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38화 (338/605)

338화. 달맞이꽃

로벨이 판단할 때 병원 사업은 성공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약초와 약학에 밝았다. 마녀가 잘 모르는 것은 숲지기와 숲지기 막내딸이 도와주었다. 그리고 옛 신이 가호하사 행운이 있었으니, 전(前) 구호 기사단 출신 노인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외과술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죠, 줄리안 경?”

어린 집사의 질문에 ‘줄리안 경’은 세상살이에 찌들다 죽음을 앞두고 초탈한 그런 노인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경(Sir)이 아닙니다. 전 기사가 아니니까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죠? 수사님? 나이트(Knight)?”

“저는 수도원 학교의 선생이었지요. 사제도, 기사도 아닙니다. 그냥 줄리안 노인이라 불러주시지요.”

“그럼 닥터 줄리안이라 부를게요.”

닥터 줄리안은 고급스러운 호칭에 내심 좋아했다. ‘닥터’라 하면 보통 도시 대학의 학자를 뜻하기 때문에 수도원 학교 출신이 닥터라 불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머나먼 동쪽 나라로 비유하면 교수님과 훈장님의 차이 정도 될까?

“이미 알고 왔겠지만, 우리 늑대성에서 고용하는 게 아니라 급료가 없어요. 구제소, 그러니까 병원에서 치료비를 벌어 쓰세요. 그리고 저... 음...”

어린 집사는 병원 책임자가 마녀란 말을 선뜻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기사단 출신이라 껄끄러웠다. 연륜이 깊은 닥터는 허허허, 웃었다.

“귀엽고 깜찍한 마법사 아가씨 말입니까? 벌써 만나보았습니다.”

“...아직 안 만난 거 같은데요?”

어린 집사는 닥터의 시력을 잠시 우려했다.

‘뭐, 외과술 전문이니까, 괜찮겠지.’

말이 좋아 외과술이지 사실상 절단술이었다. 팔에 쇠독이 오르면 팔을 자르고, 다리에 열독이 오르면 다리를 자르는 것이 외과의사의 일이었다. 자른 후에 지혈을 잘해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실력이지만, 솔직히 말해 이발사나 도축업자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칼 쓰는 것은 비슷하니까.

로벨은 늑대성을 나가는 늙은 의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의사가 있었으면 코골이도 죽지 않았을 텐데...”

“그 인간은 옆구리에 맞아서 수술 못해요.”

어린 집사는 어젯밤 마녀 키르케가 놓고 간 병원 관리 보고서를 훑어보고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먼저 간 닥터를 따라잡았다.

“이 마녀를 진짜...!”

로벨은 마녀가 또 사고 쳤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보고서를 주웠다. 지저분한 것을 줍는 듯한 동작이 볼만했다. 그리고 보고서 내용은 더욱 볼만했다.

로드릭 병원 11일차 보고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그리고 끝이었다. 로벨은 조용히 덮어놓고 한숨 쉬었다. 그래도 첫날보다는 나았다. 첫날 보고서에는 배탈이 나서 찾아온 농부의 가족 구성원과 병아리 이름이 줄줄 쓰여 있었다.

“잘 되고 있는 거... 맞겠지?”

조금은 의심도 되었다.

@

로벨과 어린 집사가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새로운 사업에 열을 올리는 사이, 호른 경은 길잡이 카를 데인 경과 함께 버그베어가 처음 출몰한 깊은 골을 다녀왔다.

도적이 된 용병과 무리를 잃은 몬스터가 날뛰었지만, 노련한 기사 호른 경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로벨은 정체 모를 오물이 덕지덕지 붙은 호른 경의 갑옷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저기 스며들면 닦기 힘든데...’ 호른 경의 갑옷은 플레이트 앤 메일 형식의 구형 갑옷이라 제대로 손보려면 사슬을 분리해 모래통에 넣고 굴려야 할 것이다.

“애꾸눈한테 도움을 받으라고 했잖소?”

호른 경은 로벨의 애틋한 시선을 오해했다.

“이 정도 일에 주군의 병사를 빌릴 수 없지요. 무사히 다녀왔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셔트 메일이 무사하지 않... 아, 아니오. 경이 무사하니 다행이오.”

