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43화 (343/605)

343화. 투창

바바 야가의 절굿공이, 외형 따라 듣기 좋게 말하면 ‘바바 야가의 창’이 네일 공국 기사의 사슬갑옷을 깨트리고 가슴을 뚫었다. 인마 합계 1,600파운드의 질량과 시속 19만 피트의 속도는 그 자체로 살인적인데, 인지의 세계에서 끌어온 신비의 힘까지 더해졌다. 기사의 몸이 내부에서 폭발했다.

‘윽...’

피와 살점과 내장이 질주하는 방향으로 터져나갔다. 공성용 대포에 직격당한 몰골이다.

‘사람을 상대로는 가급적 쓰지 말아야지...’

그래도 효과는 대단했다. 기사-였던 것-를 뒤따르던 기사 종자와 기마 용병들은 난데없는 피보라를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렸다. 승마술이 떨어지는 어린 종자는 얼굴에 붙은 창자 비슷한 것을 떼어내려다가 낙마까지 했다.

피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파괴력에 사람과 짐승 모두 질려버렸다. 주인의 의지로, 혹은 말 자신의 간절한 생존본능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로벨을 중심으로 옛 선각자의 기적처럼 기마 부대가 갈라졌다.

대열이 흐트러진 군대는 군대가 아니었다. 그저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을 가진 개개인일 뿐이다.

호른 경의 해비 랜스가 균형을 잃은 용병의 헬름을 가격했다. 각도가 절묘한 탓인지, 아니면 평소 사이즈가 안 맞은 탓인지 허무하게 벗겨져서 날아갔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 생각 중인데, 이어서 온 기사가 기다란 플레일로 안면부를 후려쳤다.

마주 달려온 속도에 원심력을 담은 철퇴라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광대와 콧대가 으스러지고 눈알이 반 튀어나왔다. 원래도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더욱 못생긴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말에서 떨어진 뒤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짓밟고 지나가 세속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첫 충돌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삽시간에 10여 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실력이 출중해서, 혹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기사와 기마 용병들은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롱소드와 메이스를 꺼냈다.

로벨도 손잡이만 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왼손으로 옮기고 아론다이트를 뽑아들었다.

“죽어랏!”

“이럇!”

두 번째 충돌은 여러모로 가벼웠다.

말 위에서 휘두르는 공격은 아무래도 힘이 부족했다. 더욱이 기사나 용병이나 전투마를 끌고 다닐 정도면 갑옷 또한 잘 갖춰 입기에 어지간해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투탕! 투탕! 깡-! 까강! 소리만 요란했다. 옛 신에게 간덩이를 맡겨놓은 작자가 몸을 던져 상대방을 끄집어내리거나, 솜씨 좋게 상대방 말을 놀래켜서 쫓아내는 일도 있지만, 보통은 한 대 치고 한 대 맞는 체력싸움이 이어졌다.

그 사이 울프 용병단과 철사자 용병단이 100야드 거리까지 접근했다. 유라피아 대륙 북방구에서 가장 악명을 떨치는 용병들이었다. 최고 지휘관의 부재에도 각자 알아서 전투에 들어갔다.

“스피어맨! 앞으로!”

“스피어-월-! 스피어-월-!”

짧게는 7피트에서 길게는 14피트에 이르는 창들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서로의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상대방을 향해 나아갔다.

네일 공국인의 백병전과 다른 참혹이 있었다. 느리고 조용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서로를 덮쳤다.

“찔러!”

@

전쟁이 끝나면 잔치가 시작된다. 인간들의 시끄럽고 지저분한 잔치가 아니다. 피 냄새에 이끌려 찾아온 까마귀와 승냥이와 들개들의 잔치다.

부리가 크고 강한 까마귀는 구멍 난 가죽을 헤집어 창자를 끄집어냈다. 신선하고 맛있는 고기지만 한입에 삼키기에는 너무 컸다. 홰를 치며 고군분투했다.

세월과 거래해 연륜을 쌓은 늙은 까마귀는 투구 틈새로 눈알을 뽑아냈다. 시신경과 핏줄이 딸려 왔지만 처리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꿀꺽 삼켰다.

겁이 많은 승냥이는 운반하기 좋은 팔다리를 선호했다. 인간들끼리 잘라놓은 사지를 주우면 더없이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낑낑거리며 손가락과 팔꿈치를 물어뜯었다.

