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47화 (347/605)

347화. 정령

로벨을 따라가는 일행은 아주 단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울프 용병단 북군과 남군은 네일 공국 원정 이후 일제히 재정비에 들어갔고, 호른 경 이하 기사들도 추수기를 맞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어린 집사, 리암 수사, 페리 행정관 등은 깁스 자작령의 로드릭 시티의 안전과 깁스 작자령의 동향을 살피느라 하루가 부족했다.

룩(Rook) 떼고, 비숍 떼고, 나이트까지 떼고 나니까, 남은 것은 쫄 뿐이었다.

“쫄이라니요? 쫄이라니요!”

쫄병 키르케가 격렬히 반박했다.

“네가 가면 병원은 어떡해?”

“제가 안 가면 기사님은 어떡하게요?”

그건 그랬다. 로벨이 전설과 민담 중간쯤에 발을 담갔다 해도 마법은 문외한이었다. 눈앞에 만드라고라를 놓고 마음껏 가져가라 해도 뭔지 몰라 못 가져올 것이다.

“걱정 마세요. 닥터가 있으니까요. 수도원 학교 선생님이라 얘들을 잘 돌봐요.”

“그럼 다행이지만...”

로벨은 작게 한숨 쉬고 마녀 키르케를 쫄병으로 받아들였다.

마녀 외에도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 로벨의 충복을 자처하는 과묵한 몬트와 본업보다 시종 내지 말구종이 더 익숙해진 허풍쟁이 제이콥이었다. 어린 집사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고작 세 명으로 되겠어요? 최소한 열 명은 데려가야...”

“괜찮아. 괜찮아. 까마귀 성과 가시나무 성을 경유해서 갈 거니까.”

어린 집사는 검은 숲에 봉신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로벨이 직접 서임한 머를 브릭 자작은 믿을 만했다.

“여차하면 제임스 공작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 설마 모른 척하진 않겠지?”

“그리 도움 받아놓고 모른 척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죠.”

로벨은 빙그레 웃고 짐을 안장에 올렸다. 똑똑한 모닝스타는 짐 무게와 수행원 숫자를 보고 장거리 여행임을 알아챘다.

“컹! 컹!”

아야와 이야카는 잇몸을 뒤집고 히죽이는 모닝스타가 못마땅한 듯 빙 돌아 어미 늑대에게 다가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안장에 매달다가 꼬리 흔드는 늑대 남매를 발견하고 몸을 낮췄다.

“집 잘 지키고 있어. 집사 괴롭히지 말고. 금방 다녀올게.”

나이를 제법 먹은 늑대들은 예전처럼 소란피우지 않았다. 로벨의 손등과 뺨을 한번 핥은 후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기사 나리, 짐 다 실었습니다요!”

허풍쟁이가 수레 위에서 외쳤다. 한편, 짐말 대신 수레를 끌게 된 ‘조랑말’이 짜증 난 듯 푸르릉-거렸다. 과묵한 몬트가 달래고 있지만 성질 사나운 윈필드 산 전투마라 쉽지 않았다. 하지만 로벨이 모닝스타를 끌고 다가가자 언제 투정부렸냐는 듯 조용해졌다. 기사 중의 기사는 로벨이고, 전투마 중의 전투마는 모닝스타였다.

“그럼 출발하자.”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과묵한 몬트가 마부석에 앉고 마녀가 수레 짐칸에 올랐다. 허풍쟁이는 수레 뒤에 깃발을 꽂고 난간을 탕탕 두드렸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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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시원하며 집집마다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니 한해 중 가장 행복한 한가을이었다.

부지런한 나무들은 형형색색 단풍잎으로 꽃단장하였고, 영리한 짐승들은 곧 다쳐올 겨울을 대비해 배불리 살을 찌웠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는 인간들은 가진 것이 많아 시끄러웠다.

“내 비스킷! 으앙! 내 비스킷 누가 먹었어요!”

“거, 야영하면서 니꺼 내꺼가 어디 있소?”

“저쪽에 비스킷이 자루채로 있으니까 찾아보시오.”

“저기 있는 거랑 달라요! 내꺼는 앞뒤로 한 번만 굽고 꿀을 바른 거라구요!”

