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최악
로벨 일행은 까마귀 마을에 케네디를 내려주고 닷새에 걸친 강행군으로 늑대성에 돌아왔다.
케네디와 헤어질 때 마녀가 우울해 한 것과 허풍쟁이가 코피를 쏟은 것을 제외하면 아무 탈 없었다. 로벨이 공작위에 올라 도적이고 몬스터고 남김없이 소탕한 덕분이다.
“영주님이 오셨다! 영주님이 오셨다.”
“에구머니나! 여보! 나와 보아요! 영주님이 오셨어요!”
로벨의 깃발이 보이자 성 밖의 농민부터 성 안의 자유민까지 일손을 놓고 나왔다. 외지인에게는 퍽 신기한 광경이었다. 도시의 주인이 왔으니 아는 척이야 해야겠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늑대성의 공작은 정말 인기가 좋군.”
“싸웠다 하면 이기니 그럴 수밖에...”
“그것보다 세금을 적게 걷어서지.”
“빼어난 외모와 출중한 칼솜씨 때문이 아니고?”
로드릭 시민이 모두 로벨의 얼굴과 성격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과 거기서 비롯된 근거 없는 상상으로 로벨을 좋아했다. 원래 인기란 그런 것이었다.
“영주님! 영주님!”
“컹! 컹!”
진정 반가운 사람이, 아니, 사람과 늑대가 마중 나왔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훌쩍 내려 어린 집사와 가볍게 포옹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죠? 팔다리 모두 건강한가요?”
악명 높은 검은 숲에 다녀왔으니 충분히 걱정할만했다. 로벨은 두 팔과 두 다리를 차례로 움직여 보였다.
“응. 건강해. 아픈데 없어.”
아야와 이야카가 ‘컹컹!’ 짖고 ‘아우우-’ 울며 로벨 주의를 돌았다. 로벨은 컨틀렛과 가죽 장갑을 벗어 복슬복슬한 늑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너희도 잘 지냈어? 와, 벌써 털갈이했구나? 이쁘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자 직장 늑대성을 보았다. 성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장작더미와 마구간 기둥 뒤에 숨어 빠끔히 훔쳐보고 있었다. 어린 집사는 로벨의 시선을 따라 꼬마들을 보고 물었다.
“그럼 소득도 있나요? 저 꼬맹이들을 내보낼 수 있어요?”
로벨은 로드릭 시티의 작은 새싹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말했다.
“응. 물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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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험의 소득은 요정초, 물병초, 항아리꽃을 비롯한 몇 가지 고급 약초와 만드라고라 한 뿌리였다.
“그런데 좀 작지 않아?”
로벨은 손가락 두 개 크기의 만드라고라로 30명이 넘는 아이들을 어찌 치료하나 걱정했다. 그러나 늑대성 최고의 마법사 키르케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만드라고라를 여러 약재 함께 압착해서 즙을 짜낸 후 석화병에 걸린 아이들에게 한 방울씩 마시게 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200야드 범위의 생물을 기절시키는 기상천외한 힘을 가진 식물이니, '고작' 한 방울이라 할 수 없었다. 닥터 줄리안이 성호를 그었다.
“오오... 옛 신이시여...”
“그렇게 착각할 수 있지만, 에헴! 마법사 키르케에요.”
불경한 말이나 질타하지 않았다. 옛 신이 직접 강림해도 수십 명의 어린아이를 살린 공로는 인정할 것이다.
얼굴부터 아랫배까지 석화가 진행된 중증 아이까지 딱지를 떼고 일어났다. 도시 안팎을 돌아다니는 그람 형제가 더 이상 환자가 없음을 고했다.
“휴우... 이제 봉쇄를 풀어도 되겠어요!”
어린 집사가 매우 좋아했다. 밤만 되면 울어대는 갓난아기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일이 끝나자 어른들의 일이 시작되었다.
로벨은 깁스 마을에서 온 사람들을 모아 여러 질문을 하고,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우리가 가지자.”
정황상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나 편견 때문에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뭘... 가져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콧김을 짧게 토했다.
“깁스 자작령.”
두 자리 햇수로 로벨을 모셔온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리암 수사 등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저거 농담이죠?’, ‘농담을 모르는 양반인데...’, ‘아, 누가 좀 말려 봐요!’ 하지만 로벨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전쟁하자는 게 아니야. 사트로 가문의 봉신이니 힘으로 뺏을 수 없잖아.”
