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셈
로벨의 짐작대로, 정확히는 펄프 대장의 예상대로 네일 공국을 양분하는 흐롤프 야를과 브로크 야를이 병사를 소집했다.
볼탄 반도 북부의 영주들은 바짝 긴장하였다. 선대 야를처럼 서로를 죽이는데 열과 성을 쏟으면 행복한 일이지만, 새 시대를 열겠다는 둥, 평화와 안정을 찾겠다는 둥 변화를 꾀하면 난감했다. 저들이 말하는 안정은 필연적으로 주변국의 약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피를 안 보면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야만인의 성향 탓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휘하 족장들에게 재화를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다.
로벨은 네일 공국 출신 용병들의 조언을 심사숙고하여 흐롤프 야를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린 집사가 교정하고 리암 수사가 첨언한 화려한 미사여구를 생략하면 내용은 간단했다.
‘우정이 필요하지 않소?’
혀보다 도끼날이 빠른 야만족이지만 수십 개 부족을 거느린 야를 정도 되면 정치 감각도 있었다. 저울을 놓고 ‘볼탄 반도 군대’란 추를 추가해 이리저리 재어보았다. 숙적 브로크 가문과 손잡고 얼마 안 되는 약탈품을 챙기는 것보다 무적무패 공작과 합심해 스카이 반도를 집어삼키는 게 노후대비에 좋을 듯했다.
까닥하면 어부지리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으나,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면 걸어볼 만했다.
로벨은 카를 데인 경에게서 흐롤프 야를의 편지를 건네받고 슬쩍 웃었다.
“네일 공국의 침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로벨은 울프 용병단 북군 220명과 참전을 희망하는 기사들을 모아 총 488명을 파병했다. 숫자는 적어도 기사와 종자와 용병만으로 구성된 최정예 부대였다.
“기사 나으리가 100명 넘게 모였단 말이오?”
“정식 기사는 몇 명 안 돼요. 기사 가문의 차남이나 삼남이죠.”
가난한 기사들이 떠나는 동방원정의 연장이었다. 가진 것이 없는 기사와 갖고 싶은 것이 많은 용병들은 잘만 하면 네일 공국의 영주가 될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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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사고 없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오, 그렇소?”
로벨은 호른 경에게 구두로 보고받은 후 몹시 기뻐했다. 전쟁 위기와 경제 위기가 한방에 해결되었다. 비단 로벨 한 사람의 기쁨이 아니었다.
국경 문제를 해결한 볼프 사트로 후작과 실전경험이 풍부한 정예 군사를 얻은 흐롤프 야를도 기쁨을 감추지 못해 성의를 표시했다.
“후작이 보낸 지원금이랑 야를이 보낸 진상품이랑 합치면 총 얼마야?”
어린 집사는 호른 경의 보고를 문서화하면서 눈짓으로 책상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 현황 보고서 있어요. 아뇨. 두 번째 종이요.”
로벨은 생각 없이 종이를 집었다가 질색했다. 진상품의 수량, 시세에 따른 가격, 소비성, 보존기간 등이 동방숫자로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피를 왕창 흘린 것처럼 진한 현기증이 났다.
“그, 그냥 말로 해주면 안 될까?”
어린 집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이 정도 보고서는 읽을 수 있어야죠. 옛날의 세습 기사가 아니라 볼탄 반도를 다스리는 공작님이잖아요.”
“그, 그렇지만...”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놀릴까봐 걱정이에요.”
호른 경은 사랑하는 주군이 집사 따위에게 구박받자 불쾌했다.
“주군께서는 결코 멍청하지 않다. 생각이 아주 깊고, 셈도 매우 빠르시지.”
어린 집사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호른 경의 충성심은 알지만, 거짓말은 안 되죠.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아요?”
“너야말로 모시는 주인을 너무 무시하는군. 그러고도 몸종이라 할 수 있는가?”
로벨은 맹한 얼굴로 ‘나 셈 못하는데? 응? 진짠데?’ 어쩌고 중얼거렸지만, 로벨의 제일가는 충신을 자처하는 두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에잇! 테스트해볼까요? 해봐요?”
“어릴 적 동무라 해도 무례하기가 그지없군. 주군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디 해 보거라.”
“영주님, 영주님, 32 더하기 22 빼기 9가 얼마죠?”
로벨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꼽았지만 두 자릿수라 쉽지 않았다. 로벨이 울상이 되자 호른 경이 인상을 찌푸리고 정정했다.
