유도시와 교역로도 확보하고자 했다.

“피터 상회장이 무어라 합니까?”

호른 경이 늑대와 눈싸움하며 물었다. 편지를 가져온 대리인을 통해 대충 전해 들었지만, 로벨의 관심을 사기 위해 모른 척 내용을 물었다.

“나를 믿지 못한다고 하오.”

“흠. 무례하군요.”

“그들은 기사가 아니라 상인이오. 명예를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오.”

로벨도 어쩔 수 없는 기사라 재화를 탐하는 부르주아 계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닝의 힘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자유도시연맹의 사절을 받아야겠소.”

“그들의 요구입니까?”

호른 경이 워 해머 머리를 꽉 쥐고 물었다. 주군의 진의를 의심하는 것도 불쾌한데, 사람을 보내 감시까지 하면 충신 호른 경 입장에서 화날 만했다.

아야와 이야카가 살의에 반응해 으르렁거렸다. 로벨은 두 발 늑대와 네 발 늑대를 살살 간질이며 진정시켰다.

“헨리 상회장의 제안이오. 그리고 본인 생각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소.”

로벨이 그리 말하니 화낸 것이 머쓱해졌다. 호른 경은 슬그머니 워 해머를 놓고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이야카에게 저리 가라 손짓했다.

“선장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아니, 잠깐. 아무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소. 어린 집사를 통해 편지를 보낼 테니 성안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호른 경은 절도 있게 가슴을 두드리고 물러났다. 아야와 이야카는 경쟁자가 사라지자 평소의 헤픈 얼굴이 되어 재롱을 피웠다. 짐승 나이로 적은 나이가 아닌데 어미 앞에서는 여전히 어리광쟁이였다.

로벨은 파종이 끝나가는 보리밭을 훑어보고 좀 더 먼 곳을 보았다.

“헤르만 백작,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오. 피는 충분히 흘렸으니 이제 좀 쉬어갑시다.”

북풍이 시들해진 완연한 봄이라 로벨의 목소리는 저 남쪽까지 닿지 않았다. 그 대신 남해의 광기를 머금은 때 이른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육지에서 태어난 늑대들은 바다 건너 폭풍의 징조를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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