유일하게 불만을 가질 사자(死者)가 침묵하니 대체로 만족스러운 파티였다.

“네일 공국 미신에 따르면 까마귀가 하늘나라 어디로 데려가 주는 거 아니었소?”

“옛날 사람은 그리 믿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옛 신의 신앙이 전해진 지 벌써 2백 년이 지났으니까요.”

로벨은 호른 경과 함께 짐승들의 연회장을 구경했다. 포비아 왕국이라면 전염병 등의 이유로 땅에 묻거나 불태우는데, 네일 공국인은 통 관심이 없었다. 혹시나 전통 신앙-미신 때문인가 했지만 아닌 듯했다. 그냥 귀찮거나 필요성을 모르는 듯했다.

‘마을에서 머니까 괜찮겠지.’

“주군, 해가 지고 있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로벨은 모닝스타를 세우고 서쪽을 보았다. 지평선 아래로 태양이 주저앉고 있었다.

국경을 넘을 때만 해도 네일 공국이 이렇게 큰 나라인 줄 몰랐다.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적어서 그렇지, 크기만 보면 포비아 왕국보다 커다랬다.

“지도와 달리 아주 큰 나라요.”

호른 경은 뜬금없는 소리도 익숙하게 받아주었다.

“저 북쪽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햇빛도, 바람도, 모두 얼어붙는 곳이라 합니다.”

“세상의 끝인 모양이오.”

로벨은 얼음이 칼날처럼 뾰족뾰족하게 솟은 대지를 상상했다.

‘그곳을 지나면 무엇이 있을까?’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오직 상상의 나래만이 닿는 곳. 마녀 키르케가 말한 인지의 세계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류트 공자가 보이지 않는데...”

“브로크 야를과 까마귀 용병단을 따라간 모양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이곳에서 30마일쯤 올라가면 오딘의 방패라는 오래된 요새가 있다고 합니다. 그곳으로 가고 있을 겁니다.”

“으음... 농성할 생각인가?”

“현명하진 않지만,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성에서 버티는 것은 그리 좋은 전략이 아니다. 혹자는 1년이고 2년이고 적이 물러날 때까지 버티면 되지 않냐고 하는데, 그것은 '희망'이 있을 때 이야기다.

구원군이 올 거란 희망, 적이 먼저 지칠 거란 희망이 있으면 그나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10년 치 식량도, 100년 치 무기도 소용이 없었다. 성 안에서 곰팡이처럼 퍼지는 불안과 불만이 성벽을 갉아먹었다. 지금 브로크 야를이 그러했다.

흐롤프 야를이 네일 공국의 모든 땅과 권리를 차지하고, 가을에 추수되는 모든 작물을 독점하면, 요새에서 버틴들 승산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치프-봉신들과 용병들이 이탈할 것이다.

“이쯤에서 볼탄 반도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른 경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하루하고 한나절 동안 치러진 대회전은 로벨 로드릭 공작 & 비요른 흐롤프 야를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잔당처리였다.

“...그럴 수 없소.”

로벨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호른 경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차피 로벨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어이 설명했다.

“류트 공자가 개입한 이상 확실히 끝을 봐야 하오. 그리고 류트 공자의 배후 또한 찾아야 하고.”

“악마추종자 말씀입니까?”

“마법사의 왕이라 자칭하는 악마추종자의 두목이오.”

로벨은 엄격하고 진지하게 말한 후 슬그머니 눈짓을 보았다.

‘호칭이 두목이 맞나? 지도자? 대장? 우두머리?’

류트 공자를 잡으면 악마추종자의 정체를 캐내야겠다고 결심했다.

@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사기와 깃발로 하늘을 찌르며 북진했다.

흐롤프 야를의 연전연승 소식에 눈치를 보며 중립을 주장하던 족장들이 앞다투어 찾아왔다. 로벨 일행에게는 익숙한 패턴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했다.

이기주의자와 기회주의자가 얄밉기는 하지만, 확실한 승리와 승리 후 정통성을 위해 거부하지 않았다. 과장 좀 해서 1마일을 행군할 때마다 병력이 늘어났다. 드넓은 평야가 끝나는 오딘의 어깨에 도달했을 때는 4천에 가까운 대군이 되었다. 네일 공국의 왕이라 자처할 만한 위용이었다.

