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52화 (352/605)

352화. 허세

여행의 목적인 만드라고라를 손에 넣었지만, 당장은 바람 언덕을 떠나지 못했다. 만드라고라가 지른 비명에 허풍쟁이가 게거품 물고 기절한 탓이다.

“왜 이 녀석만 이래?”

“그것이... 그...”

과묵한 몬트는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멍청해서 그렇습니다.”

마녀가 심각하다가 깔깔 웃다가 다시 심각해졌다. 몰트 경은 어떤 명배우도 따라하지 못할 감정변화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완전한 비하는 아니었다. 허풍쟁이는 마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귀마개를 빼버렸다. 거리가 200야드나 되는데, 뭔일 있겠냐 싶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안전불감증이죠. 에휴... 하여간 용병이란 아저씨들은...”

“너무 탓하지 마. 허세가 없으면 목숨 걸고 싸우지 못해.”

아무튼, 상황이 안 좋았다. 허풍쟁이 체구가 용병치고 작은 편이지만, 괴물이 득실거리는 검은 숲에서 업고 다닐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다.

“‘조랑말’에 태우면...”

“언덕길에서? 안 돼. 위험해.”

로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점심에 올라왔는데,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허풍쟁이가 멀쩡해도 어차피 출발하기 애매한 시간이었다.

로벨은 젖은 손수건에 감싸인 만드라고라를 꾹 누르며 결정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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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에서 두 번째 야영이었다. 첫날과 비슷하게 불을 피우지 않았고, 첫날보다 더 딱딱해진 보리빵을 씹었지만, 첫날보다 한결 분위기가 좋았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했고, 보상을 약속받았으며, 가엾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

“너도 받아.”

로벨은 길 안내해준 케네디에게 10페닝 금화 다섯 개를 주었다. 약초 캐서 10로닝, 20로닝 겨우 벌며, 각종 세금에 뜯기고 나면 빵 한 조각 살까 말까한 가난한 농민 소년에게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이걸 전부요...?”

“응. 따뜻한 옷을 짓고, 건강한 당나귀를 사고, 그리고 남으면 맛있는 것도 사먹어.”

달빛 아래 몰트 경의 표정이 씁쓸했다. 기사에게 필요한 것은 금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일이 없으니 보상을 요구하기 민망했다.

“그리고 몰트 경?”

“예. 공작님.”

“경에게 줄 것은 이곳에 없소.”

“예... 예?”

몰트 경의 두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안 준다는 말이 아니니까. 로벨은 드라이어드에게 뺏긴 망토 대신 허풍쟁이의 담요를 두르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해결한 공으로 땅을 하사할 거요.”

몰트 경은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로벨의 기사가 된 것이다.

물론, 도너반 가문이 로드릭 가문에 충성하니 따지고 보면 이미 로벨의 기사였다. 그러나 가문의 일원으로 가주-존 도너반 자작을 따라 충성하는 것과 로벨에게 직접 충성하는 것은 명예와 직위에서 차원이 달랐다. 쉽게 말해 존 도너반 자작과 동급이 된 것이다.

과묵한 몬트는 온 세상에 기쁨을 표시하는 몰트 경을 피해 나직이 물었다.

“늑대성에 남는 봉토가 있습니까?”

기사로 임명한다 해서 꼭 근사한 성과 드넓은 목초지를 하사할 필요는 없다. 콩 심고 무 심기 좋은 작은 텃밭이나 돼지치기 좋은 작은 목장 하나 하사하는 경우도 흔했다. 갑옷 수리비와 말먹이 값을 해결해주면 군주로서 책무는 다 한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늑대성에 그만한 텃밭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건 금방 생길 거야.”

로벨은 어린아이처럼 미소지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꼭 좋은 뜻은 아니었다. 개미집에 물을 붓고 잠자리의 날개를 쥐어뜯으면서도 웃는 것이 어린아이니까. 과묵한 몬트는 괜히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누군지 몰라도 불쌍한 사람이 생기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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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은 무척 길었다.

자정에 허풍쟁이가 눈을 떠서 2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서도 아니고, 소변보러 간 마녀가 겨울잠 청하는 뱀을 밟아서도 아니다.

로벨은 눈을 뜨자마자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동시에 잡았다.

