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귀족원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겨울은 소비의 계절이고, 생존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과 가을에 비축한 식량, 기름, 장작, 양털 등을 아끼고 또 아끼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녀 키르케는 고요한 시내를 벗어나 늑대성 언덕길을 힘겹게 올랐다. 동이 틀 시간인데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추위와 싸우는 사람들은 아침마저 아끼는 듯했다.
“칫.”
펄프 대장이 아래 용병들과 투닥거리며 돌계단을 놓았는데, 전문 석공이 아닌지라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마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오늘처럼 눈이 쌓인 날은 어디가 계단인지 알 수 없어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속 편하게 옛길을 선택했다.
어스름으로 무장한 새벽바람에 맞서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부츠를 넘보는 용감한 눈 더미에 대항해 지팡이를 휘저었다. 그리고 세상을 지우는 하얀 재들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을 찾았다.
“...모래?”
진짜 금은 아니지만, 정성과 노력이 황금 같은 모래였다. 누군가 얼음 위에 모래를 뿌려두었다. 마녀는 보석처럼 빛나는 모래를 바라보며 짐짓 심각하게 추리했다.
구두쇠 어린 집사가 아랫사람을 위해 귀한 모래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테고, 게으른 용병이 자발적으로 일거리를 늘리지는 않았을 테니, 십중팔구 기사님의 자상한 배려였다.
“이히힛! 히힛!”
마녀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끌어안고 시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마녀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눈 덮인 성문 앞이라 퍽 기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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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추리는 절반만 맞았다. 기사님은 기사님인데, 마녀가 생각한 기사님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녀 때문에 뿌린 모래도 아니었다.
“남쪽 영주들이 회담을 가졌습니다.”
늑대성의 수행기사 호른 경이 서쪽 항구에서 말린 정어리와 모래 자루와 남부 소식을 가져왔다. 로벨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
로벨은 죽은 애벌레를 조심스럽게 집어 벽난로에 던지고 깨끗해진 꿀을 따랐다. 불을 머금은 꿀은 천년 된 호박처럼 영롱했다.
“좋은 꿀이군요. 속이 든든합니다.”
“어린 집사가 양봉업을 생각 중이오.”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온 용병들이 네일 공국 특산품 미드(Mead, 벌꿀주)를 좋아하자 아예 내년 사업 아이템으로 삼았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설탕보다 싸고, 땅이 적게 드니 나쁘지 않다 생각하오.”
“그것이 아니오라, 수도원에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꿀과 밀랍은 와인과 더불어 수도원의 주된 생산품이었다. 수도원에서 고행하는 사제 중 비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일은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알아서 할 것이오. 그보다 아까 한 말은?”
호른 경은 꿀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몸을 살짝 숙였다.
“귀족원 회의가 열렸습니다.”
로벨은 선대부터 써온 낡은 주전자를 난로에 걸고 부지깽이를 잡았다. 성 안의 우물은 깊고 가을내 준비한 장작은 넉넉하니 당장은 걱정이 없었다.
“이 계절에 특이한 일이네.”
기사도 사람인지라 눈 내린 날에 여행하기는 힘들었다. 아니, 먹을 것이 궁한 봄이나 농작물 가격이 요동치는 가을이 아니면 어지간해서 모이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호른 경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로벨은 괜히 긴장되어 부지깽이를 꽉 쥐었다.
“저를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
로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설마 그래서 삐졌냐고 묻을 뻔했다. 호른 경이 1초만 늦게 말했어도 그랬을 것이다.
“저뿐만 아니라 매튜 경, 마튼 경, 랭스터 경 등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로벨에게 친숙한 이름이었다. 바꿔 말해 친(親) 로드릭 공작의 기사로 알려진 이름이기도 했다.
“그 말은?”
“주군의 뒷담화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겠지요.”
최악의 경우 반란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로벨도, 호른 경도 반란은 생각하지 않았다. 늑대성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누가 감히 늑대 무리에게 맞설까. 포클랜드의 국왕조차도 불가능했다.
“이번 회의를 주도한 자가 누구요?”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입니다.”
로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반골의 백작이다.
“초대된 기사들은?”