“질문이 잘못 되었다. 주군, 풋맨 32명과 파이크맨 22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에서 9명이 전사하면 몇 명이 남습니까?”
“어, 어, 45명?”
호른 경의 얼굴에 흡족함이 감돌았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뭐야? 사기잖아!”
어린 집사가 믿기지 않는 듯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벨은 산수가 되는 것이 신기해서 활짝 웃었다.
“또, 또 내보시오!”
“롱소드가 19자루고, 메이스가 12자루고, 워 해머가 20자루 있으면, 몇 명이 무장할 수 있습니까?”
“51명!”
로벨이 유쾌하게 대답하자 호른 경은 박수치며 기뻐했고 어린 집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게 뭐야!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어? 악! 어떻게 생긴 영주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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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새로운 재능에 눈을 뜰 때, 애꾸눈 볼포스가 지휘하는 울프 용병단 북군은 깊은 골을 넘어 네일 공국의 ‘푸른 땅’으로 들어갔다.
푸른 땅이라 하면 기름지고 윤택하게 들리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성난 소떼가 지나간 진창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한 구릉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고, 이삭줍기 전의 가을 토지처럼 검고 탁한 바위가 흩뿌려져 있었다.
볼탄 반도의 낮고 잔잔한 구릉과 달랐다. 땅을 헤집으면 흙보다 자갈이 많이 나왔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잡초만 무성하게 싹을 틔우는데, 그조차도 짧은 여름과 더욱 짧은 가을이 아니면 바짝 말라 누렇게 몸져누웠다. 농사도, 방목도 어려웠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척박한 땅이었다.
“이런 곳에 사니까 약탈 말고 할 게 없지.”
볼탄 반도 출신 허풍쟁이가 코밑을 쓱쓱 긁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시대부터 네일 공국인의 야만성을 귀따갑게 들어와 호감보다 적개심이 강했다.
“우하하하핫! 내가 돌아왔다! 잘 있었냐!”
반면, 네일 공국 출신의 외팔이는 길고 짧은 두 팔을 번쩍 들고 초원 저 끝을 향해 소리쳤다. 진짜 고향은 북쪽으로 사흘쯤 더 올라가야 하지만, 그래도 네일 공국이란 지명이 설레었다. 어림잡아 15년 만의 귀향이었다.
“이거 참! 펄프 대장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거참 아쉽구먼?”
외팔이가 입맛을 다졌다. 같은 네일 공국 출신으로 10년 넘게 함께한 대장이 절로 생각났다.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영주님을 보필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외팔이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펄프 대장은 로벨이 아니어도 고향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무려 36년을 떠나 있던 고향이다. 펄프 대장이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떠났을 것이다. 어디를 가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하나 없을 것이다. 이제와 돌아온들 이방인이 될 뿐이다.
애꾸눈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장 아름다운 추억 속에 남겨두고 싶은 노인의 마음을 이해했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늙은 용병들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흐롤프 야를의 오두막까지 하루 남았지?”
“그래. 지금부터 우리가 밟는 땅이 전부 흐롤프의 것이지.”
애꾸눈은 말을 잠깐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흐롤프 야를은 털바지의 용사 라그나르의 후손이다. 혹여나 무례하게 굴지 말도록.”
“나도 이곳 출신이야. 나보다 저 나으리들을 걱정해야지.”
외팔이가 반대쪽을 보았다. 야만이 숨 쉬는 땅, 바바리안 소굴에 어울리지 않게 번쩍이는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나으리들인데, 괜히 사고나 치지 않을까.”
“이 땅에 정착할 마음이 있으면 야를 말은 듣겠지.”
애꾸눈은 안대가 시꺼멓게 될 때까지 만지작거렸다. 부하들이 불안해 할까봐 덤덤한 척했지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로벨과 펄프 대장이 없는 것도 걱정이고, 귀하신 몸이라 통제가 어려운 기사들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진짜 걱정해야 할 것은 초가을에 얼음이 어는 저 북녘 땅에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용병단이라고?”
“까마귀 용병단과 철사자 용병단이오.”
애꾸눈과 외팔이는 서로를 보았다.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았다. 다른 용병들도 잉그비아 왕국의 유명한 용병단 이름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 동네도 지금 치고받고 싸우느라 일자리 넘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와?”
“윗동네 야를이 웃돈이라도 얹어줬나 보지.”
“잉그비아 왕국 출신이라 잉그비아 왕국 내전에 끼기 힘들겠지. 왜 걔네들은 그런 거 있잖아.”
