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인정
“젠장... 나오라는 만드라 뭐라고는 안 나오고... 드라이어드(Dryad)? 뭘 말렸나(Dry)? 이름도 이상한 것이...”
허풍쟁이 제이콥은 비명 지른 게 무안한지 끊임없이 구시렁거렸다. 마녀 키르케, 과묵한 몬트, 심지어 만나지 얼마 안 된 몬트 경과 농민 소년 케네디도 허풍쟁이의 심정을 알고 모른 척했다. 그래서 허풍쟁이는 더욱 부끄러웠다.
허풍쟁이를 놀리거나 타박하지 않는 것은 이해심이 넓어서만은 아니다. 비명 지를 만큼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분명했다. 마녀가 까치발을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드라이어드는 숲과 나무의 요정이에요.”
로벨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닝스타와 전투마들을 진정시키며 같이 속삭였다.
“내가 아는 요정하고 다른데? 너무 크잖아?”
“사람도 종족마다 키가 다르잖아요.”
“그것도 정도가 있지. 저 정도면 거의 인간...”
로벨은 속삭이다가 인간 같은 드라이어드가 알몸이란 것을 자각했다. 물감을 칠한 듯 온통 초록색이라 얼핏 봐서는 선정적이지 않은데, 그래도 알몸은 알몸이었다.
“저기, 음, 이거 받아.”
로벨은 아끼는 가죽망토를 풀어 드라이어드에게 씌워주었다. 드라이어드의 얼굴이 와락! 꾸겨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짐승 냄새. 역겨워.”
“...너무하네.”
“흐흥~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아.”
요정은 종잡을 수 없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섰다.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요정의 장난이라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런 민둥산에 나무 요정이 있다니, 신기해.”
상식에서 벗어난 것은 로벨도 비슷했다. 전설적인 존재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텄다. 드라이어드가 따박따박 따졌다.
“에잇! 민둥산이라 부르지 마! 옛날에는 울창한 밤나무 동산이었다고! 그리고 진짜 신기한 건 나야! 날 어떻게 찾은 거야? 너희 인간들은 우리를 잊은 지 오래됐잖아?”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 그쪽... 그... 레이디가 멋대로 나타났잖소.”
몰트 경이 어이없어서 따졌으나 드라이어드는 홀로 심각해져서 무시했다. 기사가 되어 무시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기에 얼굴이 붉어졌다.
“인간이 우리를 못 찾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을 찾지 못해. 옛날에는 안 그랬어. 아침이면 꽃을 따러 온 소녀와 춤을 추고, 저녁이면 무례한 나무꾼과 말싸움을 벌였지. 가끔씩 착한 인간이 공물도 바쳤고. 그런데 지금은 현세와 인세가 멀어져서 이렇게 기운이 가득한 곳에서도 만나지 못하게 됐어.”
과묵한 몬트는 그 옛날이 얼마나 옛날인지 궁금했다. 적어도 2, 300년 전은 아닐 것이다. 반면,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이지(理智)가 발달하자 신비가 사라졌다. 믿음이 상실되고 소망이 덧없는 시대에 요정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이 존재할 리 없었다. 옛 신마저 잊혀지는데 한낱 나무의 요정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때문이야?”
로벨이 뜬금없이 물었다. 요정이 고개를 들어 로벨을 보았다.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정말 특이하네.”
“너도 좀 특이해.”
“아니야. 난 평범한 밤나무의 요정이야. 하지만 너희는... 음... 인간이 아니구나?”
로벨의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정답을 원했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허풍쟁이 등은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아무리 요정이라 해도 무례하군.”
“우리 기사 나리가 인간 같지 않기는 하잖수.”
드라이어드는 용병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활짝 웃었다. 꽃망울이 터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확실히 요정은 요정이었다.
“우리에게 관심이 많구나? 하지만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 인간은 인간일 때 아름다우니까. 너희는 사랑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를 내며 불꽃처럼 타오르는데, 이곳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그곳이 어디야?”
“눈으로 볼 수 없는 곳.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곳. 용이 태양을 향해 불을 뿜고 유니콘이 초원을 뛰어놀며 천진난만한 엘프와 욕심쟁이 고블린이 달빛 아래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는 곳.”
“...인지의 세계?”
“뭐,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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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과 대화하는 것은 유익함과 비례하여 피로가 많이 쌓였다. 특히 로벨이 그러했다.
로벨은 자신이 마도의 수호자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세이렌, 윌 오 위스프, 스프라이트, 그리고 드라이어드까지. 평생 한번 보기 힘든 요정과 정령을 수시로 마주하는 것은 그저 운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인간으로 남을 수 있어?”
로벨의 질문에 드라이어드가 깔깔 웃었다. 로벨은 기분이 나빠 다시 물었다.
“왜 웃어?”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내가 요정이 되는 법을 물으면 어떻겠어?”
“난 안 웃긴데. 이유가 있으니까 묻겠지.”
드라이어드는 흐흐흥~ 하고 코웃음 쳤다.
“아까 말했잖아. 인간으로 살아. 사랑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화내면 돼. 그거뿐이야.”
이해는 했는데, 납득이 안 되었다.
“그거뿐이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는데? 그리고 너는 쉽지 않을걸?”
“왜?”
“너, 마지막으로 눈물 흘린 게 언제야?”
“오늘 아침?”
“...하품 말고.”
감정을 뜻하는 거라면 좀 애매했다. 로벨은 본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 아닌데, 나이를 먹고, 전쟁을 치르고, 명성을 쌓다 보니 점점 더 감정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는 크게 소리 내어 웃은 적도, 엉엉 울어 본 적도 없었다. 로벨이 재차 질문하려 하자 드라이어드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몰라. 나도 그 이상은 몰라. 자꾸 묻지 마.”