“...치사하게 자기 것만 그렇게 챙겼소?”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는 돌덩이 같은 쉽 비스킷을 내려다보고 한숨 쉬었다.

마녀 키르케가 용의자 1호와 2호를 심문하는 사이, 로벨은 빈 그릇을 치우고 진범을 찾아갔다.

“네가 훔쳤지?”

“푸르릉-!”

모닝스타가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냈다. 비스킷 조각이 잔뜩 끼어 있었다.

“재주도 좋아.”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빗기고 짐을 내렸다. 그리고 아직 티격태격하는 마녀와 용병들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허풍쟁이가 생으로는 못 먹을 비스킷을 치우고 지도를 꺼냈다. 고급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로, 포클랜드 지리학회가 발행하고 볼탄 반도 상인들이 인정한 명품이었다.

“에... 점심에 여우고개를 지났으니까, 하루만 더 가면 까마귀 협곡이 나옵니다요.”

“벌써? 북부대로도 안 지났는데?”

“헨리 피터 상회장의 비밀 지름길입죠. 북부대로를 걸치지 않고 바로 포스트 포레스트로 넘어갑니다요.”

“그래? 그렇게 좋은 길인데 왜 아무도 몰라?”

“이 길을 찾을 만큼 영주님 마을이 발전한 게 아니었고, 그리고 소문이 안 좋아서 그렇습다요.”

“...소문?”

“밤에 괴물이 나타난다고 합니다요.”

“히익-!”

마녀 키르케가 기겁해서 지팡이를 끌어안았다. 시선이 잠깐 모였다가 흩어졌다.

로벨은 안장에 걸어두었던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모포 옆에 두며 물었다.

“고블린 같은 거?”

“그런 건 아니굽쇼. 귀신이나 요정 같습니다.”

로벨은 ‘그래?’ 한 마디하고 잠자리를 살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도 아니고, 여행자를 놀래키는 괴물이면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런 것을 무서워하면 여행 못 다녔다.

하지만 마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아쿼버스를 꺼냈다. ‘어느 나라에서는 귀신한테 대포가 직빵이라 하던데...’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가 허겁지겁 뜯어말렸다. 귀신은 안 무서워도 총알은 무서웠다. 로벨 역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마법사가 괴물을 무서워하면 어떡해?”

“그거 편견이에요! 마법사가 무슨 괴물 조련사도 아닌데...”

“헨리 상회장이 자주 다녔다잖아. 괜찮을 거야. 그 총만 치우면 말이야.”

마녀는 입술을 삐죽이고 살인병기를 치웠다. 그렇게 로벨과 수행원은 이틀째 일정을 마무리했다. 아니, 마무리하려고 했다. 간밤에 찾아온 ‘괴물’이 아니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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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새벽녘에 눈을 뜬 것은 마녀의 요란한 코골이 때문도, 허풍쟁이의 지독한 이갈이 때문도 아니었다. 모닝스타의 구슬픈 울음 때문이었다. 로벨은 모포 속에서 가만히 생각했다.

‘말이 저렇게도 우는구나.’

그리고 비몽사몽한 정신이 돌아왔다. 로벨은 벌떡 일어나 흐룬팅을 잡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뱀, 늑대, 도적, 화재, 기상이변 등을 추리한 후 마지막에 허풍쟁이가 말한 괴물을 떠올렸다. 마지막이 정답이었다.

불이 꺼진 모닥불 위로 주먹만한 광구(光球)가 떠돌았다. 별빛이라 하기는 너무 가깝고, 반딧불이라 하기는 너무 컸다.

“...저게 뭐야?”

“아, 일어나셨습니까?”

불침번을 서는 과묵한 몬트가 대답했다. 로벨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혼자 추리했다.

“윌 오 위스프? 아닌가? 바다가 아닌데?”

정답은 로벨을 따라 잠에서 깬 마녀가 알려주었다.

“어? 스프라이트(Sprite)네요?”

“스프라이트? 요정이야?”

“요정 비슷한 거예요. 정령이라고 해야 할까요?”

“요정과 정령이 뭐가 달라?”

“근본적으로는 비슷해요. 음. 이렇게 말하면 옛 신이나 고블린이나 다 비슷한 게 되지만요.”

