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35화 (335/605)

335화. 집념

해가 지면 짐승도, 나무도 잠이 든다. 한낮의 시끄러운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잦아들고, 밤잠이 없는 풀벌레 소리만 아련하게 울렸다.

부스럭- 뚝-

로벨은 잡목에 걸린 망토 자락을 조심스럽게 당기고 하늘을 보았다. 새순이 돋은 가지 사이로 달과 구름이 보였다. 마녀가 크게 베어 먹은 보리빵처럼 앙상한 초승달이었다.

흉내쟁이 퍼시발이 납작한 투구를 고쳐 쓰고 중얼거렸다.

“으스스합니다요?”

그리고 자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겁이 많다고 웃을 수 없었다. 가까운 곳에 신화적인 거인과 괴담 속의 괴물이 우글우글하니 저 정도 경계는 당연했다.

로벨은 긴장을 풀어주려고 명랑하게 말했다.

“아참! 여기 곰 나온다? 회색곰. 큰 거.”

“그걸 왜 지금 말합니까요!”

로벨은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지만 역효과였다. 용병들은 심리적인 공포에 현실적인 걱정을 더했다. 호른 경은 구름 속에 잠겨 희미해진 달을 힐끔 보고 말했다.

“어둡군요.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로벨이 헛기침으로 자신감을 표시했다.

“이 숲은 로드릭 가문이 300년 동안 가꿔온 숲이요. 어험!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허세가 아니었다. 매년 사냥을 나와 숲 지리에 밝았다. 하지만 곰 이야기에 예민해진 용병들이 뭉그적거리는 통에 자꾸 멈춰서야 했다.

“계속 그러면 말꼬리에 묶어서 끌고 갈 거야.”

사람 숫자만큼 말이 있으니 으름장이 아니다. 용병들은 고용주와 회색곰 중 어느 쪽이 무서운지 저울질한 후 한층 빠르게 쫓아갔다.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대포를 펑펑 쏴재켰으니, 곰이 아니라 오우거라도 도망갔을 것이다.

로벨은 목초지로 빠져나가는 숲 외곽에서 멈췄다. 버그베어가 출몰하는 구릉까지 800야드 남았다.

“여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자.”

“에구구...”

용병들은 야간행군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얼핏 보면 바닥과 가까워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물론, 교양이 있는 용병도 있었다. 과묵한 몬트는 ‘조랑말’ 안장에서 크로스보우를 꺼내 장전했다.

“거인, 버그베어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로벨은 모닝스타를 나뭇가지에 묶고 바바 야가의 창, 플레일, 워 해머 등을 꼼꼼히 점검했다.

“지금까지 패턴을 볼 때 동이 트는 새벽 아니면 해가 지는 초저녁에 공격할 거야.”

고블린 등이 야행성이라고 하지만, 진짜 깜깜한 밤에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눈이 어두웠다. 그 때문에 공격 시간은 거진 정해져 있었다.

“그럼 2경 정도 남았군요.”

“응. 지금은 쉬어.”

쉬라고 해도 불을 밝히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용병들은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둥글게 앉아서 비스켓을 갉아먹거나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기사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쉴 곳을 마련했다.

“제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한숨 주무십시오.”

호른 경이 롱소드를 칼집째 풀어 어깨에 걸치고 결연히 말했다. 로벨은 지나치게 헌신적인 기사를 만류했다.

“그럴 것 없소. 여긴 안전한 곳이고, 용병들이 경계를 서니까, 조용히만 하면 아무 탈 없을 것이오.”

호른 경은 줏대 없이 ‘아, 그렇군요?’ 하고 눕지 않았다.

로벨은 몇 번 권유하다가 포기하고 나무 밑동에 머리를 기대었다. 파나케아 투구를 목에 덧대 베개 삼고, 가죽 망토를 이불처럼 끌어당겼다. 차가운 바닥, 딱딱한 갑옷, 충직한 기사의 시선이 편하지 않았다.

“역시 안 되겠어...”

“무엇이 말입니까?”

“경 말이오! 경! 제발 부탁이니 그냥 누우시오. 눕는 게 싫으면 나처럼 기대앉기라도 하시오.”

로벨이 짜증 비슷한 것을 보이자 호른 경도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이 등받이 삼은 밑동이 반대편에 기대었다. 서로 등을 마주한 모양새가 되었다. 사주경계하기 좋은 포지션이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그, 그렇소! 이제야 마음이 편하오.”

로벨은 망토자락을 코까지 올린 후 웃음을 삼켰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하고 가슴 언저리가 따뜻했다.

수천의 몬스터 군단을 지척에 두고 있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로벨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이유 모를 포근함을 곰곰이 고찰했다.

‘이게 전우애인가?’

얼추 비슷하게 맞추었다.

