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두목
로벨의 명령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전선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일원화되지 않은 명령체계 때문이다. 적게는 7~8명, 많게는 20~30명씩 각자 부대를 이끌고 참전한 족장들이라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는 개별적인 명령을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흐롤프 야를을 비롯한 네일 공국 귀족들이 로벨을 견제했다.
흐롤프 야를의 군대가 총 4천이라 해도 앞서 말했듯 통일되지 않은 군대였다. 로벨이 이끄는 울프 용병단 400명은 단일 부대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게다가 싸우는 족족 승리하며 전공을 쌓으니 견제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속이 좁은 어떤 치프는 공을 세우지 못하게 거짓 정보를 뿌린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주먹구구식 부대 운영과 귀족 특유의 똥고집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탁-! 타닥-!
시작은 소리였다. 마른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흐롤프 야를의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도끼로 찍고 칼로 후비니까 나무가 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벽을 이루는 통나무 하나가 기울어지기 전까지 말에다.
“어어? 어엇!”
이변, 아니, 괴변의 첫 번째 피해자는 사다리 끝에 간신히 오른 젊은 전사였다. 통나무 하나가 어린아이의 유치(乳齒)처럼 흔들렸다.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상황판단이 빠르면 사다리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전사는 성벽이 저절로 무너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통나무 성벽이 붕괴되어 와르르- 쓰러질 때까지 사다리에 매달려 있었고, 이후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이... 무너진다?”
정확히 말하면 성벽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태풍에 꺾이는 갈대처럼, 농부가 낫질하는 밀짚처럼 차례로 넘어갔다. 성 안쪽으로 넘어가는 통나무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성 밖으로 쓰러졌다. 대참사였다.
성벽 아래에는 약 1천의 흐롤프 야를 병사가 공격을 위해 모여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여 ‘있었다.’
구속에서 해방된 수십, 수백 개의 통나무가 언덕길을 따라 굴러 내려왔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으나 중력 가속도보다 빠를 수 없었다. 어떤 병사는 방패를 들어 몸을 보호했다. 도망가는 것보다 멍청한 짓이었다. 방패와 함께 뭉개졌다.
“옛 신이시여... 성벽을 무너뜨려서 공격한다고?!”
흙먼지가 화산재처럼 오딘의 방패를 덮었다. 깜깜한 재해 속에서 비명만 아련히 울렸다. 확실하지 않았다. 나무가 구르고 부러지는 소리가 수백 배 더 컸다.
로벨은 차마 참사를 볼 수 없어 파나케아 투구를 벗었다. 계속 놀라고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애꾸눈을 발로 차고 갈 곳 잃은 칼을 좌우로 휘둘렀다.
“후퇴! 후퇴한다! 부대를 700야드 뒤로 물린다! 호른 경, 흐롤프 야를에게 가시오! 혹여나 생존자를 구하겠다고 하면 기절시켜서라도 막으시오! 지금은 물러나야 하오!”
호른 경은 군례를 생략하고 전투마에 올라 달려갔다. 겉은 거칠지만 속은 선량한 기사가 따져 물었다.
“저, 저들을 그냥 두고 말입니까?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안 되오! 오히려 피해가 커질 것이오! 그리고 적의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
와아아아- 와아아-!
죽여라- 죽여라-!
로벨의 말이 끝나기 전에 요새-라고 불리던 곳-에서 브로크 야를의 군대가 뛰쳐나왔다. 성벽의 잔해가 깔린 곳을 피해 우회하느라 바로 전투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어물쩍거릴 시간이 없었다.
“애꾸눈! 발가락! 700야드 후방에 방어진을 구축해! 기사들은 말에 오르시오! 시간을 벌어야 하오!”
로벨은 등자도 밟지 않고 날듯이 모닝스타 안장에 올랐다. 그 모습에 넋 놓고 있던 기사들이 허둥지둥 자기 말을 찾아 흩어졌다. 시동을 부르거나, 그조차도 시간이 아까워 직접 뛰어가 무기와 말을 챙겼다.
로벨은 모닝스타가 최고의 컨디션을 낼 수 있게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며 근육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가장 둔한 기사까지 빠짐없이 모인 것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아군이 철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오! 돌격! 돌격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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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딘의 방패’ 공방전은 로벨 로드릭 연합군의 패배였다. 요새를 함락, 정확히는 파괴했으니 승리라 자위하는 기사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참패였다. 전사자가 700명이 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검둥이 짓이 아니오!”
흐롤프 야를이 숨 쉬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검은 것에 민감한 울프 용병단 흑인 용병이 움찔했는데, 흥분한 야를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검둥이?”
“브로크 가문의 검은 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호른 경이 눈치껏 귀띔해주었다. 로벨은 ‘아하?’ 소리 내었다. ‘그럼 흐롤프 가문의 붉은 용은 빨갱이인가?’ 어느 쪽이든 어감이 좋지 않아 그만두었다.
“브로크 가문의 망나니 놈. 그놈은 내가 잘 아오! 지 애비만도 못한 놈이지! 똥 같은 놈이오! 아니, 똥보다 못한 놈이오! 그런 잡놈이 저런 잔악한 수를 생각해 냈을 리 없소!”
로벨은 브로크 야를을 본 적 없어 똥보다 못한 것이 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잔악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일 거요.”
“류트 프란시스? 프란시스? 볼탄 반도의 주인 가문 말이오?”
흐롤프 야를은 흥분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동맹이 누군지 잊을 만큼 말이다. 호른 경 이하 로벨의 기사들이 일제히 불쾌함을 표시하자 흐롤프 야를은 움찔해서 변명했다.
