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영웅담
애꾸눈은 안대가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만지작거렸다.
“잉그비아 왕국 용병들이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설마 고르곤 공작과 손잡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르곤 공작까지 거론되자 표정이 한층 안 좋아졌다. 호른 경이 헬름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따지듯 물었다.
“고르곤 공작에게 그런 여유가 있는가? 흑태자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고르곤 공작과 관계없이 류트 공자의 독단적인 소행일 지도...”
로벨은 낯선 땅에서 들리는 지긋지긋한 이름이 달갑지 않았다. 흐룬팅의 폼멜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저번에 나눈 인사로 부족했나봐.”
당사자가 들으면 오싹할 말이었다. 로벨은 고민 좀 하다가 그만두었다. 남의 땅, 남의 진영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고민이 아니었다.
“흐롤프 야를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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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국 시절에는 바바리안(Barbarian)이라 불리었고, 셈 포클 시대에는 놀드족이라 불리었으며, 칠왕국 시대에는 네일 공국인이라 불리는 스카이 반도 토착 민족이었다.
북쪽에서 자란 것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체격이 크고 성격이 거칠었다. 머리와 수염이 억세게 자라는데, 환한 금색이나 옅은 붉은색이 많았다.
로벨은 호른 경과 애꾸눈을 대동하고 아흔아홉 마리의 산양 가죽을 엮어 만든 흐롤프 야를의 막사로 들어갔다.
상석에 버티고 앉은 곰 같은 중년 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말 곰이었다. 곰 머리와 발톱이 그대로 붙어있는 가죽 망토를 뒤집어쓰고 우람한 수염 도끼를 끼고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 소위 ‘형제’라 말하는 네일 공국 기사들이 모여 있는데, 망토만 빼면 비슷비슷했다.
‘곰굴에 들어온 것 같아.’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로 네일 공국인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본토 사람은 달랐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민머리 사제가 흐롤프 야를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야를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로벨 로드릭 군주(Lord).”
로벨은 흉흉한 도끼들을 잊고 활짝 웃었다. 네일 공국과 관련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호칭을 들었다. 로벨도 거기에 응했다.
“비요른 흐롤프 야를.”
로벨이 하얀 송곳니를 보이자 야를이 노란 앞니로 화답했다. 상대방의 정통성을 인정해 손목을 맞잡고 악수했다. 손바닥과 손목에 숨겨둔 무기가 없는지 확인하는,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인사였다.
“잘 와주었소.”
“당연한 일이오. 우정을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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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흐롤프 야를의 기사들에게 전황을 들으면서 틈틈이 무기와 갑옷을 살폈다.
어린 집사가 지어준 별명처럼 자루가 긴 수염 도끼를 많이 가졌는데, 취향에 따라 장검과 장궁도 한 자루씩 비켜 찼다. 사슬 위에 판금을 덧댄 갑옷과 철편을 비늘처럼 엮은 갑옷을 주로 입고, 찬바람을 막기 위해 가죽을 여러 겹 둘렀다. 고대 놀드족 복장과 샘 포클 시대 기사 복장이 반씩 섞인 느낌이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는 안 쓰나?’
로벨은 자신이 입은 호화로운 필드 아머를 내려다보았다. 화살을 빗겨내기 위한 유연한 곡선 구조에 바람마저 흘려보낼 듯 섬세한 음각이 새겨져 있으며, 관절이 접이식 철편이라 유연하면서 빈틈이 없었다.
‘내 갑옷이 제일 멋져. 에헴.’
로벨은 가죽 망토를 젖히고 최첨단 필드 아머를 자랑했다.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가난한 갑옷을 입은 네일 공국 기사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공작쯤 되면 입는 것이 다르군!’ 두 자루의 명검과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까지 보이면 상대적 빈곤감에 우울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 로벨만큼은 아니지만 최신 갑옷을 갖춘 볼탄 반도 기사들이 거론되었다.
“공작의 기사들은 용감하오. 하지만 단순하고 바보들이오.”
호른 경이 실소했다. 네일 공국 야만인에게 바보 소리를 들을 줄 몰랐다. 그런 호른 경의 속내를 읽었는지 흐롤프 야를의 수염쟁이 기사들이 으르렁거렸다.
로벨은 한 손으로 호른 경을 제지하고 다른 한 손을 흐룬팅 칼자루에 올렸다. 기사의 명예는 지켜져야 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소?”
로벨의 키는 네일 공국 기준으로도 작은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전신 판금 갑옷은 제아무리 호전적인 바바리안이라도 세 번쯤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칼이고 도끼고 박힐 것 같지 않으니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흐롤프 야를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어리석은 것은 잘못이 아니오. 그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기사들은 정말 기사다웠다. 첫 전투부터 기마돌격을 시도했고, 한번 효과를 본 뒤로 자신감에 젖어 계속 돌격, 또 돌격했다.
태양 아래에서 반짝이는 판금 갑옷과 영광스러운 가문의 깃발과 네일 공국의 빈약한 토지에서 나올 수 없는 우람한 전투마가 어느 때보다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에르나 왕국과 포클랜드의 기사들을 상대로 닳고 닳은 잉그비아 왕국의 용병단이었다.
세 번째 전투에서 무모한 돌격으로 사상자를 내었고, 다섯 번째 전투에서 진창에 빠져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흐롤프 야를과 다툼을 벌인 것이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로벨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고 한숨 쉬었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어디 있소?”
“동쪽 우르드 언덕에 주둔 중이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판단해 귀향을 종용 중이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흐롤프 야를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 파티를 열 것이오. 공작과 공작의 기사들을 초대하고 싶소.”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은 어느 지방이나 비슷했다. 로벨은 아직 가시지 않은 우호의 손길을 맞잡았다.
