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뷔페
로벨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기사의 명예와 볼탄 반도의 안정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심각한 고민이었다.
‘저 둘을 죽이면...’
달콤한 유혹이었다. 실리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자-혹은 기회주의자-라면 고민할 것 없이 목을 치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러나 기사이자 귀족인 로벨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꼭 명예 때문은 아니었다. 우선 눈앞의 두목이란 자가 ‘진짜’ 악마추종자 두목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직업편견일지 모르지만, 마법사는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브로크 야를이 데려온 기사와 수행원이 스무 명이 넘었다. 숙적과 마주해 흉흉한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칼을 뽑으면 여러 사람이 다칠 것이다.
“주군.”
호른 경이 나직이 속삭였다. 주군(My Lord)이란 두 마디지만, 그 안의 떨림과 높낮이로 많은 것이 전달되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로벨이 두 악마추종자와 눈싸움하는 사이, 흐롤프 야를과 브로크 야를은 매우 야를 다운 태도로 협상에 응했다.
“내가 점령한 땅은 내 땅이오! 왜 토해내야 하는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시절부터 우리 브로크 가문의 땅인데, 어떻게 흐롤프 가문의 땅이 될 수 있소?”
“그리 대단한 땅이면 뺏기지를 말든가!”
“뭐라고? 하! 참나! 이 작자가 협상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이 작자? 이 작자라고 했냐? 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자식이... 마! 내가 니 애비랑 도끼밥 나눠 먹던 사이다!”
“그리 늙었으면 빨리 뒤질 일이지, 왜 아직도 살아 있소?”
“으으... 도저히 참을 수 없군! 니 애비 곁으로 보내주마!”
“그쪽이 뒈진 형님을 보는 게 빠를 거요.”
로벨은 문득 흑태자와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을 떠올렸다. 비웃기, 비꼬기, 빈정대기에 특화된 그 나라 화법도 골치 아프지만, 여기는 여기 나름대로 괴로웠다.
한동안 원색적인 단어가 오고 갔다. 칼과 도끼를 뽑지 않은 것은 참을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위에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패싸움을 우려하는 것은 로벨과 비슷했다.
“좋소. 좋아.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합시다. 주인이 바뀐 땅은...”
아무튼 확실한 것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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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안 될 거 같은데 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로벨과 호른 경은 그중 하나를 목격했다. 선대부터 이어진 숙적, 흐롤프 가문과 브로크 가문이 극적으로 협상에 성공했다.
브로크 가문이 3대 이상 다스린 땅은 돌려주되, 그에 합당한 재물을 3년에 걸쳐 받기로 했다. 네일 공국 귀족치고 상당히 합리적인 협상이었다.
이후 에르나 왕국에서 ‘뷔페’라 부르는 네일 공국식 연회가 열렸다. 첫날 겪었던 것처럼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양껏 퍼갔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도 당황하지 않고 어울렸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순간 원한을 잊었다. 최소한 잊은 척하거나 잊으려고 노력했다.
전쟁이 일상인 시대에 원한을 오래 간직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 피로 피를 씻으면 네일 공국은, 나아가 유라피아 대륙 국가들은 진작 멸망했을 것이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전쟁이 사업과 유흥의 경계에 있던 어둠의 시대’라 평가하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물론, 인간군상이 다양하니 모두가 대범한 것은 아니었다. 소심한 기사와 족장들은 자신의 꼴통을 부수려고 한 상대 기사, 피붙이를 살해한 적대 족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일 공국 기준으로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난 사내가 아니니까.’
로벨은 스스로 합리화한 후 류트 프란시스 공자를 열심히 째려보았다. 수상한 행동, 그러니까 무기를 보이거나 약병을 꺼내면 즉시 묵은 원한을 청산할 생각이었다.
“주군, 그만하고 좀 드시지요.”
호른 경이 닭고기를 통째로 가져와 로벨 앞에 놓았다. 일종의 ‘룰’에 어긋나지만, 고기를 받을 사람이 로벨 로드릭 공작임을 확인하고 관대해졌다. 그러나 로벨은 고기에 손대지 않았다.
“저들의 속셈을 알아낼 때까지 조심해야 하오.”
직접 거론하진 않았으나, 독을 걱정했다. 로벨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기사답지 못하다고 비웃을 수 없었다. 호른 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주방에서 조리하는 과정을 모두 보고 바로 가져온 겁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연회 중간부터 안 보이더니, 주방의 하인들을 감시하러 간 모양이다. 로벨은 과분한 충성심에 감격했다. 일찍이 이렇게까지 헌신하는 기사가 또 있던가.
“경이 그리 말하면...”
로벨은 식탐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 잔치에서 홀로 굶는 것을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호른 경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닭다리를 뜯어 하나는 호른 경에게 주고 하나는 자기 입에 넣었다. 호스트 노릇을 하던 습관이 있어 무심코 한 배려지만, 콩깍지가 두꺼운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호른 경은 닭다리를 우물우물하면 왜 안 받냐는 듯 갸웃거리는 로벨을 보고 웃음을 참아야 했다. 서른에 가까운, 그것도 키가 자기보다 큰 주군에게 할 생각은 아니지만, 너무 귀여웠다.
‘정말 안아주고 싶군.’
그러나 금지된(?) 사랑은 상상만 가능할 뿐이다. 차라리 주군의 아내를 사랑하면 사춘기 소년의 망상 가득한 기사 소설로 여길 수 있는데, 주군을 사랑하면 답이 없었다.
