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자기소개
로벨에게는 수많은 기사가 있었다.
볼탄 반도 기사 중 최소 절반은 로벨에게 충성하니, 그 숫자가 못해도 300명은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로벨을 따르는 기사가 몇이나 될지는 미지수였다. 권력을, 직위를,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주종 계약이었다. 국왕의 임명장만 있으면 어린 집사 말대로 개나 고양이한테도 충성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에릭 프란시스 통치시절 드러났으며, 죽은 자의 왕과 싸울 때도 증명되었다.
“내 기사가 되겠다고 했소?”
로벨은 ‘늑대성’이나 ‘로드릭 가문’이 아니라 ‘로벨 로드릭’에게 맹세하는 기사가 신기했다. 막상 닥치면 어떨지 모르지만, 이론적으로 보자면?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로벨이 옛 신의 교회에서 파문당하거나 공작위를 박탈당해도 계속 충성해야 했다.
“자작의 허락은 받았소?”
“제가 떠나면 기꺼워할 겁니다.”
정통성을 따지면 몰트 도너반 경이 영주에 가까우니, 존 도너반 자작 입장에서 내심 떠나주길 바랄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로벨이었다. 로벨은 비밀이 많아 낯선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았다. 호른 경을 옆에 두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로벨이 갈등하자 몰트 경이 자기를 소개했다.
“공작님 앞에서 밝히기 부끄러운 무용이나 검은 숲 토벌에 여러 번 참가했습니다. 원하시는 것을 찾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거부하기 힘든 자기 P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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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우선 검은 숲 탐사까지 함께하고, 그 이후 일은 그 이후에 정하기로 했다. 몰트 도너반 경은 일종의 시험으로 받아들였다. 전 재산을 털어 장만한 갑옷과 말을 번쩍번쩍 닦아 여행준비를 마쳤다. 성(城)과 가문을 잃고 살 길을 찾느라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당일이 되었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가 고, 공작님이 계신 곳이 맞나요?”
로벨은 허름한 테이블에 앉아 컨틀렛의 속가죽을 쪼이다가 햇살을 등진 손님을 보았다. 여관주인은 마녀의 감시 속에 도시락을 싸는 중이고, 부인과 딸아이는 여물을 주러 나간지라 황량한 까마귀 여관에는 로벨 혼자였다. 로벨은 하루 치 장사를 공친 여관 식구를 위해 작은 봉사를 실천했다.
“어떤 공작을 찾는데?”
로벨의 친절한 접대에 손님은 그만 당황했다.
“공작님이 여, 여럿인가요? 그, 그러면 안 되는데... 저, 저어, 검은 숲에 가시는 공작님을 뵈, 뵙고 싶어요.”
유라피아 대륙이 아무리 넓어도 검은 숲을 가는 공작님이 2명일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손님의 정체를 추리했다.
“존 도너반 자작이 보냈어?”
“존 도너... 헉! 마, 맞아요! 영주님이 보내서 와, 왔어요!”
손님은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버릇인지 자꾸 말을 더듬었다. 로벨은 자세를 고치고 편히 말하게 도와주었다.
“내가 로벨 로드릭 공작이야. 용건을 말해.”
“어? 어? 기사님이 공작님이에요?”
로벨이 어리고 곱상하여 종종 놀라곤 했다. 그러나 손님 또한 살아온 세월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로벨의 낯선 손님은 올해 갓 성인식을 치른 듯한 소년이었다. 수전증이 있는 부친이나 눈이 침침한 모친이 잘라준 듯 삐뚤삐뚤한 머리와 찬바람이 거침없이 파고드는 낡아빠진 리넨 튜닉이 가난한 농민의 전형이었다.
“저, 저는 케네디라고 해요. 공작님을 바, 바람 언덕으로 안내하라는 말을 드, 듣고 왔어요.”
“바람 언덕?”
“검은 수, 숲에 있는 곳이에요. 야, 약초가 많이 나요.”
로벨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말 더듬는 것은 그냥 습관이야.’ 억지로 지은-그래서 은근히 무서운- 미소를 치웠다.
“숲 속에 언덕이 있어?”
“검은 숲은, 아주, 아주 커요. 강도 있고, 산도 있고, 바, 바다도 있어요.”
“북해에 닿아 있으니까 바다야 있겠지...”
아무튼 길잡이는 많을수록 좋았다. 기사가 아니니까 부리기도 편했다. 로벨은 두 번째 일행을 쉽게 환영했다.
