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42화 (342/605)

342화. 백중세

로벨은 울프 용병단 북군과 남군, 그리고 재정비가 끝난 기사와 기사 종자를 모아 푸른 땅 북쪽으로 진군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많아 총 병력은 400명이 안 되지만, 사기만큼은 4천 명 부럽지 않았다. 도무지 연전연패한 군대 같지 않았다.

“우리가 진 것은 영주님이 안 계셨기 때문이야.”

“무적의 울프 용병단은 무적무패 기사 나리와 함께 있을 때 완성된다고!”

“주군께서 이끄는 군대는 절대 패하지 않는다.”

“공작님이 오신 이상 승리뿐이다!”

로벨은 무적무패의 신앙이 부담됐으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바닥까지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신앙이든 괴담이든 가져다 써야 했다.

“위험한 짓이야.”

애꾸눈이 아바레스트의 기계장치를 점검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엿들은 사람은 로벨의 전령으로 찾아온 과묵한 몬트 뿐이었다.

“어째서?”

과묵한 몬트가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 로벨의 랜서(Lancer)로 복무한 만큼 로벨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 깊었다.

“영주님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무적’은 아니다.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붉은 산에서만 두 번이나 위기를 겪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의 함정에 빠져서, 그리고 버그베어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서 고비를 맞이했다. 그 외에도 여러 번 위기가 있었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과 싸울 때도, 청옥성의 주드 맥켈런 남작과 싸울 때도 위태위태했다.

“너야 말로 잊은 것 같군.”

과묵한 몬트는 로벨을 명령을 전달한 후 자신의 믿음을 덧붙였다.

“네가 말한 모든 위기에서 끝내 승리한 것은 우리의 영주님이었다.”

부우우우웅-

부우웅-

종아리를 적시는 야트막한 개울 건너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묵한 몬트는 ‘조랑말’에 올라 고삐를 낚아챘다. 길게 말할 시간이 없었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애꾸눈은 아바레스트에 쿼럴을 올리고 소리쳤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크로스보우 중대 앞으로!”

애꾸눈의 명령을 받은 울프 용병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푸른 땅을 점령한 브로크 야를의 군대가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무려 1,700명이었다. 네 자릿수로 표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역사서에는 2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 그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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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땅 수복전은 성공적이었다.

애꾸눈과 울프 용병단이 굽이치는 강물을 방패 삼아 악착같이 버티는 사이, 로벨과 호른 경이 기사들을 이끌고 배후를 기습했다. 그동안 우직하게 정면대결을 고수해온 탓에 적들은 우회기동을 대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대비했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로벨이 지휘하는 기마돌격은 이전의 기마돌격과 차원이 달랐다.

지난날의 기마돌격이 정신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라면, 로벨이 이끄는 기마돌격은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폭탄이었다. 30여 명의 기사가 한 마리의 맹수가 되어 1천 명의 병사를 찢고, 밟고, 쪼개고, 부수었다.

오후 늦게 시작된 전투는 해가 질 때쯤 끝이 났다. 400 대 1700의 싸움이 400명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기적 같은 승리지만, 기적에 익숙한 기사와 병사들은 흥분하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수준의 분위기에서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무적무패의 신화를 처음 체험한 흐롤프 야를은 달랐다. 설마하니 진짜로 이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신의 도움 없이 멍청한 기사로 말이다.

로벨은 수차례 돌격에도 지치기는커녕 한껏 달아오른 모닝스타를 이끌고 흐룰프 야를이 참관하는 프레이야의 언덕으로 찾아왔다. 첫 전투 때처럼 의기양양한 기사들이 우르르 따르니 그것 또한 장관이었다.

로벨은 야를 앞에서 모닝스타 세우고 바이저를 올렸다.

“자, 이 정도면 증명이 되었소?”

먼지투성이 갑옷과 달리 하얀 얼굴이 눈부셨다. 흐롤프 야를은 지난날의 결정을 칭찬했다.