‘뺏을 수 있으면 뺏고요?’ 라는 질문이 혀끝까지 나왔으니 꿀꺽 삼켰다.
“지금의 깁스 자작은 본래 기사로 교육받은 자가 아니야. 이전 영주가 살해되고 실종되어 자리를 받은 자야.”
“그래도 ‘깁스’에요. 정통성을 무시할 수 없어요. 붉은 산 전쟁 이후 볼프 사트로 후작이 쥐죽은 듯 지낸다고 하지만, 봉신의 땅을 빼앗는 것까지 방관하지는 않은 거예요.”
“정당하게 받으면 돼.”
“자기 땅을 ‘정당하게’ 주는 영주가 어디 있어요?”
로벨은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예전에 바이란 남작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지? 그 때문에 호른 경까지 참전해서 싸워야 했고.”
“언제적 일인데...”
“언제적이든 마무리가 안 된 일이야.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명분이다. 로벨과 칼을 섞은 귀족들은 치를 떨며 항의하겠지만, 로벨을 적대한 적 없는 귀족들은 제 일이 아니니 묵인할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대체 왜요?”
어린 집사가 자아성찰부터 우주관찰까지 모든 것에 붙일 수 있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로벨은 손가락으로 팔뚝을 툭툭 치며 말했다.
“기사 자격이 없는 자야.”
“예?”
“자기 땅에서 자기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저 많은 농민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팽개치고 핏덩이를 안은 채 도시로 와야 했어.”
“그거야 뭐...”
어느 영주나 비슷할 것이다. 더욱이 깁스 가문은 로드릭 가문과 척을 져서 로벨에게 도와 달라 말도 못했다.
흰머리의 펄프 대장이 긍정적으로 동조했다.
“마녀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도시에도 전염병이 돌 뻔했지요. 따질 이유는 충분합니다.”
“따지기만 하면 말이죠...”
어린 집사가 구시렁거렸지만 대세는 넘어왔다.
리암 수사도 피를 보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깁스 자작의 땅을 빼앗는데 동의했다. 예전부터 가혹한 통치로 말이 많은 자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로벨 앞에 두 손을 들었다.
“도너반 가문의 기사를 데려온 것도 이 때문이었군요. 에휴. 처음부터 결정이 난 일이잖아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예산이 좀 필요할 거야.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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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업도 계절을 타는지라 가을추수가 끝나면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시골 영주에게 잘 보여 수비병으로 정착하거나 도시 부르주아 비위를 잘 맞춰 호위병으로 고용되면 복 받은 경우다. 대개는 허름한 술집에서 허술한 온기를 빌리며 쉬어빠진 맥주 찌꺼기로 봄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신고용에 노후보장까지 해주는 울프 용병단은 용병업계 파라다이스였다. 어지간한 풋내기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들어와도 금방 갈려 나가는 것이 탈이지만, 일단 정착만 하면 꼬박꼬박 나오는 급료와 포비아 왕국 최정예 용병이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울프 용병단 출신이라 하면 동종업계 대장들은 물론, 잘나신 기사 나리와 부르주아 상인들도 앞다퉈 모셔가려고 하니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위로해도 소용없소.”
싸움개 닥스가 입술을 삐쭉였다. 싸움개 일당은 무장이 잘 된 맨앳암즈로 본디 고급 인력이라 어디가나 환영받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 불만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눈이 내리더이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요?”
“제기럴... 싸울 거면 싸우고, 말 거면 집에 갑시다. 이건 뭐 수당도 안 나오는데 고생만 하니...”
“옳소. 옳소. 시꺼먼 남군(南軍) 떨거지들은 안 나오고 왜 우리만 뺑이 치는 거요?”
용병들이 불만을 표시하자 어르고 달래던 펄프 대장이 기어이 폭발했다.
“이 자식들아!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먹을 거 주고 입을 거 주는데 뭐 이리 불만이 많아? 하, 참나! 처음 용병단에 들어올 때는 뭐든 하겠다고 징징거리던 것들이 대가리 좀 굵었다고... 야, 존스! 너 임마 제발 뽑아달라고 성문 앞에서 칼춤까지 추던 놈이...”
“왜, 왜 나만 가지고 그러시오!”
울프 용병단은 지금 깁스 자작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여드레째 야외 숙영 중이었다.
