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48화 (348/605)

348화. 암투

까마귀 성 풍경도 몇 년 사이 많이 바뀌었다. 계곡 하류에 농경지가 새로 생기고, 물이 흐르는 곳에 목장이 들어섰다. 어린 양이 뛰어노는 광경이 퍽 아름다웠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계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였다. 굵은 밧줄을 수십 가닥 엮어 만든 견고한 줄다리로, 우마를 끌고 건너도 될 만큼 널찍했다.

“새 영주가 부지런한가 봅니다요?”

“응. 좋은 일이야.”

로벨은 까마귀 성으로 직행하는 줄다리를 보며 기꺼워했다. 예전처럼 가파른 계곡을 오르내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쉽게 다리를 건널 수 없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조랑말’이 줄다리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홍당무로 꼬시고, 모닝스타-짐승-로 혼내도 꿈쩍하지 않았다. 로벨은 짐승 대신 송구해 하는 과묵한 몬트를 위로했다.

“전부 갈 필요 없잖아? 두 사람은 아랫마을에서 목을 축이고 있어. 잠잘 곳도 구해놓고.”

그리고 금화 2닢을 쥐여 주자 좋아했다. 마녀는 자연스럽게 용병을 따라가다가 로벨에게 붙잡혔다.

“성에 가도 술 있어.”

“앗! 그런가요?”

“응. 영주의 성이잖아.”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손수 다리 위로 끌었다.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흔들리지만, 두 사람과 말 한 마리 정도는 까딱없었다.

“예전 영주님이 돌아가시고 처음이죠?”

“아니. 충성서약 때 만났는데...”

로벨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이... 존 도너반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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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성의 새 주인은 몹쓸 병으로 죽은 죠드 도너반 자작의 당질(堂姪) 존 도너반 자작이었다.

본래 성(姓)은 따로 있지만, 후계가 끊긴 도너반 가문의 종속을 위해 전-전대 영주의 양자로 입적해 족보상 죠드 도너반 자작의 동생이 되었다.

로벨은 ‘그래도 되나?’ 의아해했지만, 검은 숲에서는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존 도너반이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검은 숲에서는 젊은 기사가 요절하는 일이 잦습니다.”

로벨은 지역 단위 법률에 관여할 생각이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온 까마귀 성 풍경에 집중했다.

이곳은 죠드 도너반 자작을 처음 만난 까마귀 성 후원 테라스였다. 계곡 동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으로, 날씨가 좋으면 볼탄 반도의 오래된 성들도 보였다.

“만드라고라를 찾으신다고요?”

존 도너반 자작이 물었다. 몹쓸 병에 걸린 전 주인과 달리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로벨은 어색함을 삼키고 대답했다.

“석화병에 특효라 들었소. 혹시 본 적이 있소?”

존 도너반 자작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저도 이름만 들어봤습니다.”

“그렇소? 아쉽군.”

“혹 주군께서 원하시면 사람을 풀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해주시겠소?”

로벨은 자작의 협조적인 태도에 활짝 웃었다. 자작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솔직히 말했다.

“헌데... 고작 그런 일로 공작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작?”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영지민을 보살피는 일이 하찮다는 뜻이 아니라, 주군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입니다.”

로벨은 술잔을 잡고 뭐라 대답할지 고민했다. 시큼한 술맛에 인상을 찌푸린 마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석화병도 석화병이지만, 개인적으로 검은 숲에 볼일이 있소.”

“그 험한 곳에 말입니까?”

“칼을 가는 데는 때로 험한 숫돌도 필요한 법이오.”

마녀가 입술을 오므리고 감탄했다. 로벨 치고 그럴싸한 답이었다. 존 도너반 자작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주군이 하는 일을 캐묻는 게 예의도 아니거니와 마침 수행기사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영주님, 객실을 마련했습니다.”

죠드 도너반 자작의 조카 몰트 도너반 경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기사 종자였는데, 마침내 서임을 받은 듯 멋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로벨은 안면 있는 기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몰트 경, 잘 지냈소?”

