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46화 (346/605)

346화. 해결

네일 공국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흐롤프 야를 및 족장들에게 잘 보인 기사들은 봉신 계약을 맺어 네일 공국에 잔류했다. 고향에 가 봐야 말먹이 값도 나오지 않으니 다소 척박해도 봉토를 받기를 희망했다.

로벨 역시 소득이 있었다. 가깝게는 울프 용병단 1년 치 급료를 벌었고, 다소 멀게는 네일 공국의 국경 문제를 해결했으며, 거시적으로는 악마추종자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냈다.

하지만 로벨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이 신이 나서 술집으로, 사창가로 뛰쳐나가는 와중에도 집무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 집사는 뒤늦게 사춘기가 온 듯한 주인을 힐끔거리며 보고를 마쳤다.

“...이렇게 해서 급한 불은 껐어요. 이안 선장도 돌아왔고, 북부대로도 안정되었으니까, 한동안 숨통 좀 트일 거예요.”

로벨은 복잡한 숫자를 흘려들었다. 수학천재답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악마추종자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벨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동무에게 물었다.

“집사, 집사? 집사는 내가 뭐로 보여?”

어린 집사는 보고서를 정리해서 굵은 실로 묶었다. 지하 창고에 3년 정도 보관하다가 로드릭 가문이 후원하는 검은 바위 수도원으로 이관할 것이다. 쪼들리는 살림살이에도 매년 성금을 보내는데, 문서관리 정도는 해주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영주님이요? 영주님이요.”

“그거 말고.”

“음... 로드릭 가문의 당주? 늑대성의 주인? 볼탄 반도 공작? 그랜드 챔피언?”

“그건 ‘로벨 로드릭’이잖아. 나 말이야. 나.”

로벨은 엄지로 가슴을 가리키며 거듭 물었다.

“영주님이 영주님이지 뭐가 뭐에요? 왜 그러는데요? 용돈이 모자라서 그래요? 에잇! 큰일 하고 오셨는데 인심이다! 얼마 필요해요? 8페닝? 10페닝?”

“...액수가 왜 그래? 아니, 그거 말고! 정말 내가 누구냐니까? 아, 그렇지. 내 진짜 이름을 말해봐. 까먹은 거 아니지?”

어린 집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본명이었다.

“영주님, 정말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내 이름을 한 번만 불러봐”

“그야 어렵지 않지만... 영주님의 본명은 ㄹ...”

“기사님! 기사니임-! 큰일이에요! 큰일이 났어요!”

그때, 마녀 키르케가 방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왔다.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영주의 집무실에서는 특히 예의 없었다. 하지만 영주와 집사는 화내지 않았다. 마녀의 품에 안긴 갓난아이 때문이다.

손을 뗄 수 없어 발로 찬 것은 두 번째나 세 번째로 고려할 사항이었다. 우선 마녀가 갓난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에 집중했다.

“어? 뭐야? 뭐야?”

로벨과 어린 집사는 진부한 생각을 먼저 떠올렸다. 비밀 결혼, 숨겨둔 아이, 내연남의 어린 자식...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 병원에 찾아온 아이에요!”

마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닥터 줄리안과 갓난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함께 왔다. 마녀처럼 뛰어올 체력과 용기가 없어 성 밖에서 초조하게 발만 굴리고 있었다.

로벨은 창밖의 무리를 힐끔 보고 갓난아이에게 집중했다. 이제 1살이나 되었을까, 생존을 위한 행위 중 태반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생물이었다. 로벨은 무심코 손을 뻗다가 움찔해서 멈췄다.

‘내가 만져도 되나?’

악마추종자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마녀가 아이를 감싼 포대를 치우고 얼굴과 가슴이 보이게 꺼냈다. 로벨만큼이나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피, 피부가 왜 이래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들으면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인데, 과장은 아니었다. 로벨도 갓난아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의 절반, 그리고 가슴과 어깨가 시꺼먼 딱지로 덮여있었다.

“인간이 아니야?”

“아니에요! 인간 맞아요! 이건 석화병(石化病)이에요!”

“석화? 돌이 되는 병이라고?”

“진짜 돌은 아니고, 이렇게 피부가 점점 딱딱해져요. 그리고 몸 안쪽까지 딱딱해지면...”

심장, 폐, 위장, 간... 어느 것이든 딱딱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죽어?”

“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오래 못 살아요.”

로벨과 어린 집사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호, 혹시 전염병인가요?”

“어른은 괜찮아요. 하지만 10살 이하 아이들한테 위험해요. 그래서 가짜 마법사들은 요정의 저주라고 떠들죠.”

“어디서 발병한 거야?”

“깁스 자작님이 다스리는 북쪽 마을에서요. 우리 병원에 온 것은 이 아이 하나인데, 아이 부모님이 말하길 그쪽 얘들은 대부분 병에 걸렸데요.”

“깁스 마을이면 여기서 하루거리잖아요!”

남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어깨를 두드려 정신 차리게 했다.

“진정하고 펄프 대장, 리암 수사, 페리 행정관, 그리고 찰드 촌장을 불러와.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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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돌면 나름의 행동요령이 있다.

외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걸어 잠그고, 옛 신의 교리에 반하는 불경한 것을 태우고, 사제를 불러 축복 받은 다음, 병자와 병자의 가족을 격리, 혹은 추방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요! 저 환자 가족을 쫓아내고 성문을 닫아야 합니다요!”

찰드 촌장은 전례대로 행동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옛 신의 자비로움을 실천하는 리암 수사와 에르나 왕국에서 대학과정을 밟은 페리 행정관이 반대했다.

“신체 건강한 성인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한곳에 모아 보호하고, 치료제를 찾으면 됩니다.”