“말 있어?”
“다, 당나귀는 있어요! 비, 비루먹은 녀석이지만...”
“한 마리야? 그럼 됐어. 그거 가져가면 집안일은 어쩌려고? 내 수레에 태워줄게.”
“저, 저어! 먹을 것도 가져와야...!”
“네 몫까지 챙길게. 그거 말고 또 있어?”
로벨은 늑대성의 영지민 대하듯이 했지만, 그런 영주를 만나본 적 없는 까마귀 성의 농민 소년은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지방의 공작이라 들었는데, 상상한 것보다 멋지고 친절해서 몹시 기뻤다. 때맞춰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영주님, 출발준비가 끝났습니다요.”
로벨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럼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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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계곡 위로 올라 서쪽길을 밟았다. 까마귀 마을을 경유하는 대다수 상인과 여행자가 동쪽-볼탄 반도 북부대로로 가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남다른 여정이었다.
“야! 야 이 녀석아! 저리 좀 가!”
“아니, 왜 우리 꼬마 손님한테 소리쳐요?”
“소리칠 만하니까!”
따지고 보면 구성원도 남달랐다.
전신을 감싸는 최고급, 최신형, 최첨단 풀 플레이트 아머의 기사가 둘이나 있고, 고깔모자를 목 뒤에 걸고 떡갈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는 마녀가 있으며, 노련미가 철철 넘치는, 그러나 지금은 마부와 말구종 노릇하는 용병이 둘이고, 그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농민 소년이 하나였다.
허풍쟁이는 농민 소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기사 나으리야 그렇다쳐도, 저 꼬맹이는 왜 데려가는 거지?”
“까마귀 성 영주가 보냈으니까.”
“진짜 영주가 보낸 건지 확인도 안 했잖아? 저 자식, 혹시 우리 기사 나리한테 빌붙으려고 사기 치는 거 아니야?”
“그럴 꼬마 같진 않다.”
“아니야. 아니야. 나도 저 나이 때 행상인한테 빌붙어서 몰래 털어 먹었다니까. 요즘 얘들은 더 영악해서 뭔짓을 할 지 몰라.”
“...요즘 얘들도 행상인을 털 것 같진 않다.”
허풍쟁이는 신원이 불분명한 케네디를 경계했다.
“이름도 이상하잖아. 케네디(Kennedy:삐죽삐죽한 머리)라니? 그건 게릴족 말이잖아?”
“어른 중에 게릴족이 있겠지.”
반면,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보다 어린 케네디를 좋아했다. 머리를 빗겨 이와 벼룩을 털어내고, 상자 덮개를 잘라 망토를 입혀주었다. 성(性)에 눈을 뜰 나이인 케네디는 자꾸 만지작거리는 마녀가 쑥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오해와 편애하고 무관하게, 케네디는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쪽으로 가, 가시면 안 되어요. 이쪽에, 이쪽에 무서운 괴, 괴물이 있어요. 기, 기사님들이 여럿, 여럿 죽었어요. 정말 위, 위험해요.”
허풍쟁이가 답답한 듯 가죽 흉갑을 두드렸다. 하지만 참을성이 좋은 로벨은 끝까지 경청한 후 되물었다.
“무슨 괴물이야?”
“기사님이 트, 트롤이라고 했어요.”
로벨은 짧게 한숨을 뿜었고, 허풍쟁이는 코웃음을 쳤으며, 과묵한 몬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같이 이상한 반응이라 몰트 경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오. 그냥 좀 지겨워서...”
용기도, 공포도 아니고, 귀찮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곰이나 사자가 더 무서웠다. 트롤이 곰보다 약한 짐승은 아니지만, 뭐랄까, 말 그대로 지겹게 죽여 보았다.
“죽은 자의 왕과 싸울 때 해치운 트롤이 두 자릿수니까요.”
마녀가 허리에 손을 얹고 '에헤엠!' 했다. 몰트 경이 의아해서 물었다.
“죽은 자의 왕이 무엇이냐?”
“음... 우리 도시를 습격한 거인이요. 오크랑 고블린이랑 트롤이랑 잔뜩 데리고 왔었어요.”
“거인? 오크와 트롤이라고?”
그 말대로라면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트롤 학살자라 불려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래도 괜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어. 다른 길은 없어?”