호른 경이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어지는 질문에 금방 잊어버렸다.

“깊은 골은 어떻소?”

호른 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소문보다 훨씬 안 좋은 듯했다. 고작 열하루 싸운 로드릭 시티가 이 모양인 것을 생각하면, 버그베어의 고향(?)이 어떠할지는 알만했다.

“깊은 골뿐만 아니라, 모몬트 영지도 상황이 안 좋습니다.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기사들은 실종되었으며, 영지민은 죽거나 피난을 떠났습니다. 사트로 가문에서 손을 쓰겠지만, 향후 몇 년 동안은 사람이 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거 안 좋은 일인데...”

로벨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안 좋은 일이었다. 측은지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깊은 골과 모몬트 성은 네일 공국과 맞닿은 국경이었다. 다시 말해 포비아 왕국의 대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네일 공국도 집안 싸움으로 피를 흘리고 있으니, 당장은 전쟁을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호른 경이 생각과 다른 위로를 보냈다. 그러나 전(戰)자로 시작하는 모든 일에 전문가인 로벨이 모를 리 없었다.

“땅을 점령하는 것만 전쟁이 아니잖소?”

땅이 아니라 땅에서 난 것-곡물, 광물, 가축, 사람 등등-을 노리고 쳐들어오기도 한다. 주로 해적과 유목민이 그러했다.

“최근 10여 년간 잠잠하지 않았습니까.”

“글쎄... 생각해 보시오. 두 가문의 내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하고, 잉그비아 왕국이 분열되어 간섭도 없을 텐데, 볼탄 반도의 국경은 텅 비었으니 사나운 바바리안이 어찌 나올 것 같소?”

호른 경은 불편한 심정으로 인정했다. 국가와 국가 관계에서 10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국경을 침범할 거란 말씀입니까?”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끄덕였다.

“어찌 확신하겠소. 다만, 두 번 다시 우리 땅이 짓밟히지 않게 방비하자는 것이오.”

@

시간은 꾸준히 흘러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왔다.

원래라면 보리 타작이 한창이어야 할 시기지만 성 밖에서 치러진 전쟁통에 수확한 작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뉴 로드릭 마을이 무사하여 리암 수사표 맥주만은 지킬 수 있었다.

“식량도 부족한데, 그냥 보리로 빵이나 지어 먹죠?”

...라고 청원한 사람도 있지만, 어린 집사에게 등신 머저리 취급받으며 쫓겨났다.

도시 노동자에게 맥주는 식량이고 식수이며 삶의 보람이었다. 더욱이 지역 특산품이 된 ‘리암 수사표 맥주’는 로드릭 상회와 시장의 주요 상품이었다. 먹을 것이 모자라면 맥주를 팔고 곡식을 사 오는 것이 나았다.

아무튼, 어려운 시기였다. 식량을 못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값이 크게 올라 보리빵 하나로 삼대가 삼일을 나는 집도 있었다.

“빵을 짓이겨서 팔팔 끓이면 걸쭉한 죽이 되어요. 그걸로 온 가족이 끼니를 때우는 거죠.”

가난한 도시 빈민이 상해서 버려진 빵을 먹는 방법이었다. 맛은 둘째 치고 몸에 좋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곡물 가격을 낮추기 위해 값싼 콩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콩은 말먹이란 인식이 강해서 잘 먹지 않지만, 썩은 빵보다는 나았다.

로벨은 콩을 장려하기 위해 콩을 넣은 스프와 콩을 곁들인 고기를 자주 먹었다.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다. ‘볼탄 반도 공작 로벨 로드릭이 즐겨 먹는 환상의 콩 요리’란 레시피가 전국에 유행했다. 실제 로벨은 먹어본 적 없는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콩 값까지 오르잖아요!”

“대신 보리값은 내려갔잖아?”

“으으... 이렇게 된 거 순무를 들여올까...”

“제발 참아줘. 외팔이가 발광할 거야.”

그리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여름비는 집착이 강해 끊길 듯 끊이지 않고 지겹게 내려왔다. 야속한 비였다. 고운 밀이 자라야 할 추경지에 먹지도 못할 잡초가 우거지게 피어났다.

“이제 그만 좀 내려라! 니네 먹일 작물도 없다고!”