“페르젠 가문 파벌을 제외한 옛 프란시스 기사들입니다.”
그걸로 반란이 아니란 것은 확신했다. 그 영악한 헤르만 백작이 폭풍성의 랭스터 경과 파도성의 페르젠 백작을 뒤에 두고 권좌에 도전할 리 없었다.
“항의로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로벨의 충신들을 대놓고 배제하면서, 딱히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 것은 항의 말고 없었다. 좀 더 자극적으로 말하면 관심 좀 가져달라 떼쓰는 중이다.
“봄이 오면 프란시스 시티와 동부평야를 한 바퀴 돌아보겠소.”
배부른 고충을 듣고, 봄에 걷을 세금을 감면해주면 불만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작년이라면 그랬겠지만, 올해는 아닙니다.”
“아니라고?”
호른 경은 입을 가리고 헛기침했다.
“영민하신 주군의 영험한 추리대로 항의는 맞으나, 세금 때문은 아닐 겁니다.”
“왜 갑자기 아부하는 거요?”
“진짜 이유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실 테니까요.”
호른 경은 로벨을 잘 알았고, 로벨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호른 경이 기분 나쁠 거라 했으니 분명 기분이 나쁠 것이다.
“...조금만 나빠하겠소.”
로벨이 약속하자 호른 경이 안도하고 말했다.
“전쟁을 요구할 겁니다.”
로벨은 약속대로 크게 나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랑?”
로벨이 큰 눈을 깜박이자 호른 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웃을 사안이 아니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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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에게는 적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볼탄 반도에 적이 많다.
북해안을 장악한 사트로 가문, 천 년 동안 지지고 볶은 네일 공국, 샘 포클 이후 주종관계가 형성되었으나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포클랜드 지방, 인어해 건너 남방 4개국과 자유도시연맹 등등...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는 세력이었다.
“몰트 도너반 남작의 일이 자극이 된 모양입니다. 미망인 전쟁 이후 처음으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았습니까.”
“그전에 붉은 산도 점령했는데...”
“주인이 그대로면 점령이라 말하기 어렵지요.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땅을 가지고 싶다는 거요?”
“역시 영민하신...”
“그만해도 되오. 화 안 났으니까.”
잉그비아 왕국과 네일 공국으로 원정을 다녔지만, 실질적인 소득(=땅)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죽은 자의 왕과 싸움도 희생만 치렀을 뿐이다. 전쟁이 아니면 재산을 늘리지 못하는 시골 기사들의 불만은 당연했다.
“이번 일로 주군의 심정도 같을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주군께서 무기를 모으고 용병을 늘린 것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마도의 수호자와 싸우기 위해...”
로벨은 말을 하다 말았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신도 마도의 수호자였다.
“아무튼 전쟁 때문은 아니오.”
“주군께 충성한지 얼마 안 된 기사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댔다. 벽난로의 장작이 갈라지며 불똥이 확 튀었다.
전쟁은 저 불과 같았다. 태우고, 부수고, 끝끝내 재만 남기는 파괴의 현상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맛있는 요리를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얻지 못한다. 이 시대 전쟁은 가진 자의 생존수단이었다.
“전쟁은 없소.”
로벨이 딱 잘라 말했다. 호른 경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기사들이 싫어할 겁니다.”
“그래도 안 되오. 본인이 왜 고르곤 공작과 싸우고 브로크 야를과 싸웠는지 잊었소? 겨우 찾은 볼탄 반도의 평화를 해칠 수 없소. 이 땅은 기사들의 땅이 아니오.”
로벨의 결심은 확고했다.
“봄이 오면 제3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를 개최하겠소. 이전 보다 훨씬 성대할 것이오. 우승자가 세습 기사면 남작위를 하사하고, 이미 영지를 가졌으면 포상금과 함께 각종 세금 혜택을 주겠소.”
전쟁을 싫어하는 왕과 사치를 혐오하는 제후가 막대한 비용을 치르며 토너먼트를 개최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 소문내겠습니다.
로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기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전쟁의 위험을 미뤘다고 생각했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기사까지 단속해야 한다는 사실에 피곤함을 느꼈다. 하지만 한 가지 실수했다.