“저곳이 브로크 야를의 요새요?”

로벨은 ‘오딘의 방패’ 요새를 보고 기쁨과 실망을 동시에 표현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최소 2백 년 전에 지은 요새였다. 전쟁이 잦은 동네라 나름대로 개축을 해왔지만, 기본적으로 부실하고 허름한 목재 요새였다.

“저 정도면 대포를 동원할 필요도 없겠는데?”

머리를 뾰족하게 깍은 통나무를 일렬로 세웠을 뿐이다. 도개교와 해자는 당연히 없고, 보루와 망루도 없었다. 통나무 벽 중간중간 네모반듯하게 총안을 뚫어 놓은 것이 유일한 방어시설이었다. 옛날의 로드릭 성보다 하찮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낄낄 웃었다.

“이런 곳에서 농성할 생각을 하다니요.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요.”

“성은 비웃어도 병사는 만만히 봐서 안 됩니다. 까마귀 용병단은 잉그비아 왕국의 요먼(yeoman)이 주축입니다. 그들은 알아주는 활잡이지요.”

“선공은 우방에게 양보했으니 두고 봐야지.”

로벨은 모닝스타가 쉴 수 있게 안장에서 내렸다. 보통은 시동이 고삐를 받아주지만, 로벨은 시종은 고사하고 기사 종자도 없어 직접 고삐를 끌고 갔다. 모닝스타의 고약한 성미상 종자가 있어도 직접 끌어야 했을 것이다.

최고 지휘관이 말에서 내리자 호른 경 이하 기사들도 따라 내렸다. 군중의 예법은 아니지만, 위대한 공작이자 존경하는 기사를 감히 내려다볼 수 없었다.

로벨은 몰골이 지저분한, 좋게 표현하면 노련미가 생긴 기사들을 힐끔 보고 말했다.

“오늘은 싸울 일이 없을 거요. 편히 쉬면서 구경이나 합시다.”

로벨이 쉰다고 모두가 쉬지는 않았다. 흐롤프 야를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하는 군소 족장들은 숨 돌릴 틈 없이 전투를 시작했다. 사람 몸통만한 원형 방패를 머리에 이고 사다리를 엇갈려 들고 요새를 향해 달렸다. 바바리안의 공성전은 기사들의 공성전과 달랐다.

“던져라!”

활시위를 당기기 전에 창과 도끼가 튀어 올랐다. 억센 어깨로 집어던진 재블린은 놀라울 만큼 멀리 쏘아졌다. ‘설마 맞겠어?’ 싶은 거리에서 정확히 가슴을 꿰뚫었다.

“스피어 스로워(Spear-thrower)군요. 아직도 저런 것을 쓰는 종족이 있다니.”

로벨은 아군 투척병을 보고 스피어 스로워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재블린을 뒤에서 바치는 숟가락 같은 나무 막대였다. 왼손으로 창을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스로워를 휘둘러 그냥 던지는 것보다 멀리 날릴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투석기와 비슷한 원리였다.

‘음... 저게 원시적인 투석기지.’

로벨은 한가롭게 싸움을 구경했다. 불구경과 더불어 최고의 구경거리가 싸움 구경이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에르나 왕국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파티를 열고 구경한다는데,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가로운 심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허풍쟁이가 애꾸눈의 옆구리를 찌르고 속삭였다.

“네가 말한 ‘알아주는 활잡이’는 어디 있는 거냐?”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 주위가 워낙 조용한 탓에 로벨의 귀에 들렸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성벽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수비병 숫자가 많지 않았다.

“설마...”

로벨은 몇 가지 가능성을 점쳤다. 그리고 그중 가장 유력한 가능성을 뽑아들었다.

“몬트! 퍼시발! 지금 당장 철수하라고 전해!”

“처, 철수요? 누가 철수합니까요?”

흉내쟁이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로벨은 답답해서 칼을 빼들었다. 호른 경 외에 모두가 저 양반 참 성질머리가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누구긴 누구야! 흐롤프 야를이지! 빨리 가!”

로벨은 설명이 부족한가 싶어 칼끝으로 요새를 가리켰다.

“저긴 함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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