“누가 있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십만, 수백만 개의 별이 흐르는 커다란 은하수였다. 별무리가 얼마나 찬란한지 만월에 가까운 달빛마저 집어삼켰다. 이처럼 아름다운 은하수는 일 년에 몇 번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부족한 로벨은 ‘시야가 밝다’ 수준으로 넘어갔다.

“어, 기사 나리?”

머리에 젖은 붕대를 감은 허풍쟁이가 돌아보았다. 혼절에서 깨어난 뒤 두통, 치통, 매스꺼움을 호소해서 마녀가 조치했다.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로벨 이하 친구들은 앓는 소리가 줄어서 만족했다.

“사람들 깨워. 키르케와 케네디를 보호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예, 예?”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나빠진 거야?”

로벨이 보기 드물게 질책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풍쟁이는 무릎을 덮은 옷가지를 걷고 가장 만만한 과묵한 몬트를 향해 굴러갔다.

로벨은 무장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몰트 경을 먼저 깨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 명령하여 혼란을 주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경 써야 할 것은 허풍쟁이만이 아니었다.

‘이 기운은...’

로벨은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랐다. ‘기운’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게 키르케가 말한 사기(邪氣)구나.’

보통 사람은 조금 스산하게 느낄 뿐이지만, 인지의 세계에 한 발을 담근 로벨 로드릭은 달랐다. 현세에 존재할 리 없는 이질감이 확실히 느껴졌다.

“주군, 대체 무슨 일로...”

몰트 경이 흉갑을 앞뒤로 붙이며 물었다. 기사 종자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혼자서도 잘 입었다. 로벨은 별이 반짝이는 언덕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몬스터요.”

끼리릭-

과묵한 몬트가 쇠뇌 등자를 밟고 시위를 당겼다. 로벨의 열렬한 추종자다웠다. 그러나 아직 신앙이 깊지 않은 몰트 경이 반박했다.

“바람이 저리 부는데 어찌 괴물이...”

“바람은 저녁에 그쳤소. 해가 지면 바람도 사라지나보오.”

마녀 키르케, 허풍쟁이 제이콥, 그리고 순박한 케네디 등은 의심하지 않았다. 로벨이 괴물이 있다고 했으니 괴물이 있을 것이다.

“무슨 괴물이에요? 고블린? 오크?”

마녀가 떡갈나무 지팡이와 아쿼버스를 나눠 들고 가늘게 떨었다.

“글쎄... 케네디가 잘 알지 않을까?”

“저, 저도 몰라요. 바, 밤까지 있어 본 적이 어, 없어서...”

그때, 어둠의 장막 사이로 그림자가 불쑥 나왔다. 밤공기와 함께 내려앉은 미약한 가을바람을 타고 짐승 냄새가 전해졌다. 늑대성에서 종종 나는 냄새였다. 개를 키우는 집이면 누구나 아는 냄새였다.

“...놀(Gnoll)입니다. 진짜였군요.”

검은 숲 토벌작전에 여러 번 참가한 몰트 경이 냄새로 밤손님 정체를 파악했다.

로벨은 직접 본 적 없지만,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개의 얼굴과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리고 개과(科) 짐승이 대부분 그러하듯 무리 지어 사냥했다. 한두 마리가 아닐 것이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쓰고 바이저를 내렸다.

“자리를 지키시오. 기선을 제압해서 물러나게 할 것이오.”

‘어떻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굳이 물을 필요 없었다. 로벨이 칼을 뽑자 로벨보다 긴장한 놀이 먼저 달려들었다.

놀의 복사뼈는 개나 말처럼 뒤로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족보행과 사족보행을 모두 할 수 있는데, 순간속도만 보면 네발로 뛰는 것이 훨씬 빨랐다.

배고픈 이야카를 떠오르게 하는 주름진 주둥이가 어둠을 찢고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로벨이 움직였다. 흐룬팅을 쥔 왼팔을 길게 뻗어 놀의 턱을 깎았다. ‘베었다’가 아니다. 사과 껍질을 깎듯이 턱과 가슴을 깎아냈다. 놀이 달려드는 힘을 100% 이용한 카운터였다.

“깨개개갱-! 깨갱-!”