“기대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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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호른 경은 즉시 말을 타고 동쪽 어디라는 기사들의 야영지를 찾아갔다. 황량한 들판에 듬성듬성 세워진 사각 막사와 꺼질 듯 말듯 연기를 내뿜는 모닥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 어? 공작님?”
“주군! 주군께서 오신 겁니까?”
패잔병, 아니, 피난민 몰골로 흩어진 기사와 기사 종자가 깜짝 놀라 모여들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세우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100명 가까운 기사가 대폭 줄어 절반이 남지 않았다. 사지 멀쩡한 수행원보다 붕대 감은 수행원이 더 많았다. 굶주린 전투마와 방치된 병장기가 기사 중의 기사 로벨 로드릭을 매우 화나게 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로벨이 화를 내자 모닝스타가 깜짝 놀라 투레질했다. 로벨은 등자를 힘껏 밟고 몸을 지탱했다. 로벨은 부상당한 기사들을 굽어보며 어느 때보다 사납게 울부짖었다.
“자랑스러운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 왜 패잔병보다 못한 꼴로 웅크리고 있는가!”
기사들은 말채찍에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왔다! 나 로벨 로드릭이 왔다! 무기를 쥘 수 있는 자는 무기를 들어라!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말에 올라라! 잃어버린 명예가 저곳에 있다! 싸워라! 싸워라, 나의 기사들아!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후대에 명화(名?)로 전해지는 ‘푸른 땅의 외침’이 이렇게 탄생했다.
영웅담이 대개 그러하듯 각색이 들어가 이대로 기사들을 이끌고 적진에 돌격, 2천의 적군을 무찌르고 비요른 흐룰프 야를의 푸른 땅을 되찾았다고 알려졌는데, 현실은 조금 달랐다.
기사 하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주군, 저녁을 안 먹어서 당장 싸우러 가기는 좀...”
로벨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생각해보니 브로크 야를의 군대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기운 내라고 한 말이오. 흐롤프 야를이 만찬을 준비했다고 하니 같이 가서 먹읍시다.”
“그 야만인 백작놈이 말입니까?”
“경이 방금 말했듯 백작이오. 명예롭게 대하시오.”
“그야 알지만...”
“그, 그것보다 공작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호, 혹시 저희 때문입니까?”
“주군께서 지휘하시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지! 암!”
“내 말은 아직 튼튼하오. 다음 전투에 공작을 따를 것이오.”
“응당 그래야지!”
아무튼 사기가 올라가긴 했다.
로벨은 큰 변화 없이 숙덕거리는 기사들이 부끄러워 호른 경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콩깍지가 심하게 씌인 기사는 마냥 감격 중이었다.
“역시... 역시 나의 주군이십니다. 실로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 후대에 길이 전해야 합니다. 조각이 더 좋으려나?”
“...그만하시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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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 공국 연회는 포비아 왕국 연회와 조금 달랐다.
우선 호스트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 큼직한 노루 고기를 연회장 한가운데 걸고 참석자가 마음껏 썰어갔다. 채소와 치즈 등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싶은 만큼 주워가면 되었다.
손님의 취향을 생각해 맥주와 포도주를 내었지만, 그보다 벌꿀주와 정체 모를 과일주가 주류를 이루었다. 어떤 술은 달고, 어떤 술은 시큼했다. 공통점은 아주 센 술이란 것이다.
“끄윽...”
로벨은 벌꿀주를 비우고 조그맣게 트림했다. 세 오라비와 늙은 집사가 살아생전에 보았으면 저걸 누가 데려가나 깊이 시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거친 삶을 매력으로 아는 기사와 야만인의 연회장이었다. 로벨의 작은 트림은 아기 돼지의 방귀보다 못했다.
“온다! 온다! 온... 꺼어어어억-!”
“우하하하하핫! 경이 제일이오!”
술방울이 뿌려지고, 뼈다귀가 날아다녔다.
“자! 자! 공작도 드시오! 사양하지 마시오! 크하핫!”
로벨은 옆자리의 흐롤프 야를이 자꾸 고기 파편을 뿌려서 한숨 쉬었다. 본의 아니게 거친 것과 지저분한 것의 차이를 깨달았다.
“공작이 볼탄 반도 최강의 전사라 들었소. 진짜요?”
로벨은 뼛속까지 기사였다. 겸손이나 겸양을 몰랐다.
“그렇소. 본인이 최고요.”
적이라면 모를까, 아군이 강해서 슬플 이유는 없었다. 흐롤프 야를은 목젖이 튀어나올 만큼 껄껄 웃었다. 로벨은 침 범벅이 된 갈빗살을 뒤로 던지고 다시 술잔을 채웠다.
“칼질 한 번에 롱-쉽이 두 쪽 나고, 도끼질 한 번에 신전이 무너진다는 것도 사실이오?”
로벨은 기사의 명세를 충실히 지키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소. 주먹으로 성문을 부수기도 하오.”
귓불이 붉은 것은 아마도 벌꿀주 때문이다. 흐롤프 야를은 야영지가 떠나가라 웃었다. 샘 포클 만큼이나 전설적인 용사, 라그나르의 후손답게 우렁찬 웃음이었다. 소음이 모두 쓸려나가 연회장이 고요해졌다. 외로운 야를의 웃음이 그치자 모닥불 타는 소리만 남았다.
“그걸 증명할 수 있소?”
흐롤프 야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사답지 않은 맑은 눈이 반짝였다. 의심도 아니고, 조롱도 아니었다. 간절한 기대와 희망이었다. 로벨은 술잔을 비우고 다시 트림했다.
“이제 곧 증명해 보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