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수색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비경(?境) 검은 숲에도 아침이 찾아왔다.
눈꺼풀을 간질이는 햇살, 이슬을 털어내는 잔잔한 바람, 고운 소리로 지저귀는 참새 소리 등등은 없었다. 그 대신 어스름한 하늘과 악취 나는 안개와 정체 모를 짐승의 울부짖음이 있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어제저녁에 펼쳐놓은 침낭, 수통, 경계줄 따위를 수거하며 하품했다.
“아침 맞아? 새벽 아니야?”
“아니. 아침이 맞다.”
그 의심은 몰트 경이 직접 해소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기사지만, 그래도 기사는 기사라 감히 말대꾸하지 않았다. 허풍쟁이는 입을 꾹 다물고 침낭 속에 잡동사니를 쓸어 넣었다. 조금 어색해졌다.
그때, 로벨이 파나케아 투구와 컨틀렛을 들고 토굴에서 나왔다.
“잘 잤어? 잘 쉬었소?”
로벨은 기운차게 인사했다. 허풍쟁이와 달리 밤바람과 아침이슬을 피해 개운했다. 어젯밤 말했듯이 보잘것없는 흙구덩이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케네디는 마녀 키르케가 선물한 리넨 망토를 여밀고 주저주저 말했다.
“지, 지금 출발하면 점심 때 도, 도착해요. 그리고 저녁 저, 전에 돌아와야 안전하고요.”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배고프면 빨리 못 가.”
로벨이 컨틀렛을 혁대에 끼우며 말했다.
불은 피울 수 없지만, 메뉴는 나쁘지 않았다. 까마귀 여관에서 가져온 보리빵과 사과잼, 그리고 푸른곰팡이가 촘촘하게 박힌 블루치즈였다. 하루 한 끼 겨우 챙겨 먹던 가난한 농민 소년과 미각을 상실한 게 분명한 고용주 탓에 비스킷과 염장고기로 끼니를 떼어온 마녀 이하 용병들은 이 정도만 되어도 행복했다.
‘내 땅, 내 고향에서 이런 음식을 드시게 하다니! 아랫것들을 믿고 신경 쓰지 않은 내 잘못이로다!’
하지만 나름 뼈대 있는 가문 출신 몰트 경은 탐탁지 않았다. ‘묽은 잼에 검은 빵이라니! 심지어 와인도 없다니!’ 로벨 일행은 진수성찬 앞에서 화내고, 눈치보고, 부끄러워하는 길동무를 이상하게 보았다. ‘왜 저러지?’, ‘우리 기사 나리만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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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는 화려하고 누구에게는 부끄러운 아침 식사를 끝내고, 숲에 풀어놓은 전투마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더 이상 '길이라 부를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은화 몇 닢에 목숨 걸고 다니던 어린 소년의 길안내만 믿어야 했다.
“거기 가면 만드라고라가 있을까요?”
“나도 모르지.”
로벨은 바람 언덕을 최종 목적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케네디가 안내한 곳을 살펴보고, 약초가 없으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진짜 마도의 수호자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인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직감이, 아니, 본능이 속삭였다. 검은 숲에 가득한 신비가 현세와 인세의 벽을 허물어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는 모르지만.
“저기가 바, 바람 언덕이에요.”
케네디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로벨은 모닝스타 고삐를 느슨하게 풀고 전방을 보았다. 키 작은 관목 사이로 텅 빈 머리가 있었다.
“바람 언덕이 아니라 대머리 언덕이잖아요? 히히힛!”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언덕 위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 정오 햇살이 고스란히 맨땅을 비추어 ‘검은 숲’이란 이름과 달리 환했다. 가을바람에 노랗게 움츠린 잡초만 잔잔히 흔들렸다.
“신기한 곳이군.”
검은 숲의 나무는 대부분 음수(陰樹)지만, 그렇다고 햇빛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조량이 좋은 고지대에 수목이 하나도 없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과묵한 몬트가 꺼림칙하게 물었다.
“마법하고 관련된 것이오?”
일행 중 유일한 마법 전문가, 마녀 키르케에게 시선이 쏠렸다. 마녀는 살짝 당황했다.
“그, 글쎄요? 음기가 약하긴 한데, 어, 원래 햇빛이 드는 곳은 약해서...”
“허? 말더듬이 병이 옮았소? 그러게 저 꼬맹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니까.”