노회할 대로 노회한 호수성의 백작은 젊은 로벨과 호른 경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연륜이 깊은 펄프 대장이 우려한 일이기도 했다.
전쟁은 어느 한쪽만 결심하면 시작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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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지나고, 겨울의 기승이 점차 잦아들었다. 해가 높이 뜨는 시간에는 포근하기까지 했다.
눈 덮인 나뭇가지 위로 겨울 철새가 쪼로롱 내려앉고, 꽁꽁 얼어붙은 개울 아래로 물고기가 꼬리쳤다. 겨울잠에서 깬 회색곰이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농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애꾸눈 이하 울프 용병단 눈에 띄어 멀찍이 쫓겨났다.
싸움개 닥스가 ‘곰 출몰 주의’ 팻말을 꽂다가 빗나간 망치에 발등이 찍혀 실려 간 것이 유일한 사고일 뿐, 평화로운 봄의 시작이었다.
“자유도시연맹이 용병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서 펄프 대장의 첫 보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로벨은 계절 변화에 민감한 필드 아머를 정성껏 손질하며 물었다.
“도시연맹? 누구랑 싸우는데?”
자유도시연맹은 유라피아 대륙 7개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인들의 나라였다. 인어해 남쪽과 동쪽에 점점이 흩어져 있으며, 에르나 왕국을 위협할 무장선단을 가졌다. 로벨이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경제나 정치 쪽은 깜깜했다.
“그게... 저희랑 싸울 거 같습니다.”
기쁘진 않지만, 로벨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북쪽의 위협을 모두 제거한 볼탄 반도 공작이 남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누가 그래요? 누가!”
어린 집사가 펜대를 휘두르며 고함쳤다. 모함도 이런 모함이 없었다. 펄프 대장은 왜 나한테 화내느냐는 의미로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자유도시의 상인들이 하는 말이오.”
“그놈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빨았나요? 뭔 말 같지도 않은...”
“호수성에서 소문을 내는 모양입니다.”
로벨이 ‘아?’ 소리를 내었다. 지난날 호른 경이 가져온 정보와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말이지...”
로벨은 스스로 반성했다. 미리 눈치 챘어야 했다. 그 영악한 헤르만 백작이 고작 주청이나 하려고 귀족원 회의를 소집하진 않았을 것이다. 겨우내 찝찝했던 생각이 벗겨졌다. 딱히 시원하진 않았다.
“저쪽에서 군대를 모으면 저희도 군대를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난 것은 전쟁상인과 용병뿐이죠.”
“용병하고 다를 바 없는 기사들도.”
로벨은 한동안 안 써서 딱딱해진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우선 헤르만 백작. 괘씸하긴 한데 혼낼 명분이 부족했다. 로벨의 명예를 모욕한 것도, 로벨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우리 위대하신 주군이 북쪽의 나라를 싹 쓸어버렸당께? 남쪽의 니들도 알아서 처신 잘 해라잉?’ 수준의 발언인데, 이걸로 죄를 물으면 봉신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럼 해결책부터 찾아야 했다. 자유도시연맹으로 사람을 보내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 가장 빨랐다. 이런 일은 호른 경이 믿음직스러운데, 한 고을의 영주라 손이 바쁜 봄에 부르기 미안했다.
“그래도 기사 가문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누가 좋을까?”
로벨 곁에는 유능한 인재가 많은데, 그중 기사 계급은 몇 안 되었다. 세습 기사 가문에서 올라온 탓에 혈연이 짧고 가늘었다.
“켈트 경의 장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 가문은 영주님께 충성하니 파도성이나 호수성의 입김이 닿은 기사들보다 믿을 수 있습니다.”
“그 꼬맹... 아직 어리잖아.”
“성인식을 치렀으니 성인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모시는 기사도 없습니다. 이참에 영주님 사람으로 받으시지요.”
“딱히 쓸모 있어 보이진 않던데...”
어린 집사가 혹평을 내놓았다. 부친인 켈트 경조차 부끄러워하니 당연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로벨이었다.
“정 사람이 없으면 그 아이로 하자. 실무는 헨리 상회장에게 맡기면 되니까. 음. 괜찮을 거야. 아마도.”
그리 괜찮게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