“제, 제가 가는 길이 있어요! 북쪽의 새, 샛길로 2시간쯤 가면, 고, 고목나무 아래 토굴이 있어요. 그곳에서 바,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서쪽으로 가면, 바람 언덕이 나, 나와요.”
“평소에 그리로 다녔구나?”
“예, 예, 하지만, 저기, 문제가 있어요. 구, 굴이 작아서 기사님이랑 말이 수, 숨지 못할 거예요.”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한번 만지고 말했다.
“내 말은 하프 유니콘이야. 숲에 풀어놓으면 아무도 잡지 못해.”
몰트 경과 케네디는 ‘유니콘’이란 소개에 입을 딱 벌렸다. 보통 사람이 유니콘이라 우기면 기꺼이 웃어주겠지만, 공작쯤 되는 사람이 유니콘이라 주장하면 쉬이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니콘-모닝스타의 생김새가 범상치 않았다.
‘거인을 해치우고, 트롤을 두 자릿수로 때려잡은 것도 모자라, 유니콘을 타고 다닌다고?’
몰트 경은 믿기지 않아서 한참 동안 주군을 바라보았다. 새삼 느끼는데,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것 같은 기사였다.
‘내가 대단한 주인을 섬기게 되었군.’
아직 섬겨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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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케네디의 안내를 받아 오솔길로 나아갔다. ‘여기서부터 검은 숲’이라는 표지판은 없지만, 어느 순간 저절로 검은 숲이란 것을 깨달았다. 공기가 무겁고, 바람이 스산해졌다.
“음기가 강해요. 꼭 묘지에 온 것 같아요.”
마법의 문외한이라 음기(Negative Power)가 뭔지 모르지만, 부정적인 의미란 것은 알았다. 허풍쟁이가 목을 긁적이고 물었다.
“어이, 꼬마야. 여긴 원래 이렇게 어둡냐?”
“뭘 뻔한 걸 묻고 그래요? 이름부터 ‘검은 숲’이잖아요.”
누가 지었는지 이름을 참 잘 지었다. 거짓말 좀 보태서 랜턴이 필요할 정도였다. 몰트 경이 길잡이 역할을 뺏긴 게 불안한지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늦가을이라 해가 비추는 시간이 짧습니다. 여름에 오면 좀 낫습니다. 낮이 가장 긴 성 요드레 축일이 되면 제임스 공작이 기사들을 모아 검은 숲 토벌작전을 시행합니다.”
“올해에도 토벌이 있었소?”
“예. 참나무 숲에서 떡갈나무 숲까지 행군하며 고블린 부락을 청소했습니다..”
마녀가 ‘청소’란 단어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몰트 경은 일개 하녀에게 관심 없었다. 로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체적인 작전과 군사규모를 늘어놓았다. 로벨이 군사학에 관심 많은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숲은 점점 어둡고 좁아졌다.
숲 속의 길은 짐승이 다니는 길을 숲지기와 약초꾼이 찾아 다듬은 것인데, 검은 숲은 숲지기가 없고 약초꾼이 숨어다니기에 야생 그대로였다. 1시간이 지나자 수레가 가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허풍쟁이는 투덜거리며 수레의 짐을 꺼내 ‘조랑말’과 나눠 들었다.
그리고 1시간이 더 지나자 말을 타고 가기 힘들어졌다. 로벨과 몰트 경은 기사 체면을 고이 접어 안장주머니에 넣고 도보로 이동했다.
“저 꼬마가 다니는 길이란 것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래도 확실히 몬스터는 없군.”
예정보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케네디가 말한 고목나무 토굴에 도착했다.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여기야?”
“예예...”
케네디가 부끄러운지 말을 흐렸다. 실물을 보니 토굴이란 이름도 매우 과장되었다. 그저 쓰러진 나무 아래 작은 공간이었다. 어른 두 명 들어가면 꽉 차는 수준이었다.
“이것도 없는 것보단 낫지.”
허풍쟁이는 화도 안 내고 풀썩 주저앉았다. 하루종일 굶으며 야생 그대로 숲을 걸었기에 대단히 지쳐있었다. 로벨은 허약한 중년 용병을 위해 크게 인심 썼다.
“간단히 챙겨 먹고 일찍 쉬어. 내일은 바람 언덕이란 곳에 올라 만드라고라를 찾아야 하니까.”
“으으... 기사 나리를 수년간 따라다녔지만, 이번이 최악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조금 아껴두는 게 좋았을 것이다. 진짜 최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