“그, 그렇소!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무용이었소!”

그러나 로벨의 전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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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공작 & 비욘르 흐롤프 야를 연합군은 초가을의 연전연패를 설욕하듯 싸우는 족족 승리했다.

첫 전투로 푸른 땅을 수복한 후, 아홉 가닥 협곡을 신속히 통과해 병참기지를 짓밟고, 전격전에 깜짝 놀라 회군하는 적의 분대를 각개격파했다. 기동전, 심리전, 정보전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했다.

흐롤프 야를은 로벨이 휩쓸고 지나간 땅을 느긋하게 통과하며 흩어진 부족을 취합하고 저항할 의지를 잃은 부족의 항복을 받았다. 흐롤프 가문의 땅을 온전히 회복하고, 숙적 브로크 야를의 본대를 끄집어내기까지 열흘이 걸릴지 않았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북군과 남군을 편제별로 섞어 배치하고,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은 기사와 기사 종자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100개의 파비스가 한 팔 간격으로 길게 설치되고, 크로스보우 위에 얹어진 쿼럴이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길이와 모양은 다르지만 용도가 비슷한 창날이 줄지어 늘어서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쇳덩이가 한 덩이로 밀집했다.

호른 경은 전투마를 몰아 부대배치를 확인한 후 로벨이 있는 지휘부로 돌아왔다.

“거리가 너무 멀지 않습니까?‘

군사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깔끔한 부대배치지만, 적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먼저 공격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곳이 적당하오. 오늘은 흐롤프 야를이 주인공이니까.”

로벨은 모닝스타 안장에 기대어 느긋하게 말했다. 지난 열흘의 전공으로 체면치레는 끝났다. 이 땅의 주인은 로벨이 아니니 주인이 마무리해야 옳았다.

“류트 공자의 소재는 파악되었소?”

로벨은 광야에서 치러지는 두 야를의 싸움보다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악마추종자 손길에 집중했다.

“잉그비아 왕국 용병들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두 용병단을 고용한 것은 분명하나, 어디서 자금이 났는지, 왜 브로크 야를을 돕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페닝이야... 악마추종자니까 숨겨둔 황금이 있을 테고... 목적은...”

악마추종자의 목적은 현세의 혼란을 부추겨 신비주의를 퍼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든다.

“이 전쟁 자체가 목적이겠지.”

볼탄 반도의 정통성 전쟁, 검은 숲 해방전쟁, 포클랜드 왕위계승전쟁, 잉그비아 왕국의 하이랜드 내전의 연장선이었다.

“지긋지긋해.”

“...주군?”

로벨은 흐룬팅의 폼멜을 어루만졌다. 마법사의 왕이든, 류트 프란시스 공자든, 이 단단한 철퇴로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주군, 시작되었습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시야가 한층 넓어지며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용이 그려진 깃발과 붉은 용이 그려진 깃발. 사람 키만한 도끼와 마차 바퀴만한 방패. 콧등까지 내려오는 투구와 가죽으로 만든 갑옷. 용사 라그나르의 후예를 자처하는 두 야를이 군대를 이끌고 충돌했다.

병력은 2천명 대 2천 2백 명. 대부분 농민이지만, 부업으로 1년에 30일은 약탈을 하거나 약탈꾼을 때려잡으며 지내기에 도끼 다루는 솜씨가 우수했다.

“두 야를의 땅이 아무리 넓어도 저만한 숫자를 두 번 모으지는 못할 거요.”

“그러면 이 전투로 승부가 나겠군요.”

네일 공국의 전쟁은 기병 위주로 싸우는 에르나 왕국, 포비아 왕국과 사뭇 달랐다. 활을 쏘고 말을 타는 병사도 있지만, 칼과 도끼와 방패를 가진 경보병이 중심이었다. 기사들의 싸움처럼 박진감은 없지만, 그 이상의 처절함이 흘렀다.