질문을 잘못 짚었다. 로벨의 정체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하나만, 하나만 더 물을게.”
드라이어드는 가죽망토를 오므렸다. 짐승 냄새가 나서 싫다더니, 내숭이었던 모양이다. 차마 빌려준 거라 말할 수 없었다.
“흐흥~ 좋아. 나도 받은 게 있으니까. 하나만 물어봐.”
로벨은 기꺼워하며 이 모험의 목적을 밝혔다.
“만드라고라, 어디 가야 찾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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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드라이어드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바람 언덕 터줏대감답게 만드라고라 위치를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는 조금만 더 찾았으면 내가 발견했을 거라고 떠나간 금화에 아쉬워했다. 한편, 케네디는 요정이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저 요정님을 호, 혼자 두고 가도 될까요?”
로벨은 순수한 소년의 삐뚤삐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정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날 수 없어.”
“그럼 너무, 너무 외롭잖아요.”
“네가 자주 찾아오잖아.”
“저는... 저는 와도 요, 요정님을 못 뵙는 걸요.”
케네디는 함께 온 로벨이 위대한 기사님이자 지체 높은 공작님이라 요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로벨이 마도의 수호자인 이유였다.
“내가 아니어도...”
로벨은 말을 멈췄다. 어린 소년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마법사가 아니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로벨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 이거 받아요!”
마녀가 꼬뜨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로벨에게는 익숙하지만, 가난한 용병과 농민에게는 낯선 물건이었다.
“솜?”
양모가 아니라 명주(明紬)로 만든 고급 솜이었다. 비단을 만들 때 쓰이는 거라 값이 상당한데, 그걸 아낌없이 푹푹 찢었다.
“악! 악!”
허풍쟁이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하지만 병원을 운영하며 페닝 좀 만진 마녀는 거침없었다.
“이게 있어야 해요. 아니면 큰일 나요.”
“어째서?”
“만드라고라는 반은 식물이고, 반은 동물이라, 땅에서 뽑으면 비명을 질러요.”
“윽... 그건 좀 무서운데?”
“그냥 무섭기만 하면 다행이죠. 그 비명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평범한 인간과 짐승은 곧장 미쳐버려요.”
가히 전설적인 약초였다. 로벨은 솜뭉치를 둥글게 말며 물었다.
“이걸 끼면 괜찮아?”
“귀를 막으면 좀 덜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완벽하진 않죠.”
“그럼 안 되잖아?”
로벨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녀는 그런 로벨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기사님은 괜찮아요.”
로벨은 살짝 놀랐다. 격려나 위로가 아니었다. 새를 하늘로 날려보내고, 물고기를 강에 풀어줄 때처럼 말했다.
하긴, 마녀는 그 별명대로 마녀였다. 인지의 세계에 발을 담근 마도의 종사자가 로벨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 요정과 나눈 대화로 확신했을 것이다. 그때, 허풍쟁이가 충성심을 발휘했다.
“기사 나리보고 미치라는 거요? 그쪽은 벌써 미쳤소? 어린 집사가 알면 마녀 아가씨를 뼈째 씹어 먹을 거요!”
“그럼 허풍쟁이 아저씨가 하실래요?”
“그, 그건 아니지만...”
물론, 용병의 20페닝짜리 충성심이었다. 암만 그래도 자기가 가장 중요하니까. 마녀는 지팡이를 휘둘러 가짜 충신을 쫓아내고 마저 말했다.
“혹시 몰라서 귀마개를 드리지만, 괜찮을 거예요.”
로벨은 한숨을 쉬고 인정했다.
“마도의 수호자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네.”
“기사님은 그냥 기사님이에요. 이름이 어떻든, 정체가 어떻든,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로벨은 미소 지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 집에서 지낸 마녀였다. 얼마나 아는지,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지만, 로벨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냥 뽑으면 되지? 비명 말고 신경 쓸 것은?”
“비명을 지른 뒤 죽을 거예요. 그럼 저를 부르세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 모두에게 말했다.
“멀리 떨어져.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리고 귀마개 꼭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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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바람 언덕 정상에 홀로 남아 식물로는 전대미문으로 신화 반열에 오른 만드라고라를 살펴보았다.
외형은 주위의 흔한 잡초하고 다를 것이 없었다.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약초꾼이 아니면 생각 없이 밟고 지나갈 것이다.
그 때문일까, 혼자 남아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로벨은 사람과 말이 언덕 저편으로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몸을 숙였다. 로드릭 시티와 깁스 영지의 어린아이를 살릴 귀한 약재란 생각에 잠시 머뭇했지만, 곧 줄기와 잎을 모아 잡아당겼다.
두둑...
만드라고라는 저항 없이 쑥 뽑혀 나왔다. 뿌리의 크기는 손가락 두 개 정도, 모양도 실제 손가락을 닮았다. 마녀의 말처럼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았다.
“음... 생각보다...”
...평범하다고 생각할 때, 뿌리가 눈을 떴다. 그리고 폭풍이 몰아쳤다. 웅- 우웅-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대기를 흔들었다. 고주파란 말을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몸에 해로운 것은 분명했다.
200야드 가까이 떨어진 허풍쟁이 일행이 자지러졌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만드라고라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로벨은 비로소 깨달았다.
바람 언덕의 모진 바람은 이 끔찍한 괴물로부터 숲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진짜 괴물은 너였구나?’
그리고 괴물을 잡는 것은 괴물뿐이니, 로벨은 자신이 괴물이란 사실을 오롯이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