겨울 숙영은 축복받은 용병들도 투덜거리게 만들었다. 로드릭 시티가 가까워 보급은 원활하지만,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과 꼬리뼈를 두드리는 바닥 냉기는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적인 스트레스였다. 벽난로로 덥혀진 아늑한 펍 구석에서 따뜻한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살얼음이 낀 맥주를 시원히 들이키며 시답지 않은 잡담을 하거나 카드 게임이 하고 싶은 것뿐, 죽을 것 같다거나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도 있었다.
“이제 며칠 안 남았다. 깁스 자작이 암만 독종이라도 항복할 게다.”
성 안에서 따뜻한 불을 쬐나 정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필 무적무패 공작에게 찍힌 가엾은 어느 자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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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칼집을 풀어 테이블에 올렸다. 평생 수족처럼 차고 다닌 칼이라 새삼 불편할 것은 없지만, 보여주기 위해 칼을 풀었다. 효과는 충분했다.
“대체 왜... 왜 이러시는 거요?”
소갈머리가 부족한 깁스 자작이 더듬더듬 따졌다.
로벨은 칼자루를 놓고 잠시 침묵했다. 로벨이 아니어도 우람한 병장기를 잡고 으르렁거리는 호른 경, 몰트 경,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등이 있으니 무방비하다 말할 수 없었다.
퍽 안쓰러운 입장의 깁스 자작은 어린 깁스 자작이 사라진 뒤 먼 타향에서 온 새 영주였다. 첫인상을 말하자면 살찐 거위였다. 사납고 욕심 많지만, 눈치를 잘 보며 즉흥적이었다. 이 시대 귀족이 대부분 그렇듯 야심과 탐욕을 구분 못하기도 했다.
“깁스 영지의 권리를 양도받기 원하오.”
로벨은 머리와 꼬리를 쳐내고 본론을 꺼냈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다.
“권리? 내 땅의 권리 말이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내어준다고 했소?”
“우리 사이의 긴 전쟁을 끝낼 때가 되지 않았소.”
깁스 자작 입장에서 생뚱맞은 소리였다. ‘전쟁? 무슨 전쟁? 내가 로드릭 공작하고 전쟁을 치렀다고?’ 로벨은 옆자리를 힐끔 보았다. 악명 높은 로벨의 기사 중 하나가 있었다. 가시성의 바이란 남작이었다.
그 순간, 깁스 자작은 이것이 무력을 앞세운 100% 트집이란 것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집사가 서류뭉치를 풀어 흐룬팅 옆에 놓았다. 칼과 문서. 귀족이 가진 힘의 상징이었다.
“자작님은 본디 도시 사람이라 장원 생활이 익숙지 않잖아요?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관리에 힘이 부친 것을 이해해요.”
“그, 그건 또 무슨...”
“전염병이 돌아 영지 아이들이 죽어 가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우리 영주님이 깁스 자작님의 고뇌를 십분 이해하여 겸사겸사 지난 일도 청산하고, 좋은 거래를 하고자 찾아왔어요.”
어린 집사의 말에서 희망을 느꼈다. 거래란 받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깁스 자작령의 권리를 넘기면 즉시 2만 5천 페닝을 지불하고, 자작님의 대(代)까지 매년 세금의 20%를 드리겠어요.”
칼 차고 쳐들어와서 제시하는 조건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영지를 팔라는...?”
로벨은 손을 깍지 껴서 무릎에 얹고 리암 수사가 써 준 대본을 그대로 읊었다.
“내 어찌 깁스 가문의 정당한 권리를 힘으로 뺏겠소. 지난날의 말썽과 근래의 불미스러운 사건을 관망한바, 최선의 해결책을 찾았을 뿐이오.”
깁스 자작은 눈알을 대굴대굴 굴리며 주판을 튕겼다. 홀을 점령한 기사들과 영지를 포위한 용병들과 매해 끊이지 않는 괴물과 역병을 생각하면 포클랜드 시티로 돌아가 2할의 세금에 만족하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편이 행복했다.
그런데 깁스 자작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로벨은 자신의 직할령에 세금을 극도로 낮춘다는 것이다. 로벨이 걷어 들이는 세금이 2할이 안 되면, 깁스 자작이 받아가는 세금은 4푼이 안 되었다.
“조, 좋소. 사트로 가문과 도트넘 가문 사람을 공증인으로 세우고, 옛 신의 사제 앞에서 맹세하시면, 기꺼이 가문의 권리를 넘기겠소.”
최선의 수는 아니지만, 최악의 수는 피한 결정이었다. 로벨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