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40화 (340/605)

340화. 생색

로벨의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는데, 그중 가장 반대한 사람이 어린 집사였다. 애지중지하는 주판알을 팽개치고 삿대질 비슷한 것을 날렸다.

“영주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네일 공국을? 도끼 미치광이가 바글바글한 야만인 땅을? 영주님, 미쳤어요?”

“도끼 미치광이라니...”

“미, 미쳤냐니...”

세치 혀는 때로 천하의 보검이라 보이지 않는 것을 베었다. 로벨과 펄프 대장이 상처 입었다.

“그리고 딱히 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좀, 뭐냐, 장애물 앞에서 남자들의 우정이 과한 것뿐이죠!”

리암 수사는 온화하고 참신한 표현에 감탄했다. 적의 지원군이 늘어나 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로벨의 기사와 흐롤프 야를의 기사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대규모 결투를 벌였다. 3명이 죽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하니, 말이 좋아 결투지 사실상 패싸움이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우정이 해결되지 않을 텐데?”

“영주님이 가면 고집불통 기사랑 일자무식 야만인이 형제라도 되나요?”

로벨은 호른 경에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런데 호른 경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군은 후사가 없는 홀몸이십니다.”

“후, 후사?”

“그런 일이 있으면 아니 되지만, 만에 하나 주군께서 잘못되시면 로드릭 가문은 물론이고 볼탄 반도가 혼란에 빠집니다.”

“나 하나 없다고 무슨...”

로벨이 미심쩍게 반박하자 호른 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페르젠 가문, 야심으로 호수를 가득 채운 헤르만 가문, 동부평야의 정통성을 자부하는 랭스터 가문, 치욕을 잊지 못한 하인즈 가문, 볼탄 반도 북부를 지배한 사트로 가문 등이 왜 조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글쎄... 먹고 살만해서 아니겠소?”

“...그럴 리 있습니까. 주군이 두려워서입니다.”

“나를? 왜?”

되묻는 순간 지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호른 경이 조목조목 설명했다.

“늑대성이 성장하기는 했으나 아직 대도시는 아닙니다. 울프 용병단이 용맹하기는 하나 고작 수백 명입니다. 제후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직 주군의 위명입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기사. 옛 신이 축복한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 공작 말입니다.”

“그, 그런 거였소?”

로벨을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어린 집사, 펄프 대장, 호른 경 등도 종종 경이로움을 느끼는데, 로벨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로벨은 근 3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무서운 거구나!”

로벨의 측근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사자가 사자인 줄 모르고 재롱떠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주군께서 잘못되시면 욕심과 불만과 원한을 꾹꾹 눌러온 제후들이 어찌 행동할 것 같습니까?”

“...화목하진 않을 것 같소.”

“그러니 주군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호른 경까지 반대하면 강행하기가 힘들었다.

“네일 공국의 발목을 잡고 페닝을 뜯어내는 것이 목적 아니었습니까? 애꾸눈한테 미안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겨울이 올 때까지 버티고, 그 후에 고향 핑계로 돌아오라고 하십시오. 그쪽도 겨울에는 여유가 없어서 붙잡아두지 못할 겁니다.”

“그럼 내년에는?”

“볼프 후작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내년 봄이면 국경을 수습하지 않겠습니까?”

로벨은 반박하지 못했다. 결국, 용병을 좀 더 모아 보내고, 기사들을 중재하는 편지를 쓰기로 합의했다.

로벨이 꽉 막힌 문장력으로 깃털 펜을 놀릴 때, 네일 공국에서 두 번째 전령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애꾸눈이 보낸 전령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황상으로 세 번째나 네 번째 전령에 가까웠다.

“공작 각하! 부디! 부디 도와주십시오!”

“난 각하(Your Excellency)가 아닌데... 무슨 일이오?”

“우리 야를께서, 야를께서...!”

흐롤프 야를의 전령은 부족한 어휘를 손짓발짓으로 대체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로벨은 중간과정이 많이 생략된 소설책을 본 느낌으로 확인차 물었다.

“흐롤프 야를이 패배했다고? 갑자기? 애꾸눈은? 외팔이는? 허풍쟁이는 어떻게 되었소?”

“공작 각하께서 보내주신 병사들은, 이, 일단 푸른 땅으로 철수해서, 그것이, 그러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 그보다 저희 야를을 도와주십시오! 공작 각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정을 맹세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 사람이 이마를 짚었다. 어린 집사의 얼음 같은 히스테리도, 호른 경의 비단 같은 자상함도 로벨의 불붙은 심장을 꺼트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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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 남군을 소집했다. 페닝을 벌기 위해 머나먼 나라에서 찾아온 용병들이라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민들도 도시의 골칫거리가 떠난다 하자 기뻐하며 재화와 물자를 바쳤다. 계절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초가을이었다. 출정준비는 걱정과 달리 순탄했다.

“아무리 그래도 병력이 모자라지 않아요? 봉신들을 모으는 게 어때요?”

“시간이 없어. 그리고 가을이잖아. 싫어할 거야. 버그베어와 싸울 때 소환에 응한 기사들은 강제할 수 없고.”

울프 용병단 남군의 숫자는 100명 남짓이었다. 종군을 희망하는 기사와 프리랜서도 모았지만,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애꾸눈이 이끌고 간 북군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했다.

“숫자만 부족한 게 아니야.”

펄프 대장이 골라 뽑은 만큼 개개인의 실력은 우수하지만, 충성심이나 소속감을 가지지는 못했다.