로벨은 양쪽 의견을 모두 수용했다.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신실한 사제를 보내 달라 요청하고, 병자와 어린아이를 분리했다. 그리고 치료제를 찾기로 했다.

“치료제가 있긴 있어요?”

어린 집사가 초조하게 물었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였는데, 전염병이니 저주니 하는 것이 돌면 어찌 될지 몰랐다. 리암 수사가 옆에 있어 표현하지 않았을 뿐, 옛 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있어요. 아니, 음, 있긴 있는데... 그게 조금...”

“비, 비싸군요!”

어린 집사가 좌절했다. 마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싼 것보다 안 좋아요. 보통은 구할 수가 없거든요.”

마녀가 뜸을 들이자 기사, 집사, 수사, 학자, 촌장이 모두 답답함을 표출했다.

“그게 뭐요? 빨리 좀 말하시오!”

마녀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저주 받은 식물, 알라우네(Alraune)가 필요해요.”

“알라우네?”

“그러니까, 음, 만드라고라(Mandrak)요.”

직업과 연령이 다채롭게 모였지만,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마녀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석화병은 반은 질병이고 반은 저주라서 일반적인 치료약은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반은 식물이고...”

어린 집사가 잡소리 치우라는 듯 손을 휘젓고 바로 물었다.

“그래서, 만드라... 뭐라는 것은 어디 가야 살 수 있는데요?”

“지금까지 뭐 들었어요? 돈 주고 못 산다니까요!”

“그래도 이름이 있으니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을 거 아니야.”

로벨이 직접 묻자 조용해졌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어요.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자라는 것이 아니니까요. 마법하고 비슷해요.”

로벨이 최근에 신경 쓰는 학문이었다. 그래서 금방 답을 맞힐 수 있었다.

“진짜 있는 곳이 아니라, 있다고 믿는 곳을 찾아야겠네.”

“어어? 맞아요! 와아! 기사님 똑똑해요!”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 등은 아직도 이해해지 못했다. 그래서 이해를 포기했다.

“만드라고라가 있다고 믿는 곳이 어딘데요?”

“흔히 비경(?境)이라 불리는 곳이요.”

“볼탄 반도에 그런 곳이 있나요?”

“몇 군데 있지만 좀 약해요. 식물이 자랄만한 곳도 아니고...”

로벨은 버팅거 호수의 푸른 늪지와 검은 산의 바위 동굴을 떠올렸다. 예로부터 전설이 많이 전해지는 곳인데, 사람의 발길이 자주 닿아 신비로움이 희석되었다.

“볼탄 반도에는 없지만, 이웃 지방에 있잖아.”

로벨이 새로운 장소를 제시했다. 너무 유명해서 반대로 곧장 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모두 한참 뒤에 이름을 떠올렸다.

“검은 숲이요?”

제임스 가문이 다스리는 북서쪽 땅을 흔히 '검은 숲 지방'이라 부르지만, 지리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면 ‘검은 숲 근처 평야 지방’이라 해야 옳았다. 실제 검은 숲은 깊고, 어둡고, 광활하여 사람이 살 수 없었다. 그곳의 신비로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시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것이 증거였다.

“그러니까 그만큼 위험하잖아요!”

“그러니까 만드라고라가 있을 수 있지.”

어린 집사는 로벨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도시 봉쇄, 경제 위기, 재정 적자 따위가 머릿속에 감돌았지만, 로벨이 검은 숲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보단 나았다.

“가만 생각하니까 찰드 촌장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전통은 신뢰할 수 있으니까 전통이 된 거죠. 우선 깁스 자작령으로 통하는 도로를 막고, 사제를 불러서 기도를 열심히 해봐요.”

“그걸로 안 되는 거 알잖아.”

로벨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솔직히 말해 석화병 때문만은 아니다.

“검은 숲에 정말 신비가 가득하면, 내가 꼭 가야 해.”

“영주님이 왜요? 그렇게 위험한 곳을 왜 가요?”

로벨은 다시 손을 내려다보았다. 병에 걸린 갓난아이를 만져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누군지 확인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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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에 차서 말했지만, 당장 검은 숲으로 출발하지는 못했다.

네일 공국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장거리 여행을 갈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깁스 자작령에서 도망 오는 환자와 환자의 가족을 보호해야 했다. 0살에서 9살 사이의 어린이를 데리고 온 가난한 농민들이라 마녀 키르케와 닥터 줄리안이 감당할 수 없었다.

“저 병자들을 도시에 들이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쩝니까요!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이 공포심이었다. 영지민이 감히 반발했다. 펄프 대장 이하 충성스러운 고참 용병들이 쌍심지를 켰으나 겁에 질린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로벨은 로드릭 영지의 아이들을 늑대성으로 불러 모으고, 임산부를 수레에 태워 가까운 수도원으로 보냈다. 영주와 사제가 있는 곳이니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한 곳이었다.

어린 집사는 밤새 울어대는 갓난아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야와 이야카는 겁 없는 꼬마들 때문에 구슬피 울었지만, 병마와 싸우는 환자에 비하면 큰 고통은 아니었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치료법이 연구되고 진행되었다. 마녀 키르케는 만드라고라와 유사하다고 알려진 약초를 구해왔고, 닥터 줄리안은 날카로운 돌칼로 박피술을 시도했다. 둘 다 큰 효과는 없었다.

“으아앙- 역시 만드라고라뿐이에요!”

석화병이 생긴 지 엿새째 되는 날, 마녀가 울상이 되어 찾아왔다.

로벨 역시 놀고 있지만 않았다. 어제 벼린 것처럼 날카로운 칼과 새것처럼 빛나는 갑옷을 준비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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