놀은 로벨의 몸을 만지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턱이 갈라지고 가슴이 찢어져서 소리가 기이했다.

로벨은 고작 한 마디 남짓 묻은 핏물을 털어내고 충고했다.

“한 번에 덤비는 게 좋을걸?”

놀은 충고를 받아들였다.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더니 세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주군!”

몰트 경이 롱소드를 치켜들고 한발 내디뎠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로벨은 두 번째 놀을 컨틀렛을 후려치고, 세 번째 놀을 우악스러운 폴린으로 올려치며, 네 번째 놀을 뾰족한 카우터로 내리찍었다. 필드 아머의 견고함과 유연함이 돋보이... 기에 앞서, 로벨이기에 가능한 동작이었다. 아무리 최신 갑옷이라도 저렇게 움직일 수 없다.

“오오...”

몰트 경은 롱소드를 치켜든 채 굳었다.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 기사, 성 마르틴의 재림 등등, 로벨의 무용담을 귀따갑게 들었으나 온전히 믿지 않았다.

죠드 도너반 자작을 모시며 알 게 된 것 중 하나가 소문은 돼지오줌보처럼 쉽게 부푼다는 것이다. 로벨의 명성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로벨의 가름한 얼굴을 보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그러했다. 명색이 그랜드 챔피언이니 나름대로 실력이야 있겠지만, 야밤에 사냥 나온 놀 무리를 학살할 수준이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로벨은 과장 없이 폭풍의 눈이 되었다. 놀이 달려드는 족족 으깨놓았다. 심지어 갑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그렇게 여섯 마리가 쓰러지자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지성이 있다는 증거였다.

“안 올 거야?”

태풍의 특징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놀들이 안 오자 로벨이 다가갔다. 아쉽게도 몰트 경은 이후 과정을 볼 수 없었다. 로벨이 어둠 너머로 사라진 후, 말 그대로 개 잡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허! 말이 안 나오는군! 나의 주군이 저리 강인했다니! 너희들은 알고 있었느냐?”

몰트 경은 감탄 또 감탄했다. 그런데 로벨을 오랫동안 모신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도 떨떠름했다.

“기사 나리가 싸움을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허풍쟁이가 발아래 으깨진 놀을 툭툭 찼다. 머리뼈가 3인치쯤 주저앉아 코로 피와 뇌수를 뿜었다.

“...이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이건 꼭... 거시기 뭐라고 할까...”

허풍쟁이가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버벅이자 과묵한 몬트가 도와주었다.

“늑대의 왕 리카온. 그자를 보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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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놀의 습격 이후 밤을 꼴딱 새운 일행은 퀭한 얼굴로 짐을 챙겼다.

“윽... 이렇게 많았다니...”

여기저기 쓰러진 놀이 스무 마리였다. 전부 죽인 것은 아니니까, 실제 습격한 놀의 숫자는 30마리가 넘었을 것이다.

“1대 17 전설은 많이 들었지만, 1대 30이 말이 되나?”

더욱 놀라운 것은, 로벨이 일행 중 가장 생기가 넘쳤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밤을 꼴딱 새우며 스무 마리 놀을 때려잡은 사람이라 하기에 지나치게 활기찼다.

마녀 키르케가 하품하며 타박했다.

“이게 다 허풍쟁이 아저씨 때문이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기사님 보고 맨날 괴물이니 괴수니 하니까, 진짜 괴물로 변했잖아요.”

“...그게 말이 되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잖아?”

로벨은 귀리빵을 찢어 모닝스타에게 주고 안장끈을 쪼였다. 다른 말은 피냄새 때문에 한잠도 자지 못했는데, 모닝스타는 주인을 닮아 생생했다. 콧바람을 불며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까마귀 성까지 쉬지 않고 갈 거야. 그리고 수레를 빌려 바로 늑대성으로 출발할 거고.”

“하, 하루 쉬지 않고요?”

“그럴 시간 없어. 아이들을 생각해.”

허풍쟁이가 한숨을 푸욱- 쉬었다. 고용주가 미각뿐만 아니라 피로까지 잊은 모양이다. 최악의 여정이 예상되었다.

‘진짜 은퇴할까...’

사회인이면 누구나 한번쯤 하는 고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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