몰트 도너반 경은 고개를 꾸벅이고 대답을 피했다. 정치적 감각이 아야와 이야카보다 나을 것이 없는 로벨이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기에 도너반 가문의 어떤 불화를 감지했다.

‘그러고 보니까 몰트 도너반 경이 더 가까운데?’

핏줄로 보면 몰트 도너반 경이 까마귀 성의 영주가 되어야 옳았다. 성씨가 다른 존 도너반 자작이 영주가 된 데는 로벨이 알지 못하는 모략과 암투가 있을 것이다.

존 도너반 자작은 몰트 경에게 물러가라 눈짓하고 말했다.

“쉴 곳을 마련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로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가로젓는 마녀와 별개 이유로 거절했다.

“내 사람이 아랫마을에 쉴 곳을 구했소. 그곳에 머물까 하오.”

“천한 것들의 마을에서 쉬시기는...”

로벨은 존 도너반 자작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한 것이 죄도 아니고, 병도 아닌데, 안 될 것이 무엇이오?”

“그러나 주군은...”

로벨은 마녀에게 가자고 눈짓했다. 술맛이 별로인 듯 냉큼 일어났다.

“내일까지 쉬고 모레 아침 검은 숲으로 출발할 것이오. 그때까지 알아낸 것이 있으면 연락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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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까마귀 성을 나와 계곡길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을 놓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레를 끌기 좋은 비탈길이었다. 여러 번 굽이져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예전에...”

로벨이 기억 저편에서 존 도너반 자작과 만남을 떠올렸다.

“예전에 도너반 가문 기사들이 충성맹세하러 왔었어.”

마녀는 관자놀이를 쥐어짜다가 포기했다.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와서 기억이 안 나요.”

로벨이 공작이 되었을 때, 볼탄 반도를 포함한 왕국 전역에서 기사들이 찾아왔다. 족히 300여 가문이 모였으니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로벨은 똑똑히 기억했다.

“기사와 기사 종자가 모두 왔는데, 몰트 도너반 경이 없었어.”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은 까마귀 성의 치부가 될 수 있었다.

계곡 아랫마을에 도착하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뛰쳐나왔다. 그사이 거하게 한잔 했는지 목까지 시뻘겠다.

“어이쿠! 기사 나리! 벌써 오셨습니까요?”

마녀는 낯선 술 냄새에 코를 벌렁거렸다.

“벌꿀주? 벌꿀주 마셨죠? 이 냄새는 벌꿀주인데?”

“여관 주인이 좋은 술을 추천했지! 으허헛! 그쪽은 멀쩡하오? 성에서 술을 안 주오?”

“맛대가리 없는 술을 개미 오줌만큼 줬어요.”

까마귀 마을은 전형적인 검은 숲의 시골 마을이었다. 가축의 배변으로 범벅된 흙길 좌우로 울타리가 구불구불 늘어섰고, 흙과 나무로 만든 단층짜리 집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멀리서 보면 목가적인 분위기의 따스한 산골 마을이지만, 가까이 가면 악취가 진동하는 변방 촌동네였다. 사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러했다.

“새로 지은 집이네?”

“지난해 인구가 늘었다고 합니다요. 북쪽에서 온 유랑민을 거둬들인 모양입니다요.”

로벨은 매끈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성격은 나빠도 능력은 있는 건가?”

“예? 누구 말씀입니까요?”

과묵한 몬트가 여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말을 했는지 여관주인 내외와 어린 딸아이가 모두 나와 귀하디귀하신 공작님을 향해 넙죽 인사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반응이 달랐다. 일자무식 무지렁이라도 ‘볼탄 반도 공작’쯤 되면 어떤 신분인지 이해하는 모양이다.

“소란 떨 거 없어. 평소처럼 장사해.”