언덕 위에 자리한 늑대성은 빗물이 흘러나갈 배수로 몇 개만 관리하면 되지만, 저지대에 위치한 가난한 빈민은 집안까지 흘러들어오는 빗물에 괴로워했다. 그냥 빗물이면 차라리 다행인데, 비가 온다고 소화기관에 참을성이 생기는 게 아니라 까맣고 냄새나는 것이 함께 들어왔다. 덥고, 습하고, 지저분하니 병이 퍼지기 좋았다.

로벨은 네일 공국 걱정을 잠시 치워두고 빈민구제에 관심을 쏟았다. 어린 집사는 ‘세금도 안 내는 놈들을 부려 먹지는 못할망정 부려진다’고 투덜거렸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볼 만큼 독하지 않았다.

로드릭 시티 동문 밖에 임시 막사촌(村)이 생겨났다. 여름이 갈 때까지 유지되었고, 여름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았다. 쓸데없이 솜씨 좋은 사람은 버려진 자재를 모아 판잣집을 만들었다. 로벨은 사트로 시티의 빈민가를 떠올리고 한숨 쉬었다.

“그렇게 놔두고 싶지 않은데...”

역시 부족한 것은 페닝이었다.

로벨은 페닝을 벌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기존의 수입은 500명-조금 줄어서 440명- 울프 용병단을 유지하기도 빠듯했다. 새로운 수익이 필요했다.

“아, 맞다. 알루미늄이 있잖아? 그거 팔자.”

“안 돼요! 안 돼! 그게 최후의 보루라구요!

어린 집사가 점점 악화되는 경제 위기에도 뒷목 잡고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알루미늄 때문이었다. 정말 최악의 최악이라도 알루미늄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장은 사줄 사람도 없어요. 이만한 보물을 살 사람은 왕이나 제후나 옛 신의 배부른 주교밖에 없는데, 아시잖아요?”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라 경제가 좋아야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요즘 같이 사방이 전쟁일 때 보물을 비싸게 살 제후는 없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

“병원 같은 것은 됐어요. 장기적으로 나쁘지 않지만, 오늘이 급하잖아요.”

로벨은 집무실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창밖에서 엿들은 아버지와 늙은 집사의 대화를 떠올렸다. 왜 창문에 매달려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기억에 남았다. 로벨이 가장 좋아하는 기사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기사가 재산을 불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뭔지 알아?”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토너먼트에서 우승... 엇? 영주님?”

어린 집사는 주입식 교육으로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깜짝 놀랐다. 늑대성의 주 수입이 토너먼트 상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에이, 옛날이랑 달라요. 볼탄 반도 공작이잖아요? 어느 제후가 영주님을 출정시키겠어요? 그리고 상금이라 해봤자 4, 5천 페닝인데 그걸 누구 코에 발라요?”

옛날 같으면 4천 페닝에 원숭이 흉내도 냈을 텐데, 로드릭 가문이 성공하긴 성공했다.

“그쪽이 아니야. 전란 때문에 시합도 없잖아.”

“그럼 전쟁을 벌이게요? 설마 사트로 가문이랑...?”

“아니야. 아니야. 내가 왜? 아니야.”

로벨은 말을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어쩌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올 듯했다.

“가을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싸울 거야.”

“저랑 영주님이요?”

“아니라니까! 우리가 왜 싸워?”

로벨은 어린 집사의 곱슬곱슬한 회색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모처럼 의자에 앉았다.

“펄프 대장이 그랬어.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어서 가을에 치열하게 싸운다고.”

“그러니까 그곳이 어디인데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볼탄 반도의 오래 숙적이자 유서 깊은 해적의 나라. 네일 공국이야.”

어린 집사는 네일 공국으로 쳐들어가겠다는 뜻인 줄 알고 기겁했다. 물론, 로벨이 그럴 리 없었다.

“그곳의 야를과 손잡을 거야. 울프 용병단은 용병단이잖아? 본업에 충실해야지.”

“아하! 식충이를 파는 거군요?”

“...고용되는 거야. 그러면 네일 공국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우리 땅을 넘보지 않을 거야. 우리가 지불하는 울프 용병단 유지비도 줄어들 거고.”

어린 집사의 표정이 달맞이꽃처럼 활짝 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