“그,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케네디가 바락! 화를 내었다. 말더듬이라 불러서 화난 건지, 마녀를 모욕해서 화난 건지 모르지만, 결국 3초짜리 용기였다. 허풍쟁이가 큼직한 나이프에 손을 얹고 쳐다보자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뭐야? 뭐야? 왜 우리 기사님 흉내 내요? 그래도 안 무섭거든요?”
마녀는 언행불일치로 과묵한 몬트 뒤에 숨어 혓바닥을 내밀었다. 허풍쟁이는 ‘욱!’ 했지만 칼을 뽑지는 않았다.
로벨은 말싸움이 길어질 것 같아 중간에 끼어들었다.
“마법이 있으면 제대로 찾아왔고, 마법이 아니면 무서울 거 없잖아. 일단 가자.”
“...무슨 논리가 그래요?”
“허나 사실이군요. 앞장서겠습니다.”
과묵한 몬트가 비리비리한 관목을 꺾으며 나아갔다. 조금 시끌벅적하지만, 무사히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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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지명이 대개 그러하듯, ‘바람 언덕’도 아주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에 오르는데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자연과학을 공부한 학자라면 그늘이 없어 한껏 달궈진 언덕이 거목 사이로 부는 거친 바람을 끌어당긴다고 설명하겠지만, 기사와 용병은 전통적으로 과학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 허풍쟁이가 날아갈 것 같은 모리안을 붙잡고 따지듯 물었다.
“이것도 마법이오? 아, 마법이냐고!”
마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풍쟁이한테 화나서가 아니었다. 강철 투구도 날려 보낼 바람 앞에서 크고 풍성한 고깔모자는 민들레 씨앗 수준이었다. 챙을 꽉 눌러 귀를 덮고 있었다. 로벨은 아무도 듣지 않는 핀잔을 주었다.
“그냥 벗으면 되잖아?”
그러면서 본인은 파나케아 투구를 눌러썼다. 말 꼬랑지처럼 긴 머리가 자꾸 얼굴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투 아닌 사투 후 정상에 올랐다. 비탈길에서 벗어나니 바람도 사라졌다.
“후! 후하! 여기는 좀 낫군!”
“아드드... 얼어 죽을 뻔했어요...”
“추운 것보다 목이 아픕니다요.”
“그렇게 소리를 질렀으니...”
로벨은 엉망이 된 모닝스타의 갈기를 급한 대로 쓸어 만져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 언덕은 아래에서 볼 때보다 훨씬 넓고 높았다. ‘늑대성 언덕 정도 될까?’ 발아래 깔린 수해(樹海)를 보면 그보다 좀 더 컸다.
“검은 숲이 크긴 크구나.”
로벨은 이만한 언덕을 감쪽같이 감춘 검은 숲에 한 번 더 감탄했다. 그러나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과묵한 몬트의 ‘조랑말’과 몰트 경의 ‘커리어(career)’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가장 신난 것은 예상대로 마녀였다.
“우와! 우와! 요정초잖아? 책에서만 본 건데! 아앗! 말총꽃이다! 저건 잉그비아 왕국에서만 나는 거예요! 이런 곳에 꽃을 피웠네?”
“저, 저쪽에 가면 무, 물병초가 있어요. 지금은 대부분 시, 시들었지만...”
“물병초? 물병초가 있으면 항아리꽃도 있겠네요?”
“그, 그것도 시들었지만, 여, 여름에 오면...”
로벨 이하 칼잡이들이 볼 때는 그 풀이 그 풀이고, 그 꽃이 그 꽃인데, 마녀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뜯고 맛보고 포장까지 했다.
“그것도 석화병을 고칠 수 있어?”
로벨도 마법을 부릴 줄 알았다. 한껏 들뜬 마녀가 단숨에 시무룩해졌다. 허풍쟁이가 볼 때는 어떤 마법보다 마법 같았다.
“요정초는... 폐병환자한테 좋고... 물병초는... 타박상을 빨리 낫게 하는데...”
“석화병은?”
마녀는 고개를 숙이고 가로 저었다. 그럴 줄 알았기에 화내지 않았다.
“그럼 만드라고라부터 찾자. 어떻게 생긴 풀이야?”
마녀는 약재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만드라고라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크기는 5~7인치 정도, 풀잎이 길고, 줄기가 짧으며, 손톱만한 붉은 열매를 맺는데 달짝한 향이 났다.