로벨은 12살이나 됐을까 싶은 딸아이에게 마구간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백마 탄 왕자님(Prince)을 처음 본 산골 소녀는 귀가 시뻘개져서 고장난 꼭두각시처럼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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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밤은 유난히 길고 깊었다. 저녁 식사를 물리자마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루 장사를 공친 상인들과 한 뼘짜리 농지에 낫질을 마친 농부들이 목을 축이려고 여관에 찾아왔다. 로벨은 편히 마시라고 옆자리를 내줬지만, 험상궂은 얼굴로 중병기를 꺼내드는 용병들 탓에 불가능했다. 손님들은 어버, 어버버, 하다가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왜들 저래요?”

“...몰라.”

로벨과 마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볼탄 반도 공작이란 직함을 떼더라도, 기사, 마녀, 용병 조합이 어찌 보이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로벨은 맥주잔이 비자 심심한 지 칼집을 풀었다. 영험한 마법검이라 숫돌을 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종종 기름칠은 해주어야 했다.

귀한 손님이 칼까지 빼들자 여관주인의 근심이 깊어졌다. 이래서는 돈을 줄 테니 오라고 해도 뿌리치고 도망갈 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로벨을 무서워하진 않았다. 과묵한 몬트가 여관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영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로벨은 흐룬팅을 칼집에 넣고 일어났다. 왠지 그럴 거라 생각했다. 객실로 올라가지 않은 것도 지금 찾아온 ‘손님’ 때문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말울음소리가 들리고, 쇳소리가 들리고, 마룻바닥을 괴롭히는 발소리가 들린 후에 늦깎이 기사가 까마귀 여관 1층에 들어왔다. 까마귀 성에서 마주친 몰트 도너반 경이었다.

“낮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몰트 경은 대뜸 무릎을 꿇었다. 봉신 가문의 기사라 하나 과한 예였다.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벨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여관주인뿐이었다.

“일어나시오. 그리 하찮게 꿇을 무릎이 아니잖소.”

로벨은 허풍쟁이에게 눈짓했다. 눈치 하나로 중역이 된 용병답게 여관주인을 쫓아내고 여관문을 닫았다.

“내 앞에 앉으시오.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니.”

몰트 경은 주저주저하며 로벨 앞에 앉았다. 중장갑 기사가 마주앉자 안 그래도 좁은 여관이 더욱 좁아 보였다.

“이렇게 찾아 뵌 것은 혹시 모를 오해를 풀고, 감히 간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오해?”

“존 도너반 자작은 성실하고 유능한 영주입니다.”

로벨은 난데없는 칭찬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의 변화를 보니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시오?”

“혹여나 부당한 방법으로 작위를 차지했다고 오해할까봐 입니다.”

로벨은 한숨을 쉬었다. 비슷하게 맞추기는 했다.

“경의 몫을 빼앗은 게 아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까마귀 성 주인 자리에 욕심이 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귀족원에서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지키는 일이니 부끄러울 것 없소.”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검은 숲과 볼탄 반도, 그리고 포클랜드가 맞닿은 이 땅은 알량한 욕심으로 넘보기에 너무 큰 곳이었습니다. 죠드 도너반 자작이 저를 기사로 임명하지 않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몰트 경이 죠드 도너반 자작의 충성맹세를 전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22살이었다. 기사 종자로 지내기에 너무 많은 나이였다.

“존 도너반 자작은 다르오?”

“그의 정치수완은 전대 영주를 능가합니다. 공작님께 충성하는 한편, 제임스 공작과 자비에 후작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영지의 권리를 늘리고 있습니다.”

로벨 입장에서 불쾌할 수 있는 소리인데, 로벨이라 아무렇지 않았다.

“영주는 영지를 잘 다스리고, 경은 거기에 만족하니, 모두가 좋은 일 아니오? 그런데도 내게 청할 일이 있소?”

로벨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몰트 경은 답답한 듯 벌떡 일어났다. 과묵한 몬트가 워 해머를 반쯤 뽑았다. 그러나 불경한 일은 없었다. 몰트 경은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저를 로벨 로드릭 공작님의 기사로 삼아 주십시오!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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