“옛날, 옛날의 주인이었던 가문 말이오. 험험. 지금은 로드릭 가문이지.”
로벨은 야를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아진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것보다 무슨 수로 멀쩡한 성벽을 무너트렸는지 궁금하오. 그 기술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으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파고 버팀목을 세워둔 모양입니다. 그리고 공격 시간에 맞춰 버팀목에 불을 지른 것이죠.”
“그럼 그 소리가?”
“버팀목이 약해져 부러지는 소리였습니다.”
공성측에서 쓰는 전술을 역발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최소한 스무날 전에 준비했다고 봐야겠군.”
의미심장한 기간이었다. 머리 좋은 허풍쟁이가 깜짝 놀랐다.
“그럼 기사 나리가 참전했을 때부터 계획하고...!”
“그럴 거야.”
호른 경과 허풍쟁이의 얼굴이 하얘졌다. 로벨이 평소처럼 공격을 지휘했으면 700명의 희생자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라 하나를 통째로 이용한 암살시도라니, 여러모로 기가 막힌 작전이었다.
‘나 하나 때문은 아닐 테고, 네일 공국의 내전을 길게 지속시키기 위해서겠지.’
전자는 실패했지만, 후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 이긴 전쟁이 다시 고착되었다.
브로크 야를과 까마귀 용병단은 오딘의 어깨를 넘어 고원지역에 주둔했다. 숫자는 1천이 안 되지만, 요새에서의 승리 아닌 승리로 사기가 높았다. 반면, 흐롤프 야를의 군대는 분위기가 안 좋았다. 물리적인 피해도 피해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대단했다. 겁먹은 부족들이 진영을 이탈하고 있었다.
‘결국 원점이군.’
한 번의 패배로 수많은 승리가 퇴색되었다. 용감한 볼탄 반도 기사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손짓했다.
“그래도 우리가 2배 많잖습니까? 한 번 더 밀어붙이지요?”
그러자 네일 공국 기사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저 위에 무슨 함정이 있는 줄 알고?”
그것이 문제였다.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한번 당한 것에 집착했다. 로벨은 양국의 기사들을 한 번씩 보고 말했다.
“두 번 당하면 미련한 사람이지만, 두 번 당할까봐 포기하면 소심한 사람이오.”
흐롤프 야를은 살짝 당황했다.
“어, 어려운 말은 잘 모르오. 난 공작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로벨은 기분 좋은 오해에 방긋 웃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알면 깔깔 웃을 것이다.
“우리 귀족이야 걱정 없지만, 전사들이 겁을 먹은 게 문제요. 싸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오.”
로벨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시늉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하지만 고민 없이 말하면 가볍게 여겨지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네일 공국과 볼탄 반도의 기사가 모두 초조함을 느낄 때 비로소 입술을 떼었다.
“협상합시다.”
“협상? 저 똥 같은 것들이랑?”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오. 아무리 똥 같은... 흠흠. 아무리 간악한 자라 해도 지금은 상대할 방법이 없소. 한 번 더 패배하면 부대가 와해될 것이오.”
“끄으응...”
호른 경은 속으로 미소지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 흐롤프 야를이 네일 공국을 통일하면 지금 당장은 좋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강한 적을 만든 꼴이다. 흐롤프 야를을 견제할 세력을 남겨두는 것이 이로웠다.
“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특히 이번에 피해를 입은 전사들이 말이오.”
“물론, 우리가 점령한 땅을 돌려줄 필요는 없소. 최대한 챙길 것은 챙기시오. 그리고 요새의 일은... 류트 프란시스 공자의 책임으로 돌리시오. 그자의 처벌은 본인이 맡겠소.”
이 정도면 만족할 대안이었다. 흐롤프 야를은 곧장 사람을 보냈다. 브로크 야를은 기다렸다는 듯 협상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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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야를의 회담은 목동이 버리고 떠난 낡은 오두막에서 진행되었다. 로벨은 동맹국 지휘관으로 흐롤프 야를과 함께 참석했다. 외국인을 끌어들였다고 비난받는 일은 없었다. 브로크 야를 역시 외국인을 대동하고 있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 그리고...”
로벨은 네일 공국인과 달리 샤프론(Chaperon)을 칭칭 감은 두 사내를 보았다.
한 명은 익히 아는 류트 공자였다. 두 차례나 암살시도를 겪은 만큼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었다. 흐룬팅 위로 올라가는 손을 억눌러야 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창백한 피부와 짙은 밤색 머리카락으로 잉그비아 왕국인이 아닐까 짐작했다.
‘까마귀 용병단의 대장인가?’
용병처럼 보이진 않지만, 꼭 용병이 용병단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 추정했다. 하지만 일개 용병대장보다 거물이었다.
“이쪽은 볼탄 반도의 ‘진정한’ 주인 류트 프란시스 공작이고, 이쪽은 잉그비아 왕국의 진리... 진리... 뭐더라? 아, 그래! 진리탐구회의 두목 제퍼슨 홀이오.”
로벨의 기사들은 앞쪽 소개에 분노했다. 늑대 남매가 부러워할 만큼 으르렁거리면 칼자루를 쥐었다. 그러나 정작 볼탄 반도의 주인은 뒤쪽 소개에 당황했다. ‘진리탐구회’란 이름은 처음 들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몇 가지 단어들이 연상되었다. 성... 폐허... 구울... 일기장... 그러자 금방 단서가 나왔다. 지금은 뉴 로드릭 마을이 된 하몬 남작의 성이었다. 그곳에서 찾은 기사의 일기에 나와 있었다.
“악마추종자로군.”
이 당혹스러운 만남에 다소 뜬금없지만, 호칭이 ‘두목’이라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