마녀는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귀신은 무섭지만 정령은 안 무서운 모양이다.

“요정이나 정령이나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태어나요. ‘누가 꽃잎에 물을 줬을까?’, ‘누가 나뭇잎을 붉게 물들였을까?’ 이런 호기심이 요정을 부르고 정령을 만들어요.”

로벨은 억지로 이해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나쁜 건 아니지?”

“나쁜 건 아닌데, 조금 이상해요.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움이 많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로벨은 흠칫했다. 꼭 짚어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늑대의 왕 이후 유난히 인지의 존재와 자주 마주쳤다. 마녀가 하품하고 다시 침낭에 누웠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해가 뜨면 사라질 거예요.”

로벨은 쉽게 볼 수 없는 신비에도 무심히 잠을 청하는 마녀가 신기했다.

“그리 호들갑 떨더니, 안 무섭나봐?”

“스프라이트는 괜찮아요.”

“귀신은?”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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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라이트는 아침 해가 뜨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요정의 축복일까, 정령의 가호일까, 뭉게구름 조금 낀 화창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로벨은 졸린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활짝 켰다. 잠을 설쳤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정령의 힘 같았다.

“으으... 죽겠구먼...”

반면, 초번 근무를 서고 새벽 내내 푹 잔 허풍쟁이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눈 밑이 퀭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꾀병이 아니었다.

“까마귀 성에 도착하면 하루 푹 쉬게 해줄게.”

로벨의 위로에도 허풍쟁이는 뚱했다.

“소설 속의 모험가가 왜 10대와 20대인 줄 아십니까요?”

“왜?”

“30살이 넘으면 하루밤 자는 거로 피로가 안 풀리기 때문입니다요.”

그럴듯했다. 허풍쟁이 나이는 숙취만 이틀이 가는 나이였다.

‘가만? 나도 이제 30대인데?’

로벨은 세월의 무심한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 허풍쟁이의 뚱한 표정이 ‘기사 나리도 금방 알게 될 겁니다요’처럼 보였다.

로벨 일행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중요한 일정을 위해 출발했다. 검은 숲과 볼탄 반도의 경계이자 북부대로의 시작점인 까마귀 협곡이 코앞이었다.

앞서 수차례 방문한 까마귀 협곡이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가을이 무르익은 풍경 탓도, 수레 뒤에서 꾸벅꾸벅 조는 허풍쟁이 탓도 아니었다.

“왜 이리 사람이 많아?”

협곡을 통과하는 북부대로 관문에 인파가 가득했다. 봇짐을 안고 한숨 쉬는 농민, 수레를 끌며 소리치는 상인, 말 위에서 언짢아하는 기사 등등... 로벨이 거듭 감탄하자 허풍쟁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겨울을 앞둔 대목이잖습니까요. 추수제 기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전에 왔을 때는...”

“아이쿠, 그때는 전쟁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매번 전쟁 아니면 몬스터 때문에 방문했다. 평화로운 시기의 북부대로는 처음이었다.

“원래 이런 곳이었구나...”

“영주님, 어찌할까요?”

과묵한 몬트가 채찍을 말아 쥐며 물었다. 줄을 서서 통과하려면 한나절이 걸릴 것이다. 로벨은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리고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가자.”

로벨 일행은 인파를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새치기라고 화내는 사람은 없었다. 화를 내려다가 빛나는 로드릭 깃발을 보고 헛바람을 삼켰다. 볼탄 반도의 공작, 포클랜드의 후작,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 늑대성의 주인이자 까마귀 성의 주인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도너반 가문의 병사도 주인의 주인 되는 로드릭 가문 깃발을 알아보고 급히 통과시켰다. 마녀가 수레 짐에 앉아 높은 사람 놀이를 했다. ‘에헴! 에헤엠!’ 물론, 사람들의 시선은 꾀죄죄한 마녀가 아니라 근사한 갑옷의 로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저 사람이 로벨 로드릭 공작인가?’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군.’

‘저런 거물이 왜 이런 곳에...’

로벨은 호기심과 적개심과 탐욕이 뒤섞인 시선이 불편해서 바이저를 내렸다. 이것도 지난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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