“저도 실물은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신비한 풀이니까 척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허풍쟁이가 귓구멍을 후비고 요약했다.
“그니까 붉은 열매가 난 풀은 전부 뽑아오면 되는 거요?”
“아뇨! 아뇨! 아니요!”
마녀가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허풍쟁이는 20년 칼밥이 부끄럽게 움찔했다.
“아이씨, 깜짝아! 왜 소리 지르소?”
“소리칠 만하니까요! 절대! 절대 뽑으면 안 돼요!”
“왜?”
“그, 그러니까, 만드라고라는 반은 식물이고 반은 동물이에요. 뿌리가 살아있어요. 아니, 아니, 보통 식물도 살아 있지만, 그것은 살아서 움직여요.”
로벨은 문어 다리처럼 꿈틀거리는 뿌리를 상상했다. 위험한 건 둘째 치고 심미관에서 별로였다.
“절대 그냥 뽑으면 안 돼요! 정말 위험해요! 만약 붉은 열매가 난 풀을 찾으면 그냥 표시만 해둬요. 제가 살펴볼게요.”
“응. 응. 알겠어.”
로벨은 마녀의 경고를 숙지한 다음 떨떠름한 기사와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길게 말할 것 없었다.
“뭐해? 수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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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기사의 명예와 울프 용병단의 우정을 믿지만, 그것이 의욕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몰트 경에게는 늑대성의 작위수여를, 용병들에게는 금화와 휴가를 약속했다.
“작위라면...”
“나의 기사가 되고 싶다 하지 않았소?”
그리고 시무룩한 소년 케네디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마녀가 말한 풀을 찾으면 금화를 줄게.”
“지, 지, 진짜요?”
“이 자식! 기사 나리가 허언할 분 같으냐!”
허풍쟁이는 포상금에 희희나락해서 허겁지겁 출발했다. 몰트 경은 ‘역시... 역시 시험이었어...’ 어쩌고 중얼거리며 반대방향으로 떠났고, 마녀는 케네디 손을 잡고 주변을 더 살폈다. 그리고 로벨은 주인이 팽개친 말들과 함께 거센 바람이 올라오는 언덕 외곽을 거닐었다.
“여긴 신기한 곳이야.”
발아래 수해가 펼쳐져 있었다. 나무. 나무. 나무. 그리고 나무가 가득했다. 저 북쪽 끝에는 새까만 북해 파도가 넘실댈 테고, 저 남쪽 끝에는 대협곡 너머 포클랜드의 비옥한 토지가 뻗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쪽 땅에는...’
최초의 드루이드이자 최후의 예언가, 하얀 숲의 둠 노릭스 후작이 있을 것이다. 로벨보다 앞서 마도의 수호자가 된 영웅이었다.
로벨은 다음 행선지를 서쪽으로 잡았다. 숲이 깊어지면 이곳과 비교가 안 되는 신비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일정을 짜는 것은 조급했다. 오늘 하루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으악!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살려줘요! 우아악! 괴물이야!”
언덕 맞은편에서 허풍쟁이의 비명이 들려왔다.
로벨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진정한 기사라 두말없이 모닝스타에 올랐다. 척추반사 수준이었다. 모닝스타가 놀라서 앞발을 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론다이트를 뽑아 랜스처럼 세우고 박차를 가했다.
“가자!”
“히이이잉-!”
모닝스타가 달리자 두 마리 전투마도 얼떨결에 따라 달렸다. 평화로운 바람 언덕이 한순간 전장처럼 변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로벨은 ‘괴물’의 목을 날리지 못했다. 평소 쪼개고 뭉개던 괴물이 아니었다.
“요, 요정?”
모닝스타도 놀란 듯 급히 제동을 걸었다. 허풍쟁이를 깔고 앉은 요정이 불쾌한 듯 팔짱을 끼었다.
“그럼 그쪽은 동물인가요? 아니죠? 종족으로 정체성을 구분하고 싶은 거면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세요!”
로벨이 아는 요정과 확실히 달랐다. 키가 사람만하고, 피부가 초록색이며, 낯뜨거운 나체였다. 로벨은 갈 곳 잃은 아론다이트를 휘저으며 정정했다.
“음... 레이디?”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요정이 아닌 요정이 더욱 불쾌해 했다.
“또 틀렸어요! 우린 드라이어드에요!”
솔직히 요정이든 드라이어드이든 알 바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로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지의 존재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