‘이제 정체를 밝히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것은 호른 경만이 아니었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자리배치에 변화가 생겼다. 흐롤프 야를과 브로크 야를이 아래로 내려가 족장들과 어울렸고, 자신을 제퍼슨 홀이라 소개한 악마추종자 두목이 상석으로 올라왔다.
“포비아 왕국의 영웅이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조력자를 이리 만나 뵈니 영광이오.”
닭다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지금 로벨의 표정을 보면 Yes였다. 로벨은 정말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제퍼슨 홀은 수줍은 듯-그래서 더욱 화가 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지만, 좋은 날이니 그러지 마시오. 그리고 본인을 죽인다고 바뀌는 것은 없소.”
“어째서?”
“저 미련한 야를은 자기 기준에서 본인을 수장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나, 우리 ‘진리탐구회’는 이름 그대로 진리를 찾는 자의 모임이오. 본인은 일개 회장일 뿐이지. 본인이 죽으면 회원 중에 한 명이 새로운 회장이 될 뿐이오. 저기 류트 프란시스 공자도 유력한 차기 회장감이라오.”
“저런 자가? 그 집단 수준을 알만 하군.”
호른 경이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제퍼슨 홀은 두 손을 살짝 내밀어 겁먹은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마시오. 따지고 보면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우리니까, 우리가 더 경들을 미워해야지 않소?”
이로써 볼탄 반도의 전쟁과 주변국의 혼란을 주도했다고 자백했다. 그야말로 악(惡)이고 인류의 적(敵)이었다.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세 가지 이상 가져와. 하나하나가 중요한 이유여야 할 거야.”
그랜드 챔피언의 말이란 것을 고려하면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우주에 감춰진 위대한 신비, 인간의 정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저 위의 파라다이스부터 저 아래의 드림월드까지 수많은 차원의 비밀 등등. 실로 다양한 이유가 있으나, 경께서 납득할 이유는 아닐 거요.”
“그럼 왜 내 앞에 나타났지? 내 인내심을 실험하려고?”
이정도면 사형선고에 가까웠다. 제퍼슨 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이오.”
“호기심?”
“우리가 하는 연구를 족족 박살내는, 사전적인 의미로 악마 같은 기사가 어찌 생겼는지.”
악마추종자가 악마 같다고 하니까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한데, '사전적인 의미'란 단서가 붙은 것을 보아 욕에 가까운 듯했다.
로벨이 한 박자 반 늦게 깨닫고 으르렁거리자 제퍼슨 홀은 껄껄 웃었다.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리고 제안할 것도 있다오.”
“제안? 처형 방법 말이야?”
“오, 재미없는 볼탄 반도 귀족치고 제법 웃겼소.”
“넌 잉그비아 왕국 범죄자치고 건방져.”
제퍼슨 홀은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과 몸짓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악마추종자란 것을 모르고 만났으면 호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실제로 악마추종자란 마이너 직업에 관심이 없는 네일 공국 사람들은 제퍼슨 홀에게 호의적이었다.
“우리와 손잡읍시다.”
제안이란 것이 훅 들어왔다.
“나보고 악마추종자가 되라고?”
“어허, 그럴 리가 있소? 이미 악마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악마를 추종하라니...”
“내가 악마라고?”
“물론, 우리는 악마란 호칭을 좋아하지 않소. 그저 인지의 세계에서 태어난 허상의 생물일 뿐인데, 멋대로 만들고 멋대로 구분 지어 누구는 신이고, 누구는 천사고, 누구는 악마라 정의하는 게 우스운 일이...”
“그만. 잡소리 그만해. 나를 모욕하는 거면 브로크 야를과 무관하게 너를 죽일 거야.”
로벨이 닭다리를 던지고 흐룬팅을 잡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챈 참석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제퍼슨 홀은 한 걸음 떨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인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로벨 보고 신경 쓰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아까처럼 말을 휘둘렀다.
“아직도 자신이 인간이라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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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는 밤새도록 계속되었지만, 로벨은 적당할 때 적당한 핑계로 길드 홀을 빠져나왔다. 참석자 대부분이 멱을 따도 모를 만큼 취해 있어서 거창한 핑계는 필요 없었다.
사흘 전만 해도 상대방 머리에 도끼를 못 꽂아서 안달이던 사람들이 십년지기처럼 웃고 떠드는 게 신기했다. 잘린 손목을 흔들며 ‘그쪽이 이렇게 만들었잖소! 우하핫!’ 하는 광경은 거친 삶을 살아온 기사라도 쉽게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해할 수 없어.’
네일 공국도 이해할 수 없고, 제퍼슨 홀의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벨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못 쬐서 하얬다. 하지만 귀부인처럼 곱지는 않았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하고, 손가락 마디는 울퉁불퉁했다. ‘진짜’ 로벨이 죽은 후 15년 동안 칼을 휘두른 손이었다.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지?’
필립 로드릭의 말괄량이 막내딸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옛 로드릭 마을의 영지민도 ‘영주님께 아가씨가 있었지 않아?’, ‘응? 그랬던가?’ 하는 대화를 나눌 정도였으니, 외지인과 이주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가 아니게 되다니...’
로벨은 주먹을 쥐었다. 로벨 로드릭으로 살아왔지만, 로벨이 아니다. 세상의 절반이 로벨 로드릭을 칭송하지만, 그 로벨은 로벨이 아니다.
‘인지의 존재...’
마녀 키르케가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무밑동도 의자라고 믿으면 의자가 되고, 왕의 옥좌도 잡동사니라 생각하면 잡동사니가 되었다. 실체는 인지할 때 존재하니, 인지하면 그것이 곧 실체가 되었다. 로벨은 그러한 존재들을 오랫동안 보아 왔다.
“내가... 마도의 수호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