로벨은 하루에 한 번씩 기름칠해 반짝반짝 빛나는 필드 아머를 갖춰 입고, 가을을 맞아 살이 부쩍 오른 모닝스타에 안장을 올리고, 전설적인 마법 무기를 차례로 매달았다.

어린 집사가 걱정이 되는지 모닝스타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럼 싸우지 말고 애꾸눈이랑 허풍쟁이만 챙겨서 돌아와요. 남의 나라 남의 싸움에 피 흘릴 필요 없잖아요.”

로벨은 걱정이 많은 어린 집사를 쓰다듬으려다 컨틀렛을 꼈음을 깨닫고 미소만 지어주었다.

“노력해 볼게.”

로벨은 모닝스타를 끌고 마구간 밖으로 나갔다. 로벨만큼 중무장한 호른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 아래 집결했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장에 올랐다. 성문을 나가자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울프 용병단 105명과 편력기사와 프리랜서 38명, 닥터 줄리안을 비롯한 기타 수행원 20명, 종군상인 4명 등이었다.

로벨이 등장하자 옹기종기 모인 원정대가 부산을 떨며 일어났다. 얼굴이 까만 흑인 용병, 수염이 풍성한 동방인 용병, 옛 신의 상징물에 입을 맞추는 독실한 용병 등등 다채로웠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용병 사이를 가로질렀다.

“우리의 친구가 저 북쪽 땅에서 위기에 빠졌어.”

친구란 말에 몇 명은 웃고 몇 명은 질색했다. 로벨은 뜸 들이지 않고 이어 말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거 알아. 불만이 많은 것도 알고. 그래서 재미있을 거야.”

“재미라굽쇼?”

누군가가 반문했다. 로벨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말했다.

“너희를 무시하는 친구를 너희가 구해주는 거야. 그리고 크게 생색내는 거지. ‘나한테 목숨 빚졌다’ 재미있지 않아? 주먹다짐으로 이기는 것보다 몇 배 더 통쾌할 거 같은데?”

상상력이 풍부한 용병부터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이 있었다. 이교도와 야만인에게 고마워하는 ‘자칭’ 문명인 모습이 그려졌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들도 진정한 울프 용병단이 되겠지.’

호른 경은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군대의 사기를 높이고 소속감을 부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누가 가르쳐서 가질 재능이 아니었다. 늑대가 무리를 이끄는 것처럼, 사자가 사냥을 익히는 것처럼 본능일 것이다.

“북쪽으로 가자. 친구들을 구하러 가자.”

“생색내려는 게 아니굽쇼?”

사납지만 순박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로벨은 모닝스타 머리를 북동쪽으로 고정했다.

“겸사겸사 생색도 내자. 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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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공작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벨에게 밉보인 것이 많은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의 영주들은 표적이 아니란 것에 만족했다.

“주군, 늑대성이 텅 비었습니다.”

일부 야심 많은 인사가 의미심장한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로벨의 무위를 직접 겪은 영주들은 기겁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공작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댁이 썰렁해 보여서 잠시 맡아두었습니다’ 이럴까? 그러면 ‘경의 따뜻한 피로 덥혀놓지 그랬소’하고 목을 칠 텐데, 네놈이 대신 칼 맞아줄 것이냐?”

각색이 조금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반면, 흐롤프 야를 이하 네일 공국의 친(親) 로드릭 세력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군대 규모가 작은 것이 불만이나, 로벨 로드릭의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 적의 주력인 까마귀 용병단과 철사자 용병단이 크게 동요하여 푸른 땅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여기가 네일 공국이구나.”

로벨은 이름만 거창한 ‘푸른 땅’을 쭉 둘러보았다. 찬바람이 뱀의 혀처럼 쉭- 쉭-불어오고, 풀잎은 노랗게 질려 죽어가고 있었다.

호른 경이 전투마를 몰아 가까이 붙었다.

“북해 해안보다 북쪽이라 겨울이 빨리 찾아옵니다. 달이 차면 서리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추수제도 안 지냈는데 말이오?”

호른 경은 볼탄 반도 토박이 말에 미소 지었다.

“네일 공국에는 추수제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모자란 식량과 가죽을 구하러 옆 마을을 습격하지요.”

“그건 좀...”

로벨이 고운 이마를 찌푸리자 호른 경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요즘은 용병으로 재화를 버는 편입니다. 주군의 용병 중에도 네일 공국 출신이 많지 않습니까.”

로벨은 늑대성에 놓고 온 펄프 대장을 떠올렸다. ‘고향땅이 비옥했으면 30년 넘게 용병짓을 안 했겠지?’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네일 공국 야만인이 조금 이해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언덕을 오르내리니 곧 일단의 부대를 발견했다. 흐롤프 야를과 울프 용병단 북군이었다.

“영주님?”

“기사 나리!”

애꾸눈은 진짜로 찾아온 로벨과 전우들 모습에 당황했고,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외 살아남은 용병들도 먼 길을 찾아온 동료 용병들을 진심으로 반겼다.

과거 멱살잡이했던 에르나 왕국 출신 북군과 모나카 왕국 출신 남군이 어색하게나마 손목을 맞잡고 어깨를 두드리는데, 옛 신의 교회에서 편찬한-그래서 인기가 없는- 아동 교양서에 한 장면 같았다.

로벨은 우수한 수학능력으로 피해 상황을 확인한 후 애꾸눈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밀린 거야?”

애꾸눈이 애꾸눈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렸다. 흐롤프 야를의 명예 때문이었다.

“적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잉그비아 왕국 용병단 말이야?”

“그들도 그들이지만, 그것보다...”

애꾸눈은 안대를 긁다가 이실직고 말했다.

“적진에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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