인간의 체력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갑옷을 입은 상대를 3명 정도 때려잡고 나면 체력이 바닥난다. 그러면 도망가기도 힘들었다. 앞에서 덤비고, 뒤에서 떠미니 천하의 용사라도 끝내는 칼 맞아 쓰러질 수밖에 없다. 고로 백병전은 평등했다. 죽고, 죽이고, 죽고, 죽이며 시체가 쌓였다.

“백중세로군요.”

사상자가 1/3이 나오자 격렬함이 가라앉았다. 가장 용감한 병사가 가장 먼저 죽은 탓도 있고, 죽고 죽는 과정에 지친 탓도 있고, 발아래 깔린 시체들로 싸우기가 불편한 탓도 있었다.

“주군, 승부가 났습니다.”

미세하지만 흐롤프 야를의 군대가 전진했다. 시체의 산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브로크 야를의 병사들은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쳤다. 방패벽은 진즉에 깨졌고, 조각난 모래가 파도에 잠기듯 삼켜졌다.

“아직 아니오.”

로벨의 시야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넓었다. 브로크 야를의 숨겨둔 칼을 찾았다. 아마도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견제하기 위해 빼둔 칼이겠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이 전선에 투입했다.

전장 밖에서 새로운 군대가 등장했다. 깃발도 없고, 무장도 제각각이지만,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질서정연하게 발맞춰 걸었다. 개개인의 덩치는 네일 공국 토박이보다 작지만, 전체를 보면 차돌 같은 단단함이 있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차돌이란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더 세 보이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철사자 용병단?”

“저, 저것들이 저기 숨어 있었군!”

기사들이 적의 정체를 알고 화를 내었다. 로벨이 오기 전, 그러니까 악몽 같은 다섯 번째 전투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원흉이었다. 기사도 아니고, 용병 나부랭이에게 당했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분통이 터졌다.

“주군, 출격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공작! 저놈들을 저지해야 하오!”

로벨은 기사들의 복수심을 이해하는 동시에 필요성도 납득했다. 저대로 두면 지칠 때로 지친 흐롤프 야를의 군대가 전멸할 수 있었다.

“애꾸눈, 파비스를 철거해. 싸움개, 발가락, 너희 부대가 막아. 완보로 전진.”

기사들은 자기들을 먼저 보내지 않은 로벨의 지휘에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하지만 로벨의 실력과 명성 앞에 감히 항의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할 필요가 없었다.

두 용병단이 두 야를의 접전지를 사이에 두고 500야드까지 접근하자 적 기병대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연기에 쐬인 토끼 같은 꼴이었다.

로벨은 ‘그럼 그렇지...’ 중얼거리고 바바 야가의 창을 높이 들었다.

“볼탄 반도의 용맹한 기사들이여!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다! 명예로 칼을 갈고! 분노로 창을 세워라! 적에게 죽음을! 아군에게 승리를!”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릴 적 즐겨본 기사 소설의 주인공 대사였다. 그래도 저작권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머리보다 심장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기사였다. 가슴에 불을 지피자 이성을 치우고 몸을 움직였다.

“적에게 죽음을! 영원한 죽음을!”

“저 더러운 용병들을 죽이자!”

로벨은 모닝스타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영특한 하프 유니콘은 그냥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자꾸 때리냐는 듯 짜증스럽게 울부짖고 광야를 달렸다. 그 뒤로 역전의 용사가 되어가는 30명의 기사와 12명의 기사 종자가 따라붙었다.

적 기병은 울프 용병단을 내버려두고 로벨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기사도 있고, 맨앳암즈도 있고, 야만족 전사도 있었다. 숫자는 43명 대 45명. 역시나 백중지세였다.

‘그럼 실력과 무기로 승부를 내야지!’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창받침에 걸고 첫 번째 과녁을 겨냥했다. 그랜드 챔피언의 창술과 전설 속의 절굿공이였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지만, 상대가 안쓰러웠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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