적당히 눈치 보며 시간과 식량만 축내다가 돌아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애꾸눈은 하얗게 때가 탄 안대를 비비며 한숨 쉬었다.
“하필 그놈들인가...”
울프 용병단에 쌓인 게 많은 놈들이라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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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울프 용병단 북군이 떠난 로드릭 시티에도 크고 작은 말썽이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와 이질적인 풍습을 가진 울프 용병단 남군 때문이다.
사실 성격만 보면 흑인이나 동방인이나 북쪽에서 온 용병보다 온화했다. 로벨과 로벨의 측근에게 깍듯하고, 시장에서 계산도 잘하며, 배변도 정해진 곳에서 처리했다. -웃을 일이 아니다. 외상 달고 도망가는 용병과 아무 곳에나 똥오줌을 싸지르는 용병이 대단히 많다- 그럼에도 말썽이 되는 것은 익숙지 않은 그들의 문화 때문이다.
“아! 진짜! 지금 시비 거는 거에요? 왜 이러는 거야!”
“저 더러운 이교도 새끼가! 저리 꺼지지 못해?”
얼굴에 피칠을 하고 태연히 거리를 활보하는 흑인 용병은 약과였다. 여자와 대화할 수 없다고 입 꾹 다물고 버티는 알베니아 왕국 용병과 말과 마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돗자리 깔고 기도 올리는 모나카 왕국 용병은 주먹다짐까지 이어졌다. 결국, 늑대성으로 청원이 빗발쳤다.
“그거드르... 즈응마... 츠으블 해즈으야...”
어린 집사는 깨진 이빨을 보이며 바람 새는 소리로 하소연하는 시장 상인을 잘 다독여서 보낸 후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실수했어요. 저 남쪽 야만인을 북쪽 야만인 소굴에 보냈어야 해요.”
로벨도 그 생각을 했지만 보류했다.
“추위에 약하다잖아.”
“어차피 싸우는 시늉만 할 건데, 무슨 상관이에요?”
로벨은 말썽을 일으킨 용병을 불러서 급료를 삭감하고 시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썩 좋은 처사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이교도를 감싼다고 못마땅해 했고, 용병들은 고용주가 냉대한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어린 집사가 지쳐서 한소리 했다.
“안 되겠어요! 용병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요!”
어린 집사의 말이면 세 번쯤 고민하는 시늉하는 로벨이지만, 울프 용병단 문제만큼은 완강했다.
“도시 밖에 풀어놓는 게 더 안 좋아. 누가 통제할 거야?”
“펄프 대장이 해야죠! 그러려고 대장 삼은 거잖아요.”
“대부분 신참이라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이런저런 일로 골치를 앓다보니 어느덧 여름이 고비를 넘겼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로 말하면 가을을 알리는 북동풍이었다.
“주군, 애꾸눈이 보낸 전령입니다.”
로벨은 바람이 불어오는 망루에서 몸을 돌렸다.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을 양옆에 두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촌부가 있었다.
“네가 전령이야?”
로벨이 의아해서 물었다. 과묵한 몬트 소대를 함께 보내는데, 기마 용병을 보내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고, 고귀한 분은 뵙습니다. 울프 용병단의 애, 애꾸눈님(Sir)이 보내서 왔습니다.”
“애꾸눈님이라니, 허허, 그 녀석이 많이 컸습니다?”
펄프 대장이 나잇값 못하고 히죽였다. 귀족의 작위와 호칭을 모르는 촌부의 실수일 것이다. 로벨은 개의치 않았다.
“편지 가져왔어?”
“예, 예, 그럼요. 저는 까막눈이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진짜입니다. 진짜요.”
촌부는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 있는지 지레 겁먹고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호른 경이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입막음이 필요한 내용이면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민간인을 통해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꼭 그렇지 않아.”
로벨은 애꾸눈의 성격처럼 간단명료한 편지를 읽고 고민에 잠겼다. 로벨이 침묵하자 수행기사와 용병대장이 불안해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혹 안 좋은 일이면...”
로벨은 먼 곳에서 온 촌부에게 은화를 하사하고 지미와 루시 여관에서 쉴 수 있게 배려했다. 그런 후 애꾸눈의 편지를 공개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아.”
로벨의 측근들은 암묵적인 서열에 따라 편지를 돌려보았다. 누가 마지막에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전에 로벨이 결정을 내렸다.
“내가 직접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