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상호 동의
영주의 권리에는 수많은 것이 포함되어있다.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조세권, 법을 정할 수 있는 입법권, 범죄자를 심판할 수 있는 재판권, 군대를 가질 수 있는 군사권 등등... 영주는 영지에서 국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국왕도 수많은 영주 중 가장 힘이 센 한 명이 오른 것이니, 국왕이나 영주나 가진 권리는 거기서 거기였다. 따라서 영지를 이양받는 것은 나라를 물려받는 것과 비슷했다.
“으...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
로벨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종이 속에서 신음했다. 깁스 자작의 권리와 재산을 명시한 종이가 한 더미, 그것을 이양받는 종이가 한 더미, 그 과정이 정당하고 명예로웠다는 종이가 한 더미였다.
“깁스 자작령의 모든 재산 소유권을 영주님 앞으로 돌린 다음 몰트 도너반 경에게 하사하는 절차에요. 서류정리는 대강 끝났고, 충성서약식이랑 작위수여식만 치르면 돼요.”
로벨은 고개를 돌려 몰트 경을 보았다. 요 며칠째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라 따로 불러 설명할 필요 없었다.
“언제가 좋겠소?”
깁스 자작령이 도너반 남작령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굳었다. 몰트 경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하기사, 봉신의 일개 기사에서 인구 800명의 영주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인생역전이었다.
“저, 저는 언제든지 좋습니다.”
“그럼 사흘 뒤에 치릅시다. 마침 호른 경과 바이란 경이 가까이 있으니까.”
로벨이 쿨하게 날을 잡자 몰트 경은 끝내 참지 못하고 헤벌쭉 웃었다.
“옛 신과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주군께 죽는 날까지 충성하겠습니다!”
몰트 경의 우렁찬 충성맹세는 어린 집사가 짜증내며 제발 나가라고 할 때까지 이어졌다.
로벨은 ‘옛 신’과 ‘로벨’을 동의어로 착각하기 시작한 몰트 도너반 경을 억지로 쫓아낸 후 한숨 쉬었다.
“그래도... 저게 맞겠지?”
로벨의 혼잣말은 로벨 옆에 항상 있는 어린 집사만 들을 수 있었다.
“뭐가요?”
그러나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저렇게 기뻐해야 인간이지?”
어린 집사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사랑하는 영주님이 검은 숲에서 돌아온 뒤부터 좀 이상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예쁘고 착하고 게으르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우리 영주님 맞으시죠?”
“응?”
로벨이 생뚱맞다는 듯 어린 집사를 보았다. 이것은 평소와 같았다. 어린 집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말했다.
“우리 영주님 맞으면 괜찮아요. 영주님은 항상 영주님이니까요.”
@
볼탄 반도의 전통을 따르면, 서임식이나 서약식이나 최소 2명의 기사가 참관하여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요즘이야 계보가 잘 정리되어 누가 누구의 기사고, 어느 가문 몇 째인지 금방 알 수 있지만, 기사의 호칭이 신분보다 직업의 의미가 강할 때는 너도나도 기사라 자칭하여 신원을 증명하는 증인이 필수였다.
“요즘은 약식으로 서임한 후 교회와 귀족원에 통보하는 편이죠. 머를 브릭 경 서임식 때도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요?”
“명색이 볼탄 반도 공작인데 형식은 갖춰야죠. 그리고 그냥 충성맹세만 하는 게 아니라 깁스 자작령-이제 도너반 남작령-을 하사하니까 좀 성대해야죠.”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좀’이 아니었다.
참관인으로 초대한 것은 호른 경과 바이란 경 두 사람인데, 켈트 경, 마튼 경, 매튜 경 등 오래된 충신을 비롯해 약 30명의 기사가 몰려왔다. 그들을 따라온 기사 종자와 수행원이 3, 4명씩이니 총 인원이 100명을 넘겼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하찮은 이유는 가을 추수가 끝나 심심하기 때문이고, 가장 음험한 이유는 운 좋게 공작의 눈에 띄어 인생역전한 검은 숲의 기사를 시기 질투해서이며,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로벨 로드릭의 의중이 궁금해서였다.
로벨이 볼탄 반도의 공작이 된 지 3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토를 확장했다. 피를 뿌리고 시체를 쌓는 전쟁은 아니지만, 아무튼 새로운 땅을 가져왔다.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깨우친 기사들은 한 번 한 일은 두 번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깨우친 만큼 기회에 민감했다.
“사트로 가문? 아니면 포스트 포레스트?”
“검은 숲은 어떻소?”
“제임스 공작과 친분이 깊으니 검은 숲은 아닐 거요.”
로벨이 알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 짓겠지만, 기사들은 늑대성의 다음 점령지를 추리하고 있었다. 주군의 성품을 그리도 모르냐고 질타할 수 없었다. 로벨의 명성 중 8할은 전쟁으로 이뤄졌으니, 전쟁으로 자신과 가문의 가치를 높이리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펄프 대장은 고기와 술이 들어오는 홀 구석에서 투덜거렸다.
“네일 공국 원정에 참전한 기사들을 떠올리면 쉽지.”
“엥? 뭔 소리요?”
허풍쟁이는 오늘의 주인공이 아니라 엄한 곳에 집중 중이었다. 고기 접시를 나르는 아낙의 엉덩이를 툭 치고, 고개를 돌리는 사이 고기 한 덩이를 빼돌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펄프 대장은 이마의 주름 가닥을 두 배로 늘렸으나 혼내지 않았다. 허풍쟁이 짬(?)이 혼내야 하는 짬은 아니었다.
“아들을 서너 명씩 보는 작자가 수두룩한 한데, 물려줄 땅은 한 뼘밖에 안 되니까. 수도원으로, 대학으로 쫓아내는 것도 한계가 있지. 거기도 공짜는 아니니까.”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전쟁이나 하자?”
“정확히는 정복 전쟁이지.”
허풍쟁이는 고기 기름을 바지에 쓱쓱 닦으며 말했다.
“우리 기사 나리가 의뭉스럽긴 해도 먼저 해코지하는 성격은 아니잖수. 정복전쟁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펄프 대장의 이마 주름이 최대치에 이르렀다.
“너 임마, 전쟁과 사랑이 다른 게 뭔지 아냐?”
“어? 인구가 줄어드는 거랑 늘어나는 거?”
“...그것도 맞는데, 좀 더 철학적으로 생각하자.”
“갑자기 되도 않는 철학 타령이오? 걍 말하쇼.”
펄프 대장은 허풍쟁이의 고기를 빼앗아 입안에 욱여넣고 항의하는 십년지기를 걷어찼다. 그리고 홀로 남아 황금빛 미래를 꿈꾸는 기사들을 훔쳐보았다. 제법 머리 좀 쓰는 허풍쟁이조차 사태의 심각함을 모르니 저 얼빠진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쟁은 상호 동의 없이 어느 한쪽만 마음먹으면 시작되지.”
@
몰트 도너반 경의 충성 서약은 엄숙히 진행되었다.
옛 신의 경전에 손을 얹고 충성을 다짐한 후 로벨의 인장 반지에 입을 맞추고 미리 맡겨둔 칼을 하사받았다. 그것으로 초대 도너반 남작이 되었다.
검은 숲의 도너반 가문이면 지역은 달라도 나름 명문가라 출신으로 트집 잡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공적으로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었다.
“본인은 동부평야 전투 때부터 주군을 따랐으나 망아지 한 마리 키우기 힘든 초라한 목장을 하사 받았거늘, 누구는 가족을 잘 둬서 비옥한 자작령을 통째로 선물 받는군.”
몰트 경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로벨의 신임 중 상당부분은 죠드 도너반 자작의 조카이기 때문이었다.
“까마귀 성의 문둥병 자작 조카라는군.”
“가만, 문둥병은 유전이 아니었소?”
“지금은 젊으니까 괜찮지만, 훗날 어찌 될지 모르지.”
이쯤 되면 악담이 아니라 저주였다. 몰트 경은 칼자루로 가는 손을 억눌렀다. 주군의 성에서, 그것도 충성맹세한 당일에 결투를 치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영지에 가면 사람이 많이 필요할 거요. 행정관, 서기관, 징수관, 용병대장, 집사장과 하인까지. 기존의 고용인을 그대로 써도 되지만, 혹 신뢰할 수 없다면 본인이 후원하는 수도원에서 사람을 구해주겠소.”
“아, 예.”
“물론, 용병은 수도원에서 구할 수 없소. 괜찮다면 울프 용병단에서 경험 많은 소대장을 하나 보내주겠소. 자랑은 아니지만, 내 용병단의 소대장이면 어지간한 나라의 용병대장보다 나을 것이오.”
“예... 예.”
“내 애마(愛馬) 모닝스타는 콩을 좋아하는데, 올가을 어린 집사가 귀리값을 크게 낮춰 앞으로 귀리만 주자고 하오. 경이 가서 모닝스타의 솔직한 의견을 들어주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손을 깍지 꼈다. 이럴 때는 호통보다 침묵이 좋았다. 몰트 경은 귓가에 감도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사라지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땅에 낯선 영주가 되었는데, 낯선 기사들이 입방아까지 찍으니 정신없는 것은 당연했다.
“저들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시오.”
“귀가 있고, 칼이 있는지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오.”
로벨은 앞서 설명한 것을 다시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했다.
“따로 궁금한 것이 있소?”
몰트 경의 볼살이 꿈틀거렸다. 표정관리가 잘 되는 편은 아니었다.
“꿈같은 기회를 잡게 되어 앞뒤 재지 않은 제 잘못이 크나, 지금이라도 감히 여쭤볼까 합니다.”
“간단히 물으시오.”
“제게 왜 영지와 작위를 하사하신 겁니까?”
지금 보듯 볼탄 반도 토박이 기사가 수십, 수백인데, 굳이 검은 숲 출신의 몰트 경을 데려와 영지를 내릴 이유가 없었다.
“경도 알다시피 죠드 도너반 자작은 내 친구였소.”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저 기사들의 험담이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오. 깁스 자작령은 사트로 가문과 도트넘 가문의 관문이오. 로드릭 시티 입장에서는 국경이라 할 수 있소. 그 때문에 지난날에도 여러 번 마찰을 빚었소.”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국경을 맡길 기사가 필요하나, 앞서 말한 두 가문과 연관된 자는 곤란하오. 특히 도반 도트넘 백작 말이오.”
강철성의 백작은 검은 숲에서도 유명했다. 로벨이 강한 경계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혈연으로 복잡하게 얽힌 볼탄 반도 출신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구나.’
로벨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한 이유는 대외적인 것이었다. 로벨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인 기사 중의 기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소.”
오늘 치른 충성서약식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까마귀 마을에서 청원한 일이었다. 몰트 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곳의 모든 기사가 주군께 충성하지 않습니까?”
로벨은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거나 로벨을 힐끔거리는 기사들을 보았다.
“‘로벨 로드릭’이 아니라 내게 충성하는 기사를 보고 싶었소. 솔직히 말해 이 이유가 가장 크오.”
아는 것이 하나 없는 몰트 경은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주군이 로벨 로드릭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야?’
그러나 몰트 경도 꼴에 기사라 분위기를 해치는 짓은 하지 못했다. 그저 심오한 뜻을 받잡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한 번 더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