@

쿠쿠쿠쿵... 콰쾅-!

로벨은 정수리에서 꼬리뼈까지 울리는 굉음에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기상이 흔히 그렇듯 시야가 어지럽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천둥?’

천둥일 리 없었다. 로벨은 가죽망토를 치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 위로는 어스름한 새벽하늘이 보이고, 발아래에는 허둥거리는 두당 1천 페닝 용병이 보였다.

“포격이다! 포격이야!”

용병들은 포성에 발작을 일으켰다. 머리를 감싸 쥐고 납작 엎드린 흉내쟁이 퍼시발은 그나마 신사였다. 투구를 신고 방패를 얹은 피리 부는 쟝에 비하면 말이다.

“이 머저리들아! 여기가 아니야! 로드릭 시티다!”

간밤에는 몰랐는데, 로드릭 시티 동쪽 탑이 가까웠다. 그 말인즉 버그베어의 몬스터 무리도 아주 가까웠다.

호른 경이 칼집을 휘둘러 진정시켰다. 부끄럽지만, 로벨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공격이 시작되었어.”

“우, 우리가 나온 사이에 함락되는 거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열흘이나 버텼는데 그럴 리 없지!”

“펄프 대장이랑 애꾸눈이랑 기사 나리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쓰고 가죽 망토를 둘둘 말아 모닝스타 안장에 올렸다. 숲에서 벗어나자마자 전력으로 질주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 가자.”

호른 경과 용병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무기를 챙기고 고삐를 잡았다. 잠결에 묻어둔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슬에 젖어 달라붙는 풀잎과 서늘한 새벽바람과 간간이 울리는 대포소리가 현실감을 일깨웠다. 진짜였다. 지금부터 진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로벨 일행은 전장을 우회해 목초지 끝자락에 도착했다. 어린 송아지가 장난치다 망가트린 울타리 너머로 오르락내리락 파도치는 구릉지역이 보였다.

“그런데 저희가 가진 무기로 거인이 아야, 할깝쇼? 모기 주둥이보다 조금 큰 거 같은뎁쇼.”

피리 부는 쟝이 보어 스피어를 거꾸로 쥐어 보이며 의문을 제기했다. 로벨은 멧돼지 잡는 창과 비교가 안 되는 바바 야가의 창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가슴을 찌르면 아야 정도로 안 끝날 거야.”

로벨은 심호흡 후 브리핑했다.

“너희가 길을 열어주면 내가 마무리할 거야. 명심해. 기회는 한 번뿐이야. 방심했을 때 치고 빠져야 해.”

성의도 없고, 대책도 없지만, 전대미문의 암살, 아니, 기습에서 이 정도면 최선이었다.

호른 경과 용병들은 전투마에 올라 로벨 옆에 섰다. 로벨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늙은 기사의 심정으로 외쳤다.

“Charge!”

@

로벨은 기마돌격이 장기였다. 10년 동안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을 지켜온 로벨의 마상창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기마돌격을 할 때 항상 선두에서 채찍질했다. 예외가 있다면 아마 오늘뿐일 것이다.

로벨은 쐐기꼴 돌격 대형에서 제일 안전한 중앙을 자리했다. 버그베어에게 도달할 때까지 창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 주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닝스타가 콧김을 뿜었다. 자기 앞에 있는 변태 말의 궁둥이가 몹시 불만스러웠다.

‘조금만 참아. 나중에 들이박아도 되니까.’

로벨의 자상한 손길 때문인지, 아니면 구릉 아래로 펼쳐진 4천 4백 마리의 고블린 카펫 때문인지 잠시 숨이 멈췄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개개인은 작고 초라하지만, 네 자릿수가 뭉치면 장엄하고 화려했다. 가장 덩치 좋은 고블린의 두 배쯤 되는 트롤이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오크 장인이 만든 조잡한 투석기가 조잡한 돌덩이를 쏘아대고, 고함, 비명, 피비린내, 썩은 내 등이 진동했다. 그 어떤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전쟁화였다.

“저쪽이야!”

로벨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버그베어를 가리켰다. 선두를 맡은 호른 경이 말머리를 살짝 틀었다. 로벨 일행도 그림의 일부가 되어 녹아들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작은 선이었다.

“이랴! 이랴! 이랴앗!”

“비켜라! 주군의 앞을 가로막지 마라!”

호른 경은 ‘딱히 막을 생각이 없었지만, 재수가 없어서 앞에 놓인’ 고블린 가슴에 기다란 라이트 랜스를 꽂아 넣었다. 창날이 세 뺨쯤 뚫고 들어갔으니 절명했을 것이다.

호른 경은 창대가 부러지기 전에 요령 좋게 털어내고 마상용 플레일를 꺼냈다. 머리에 철심이 박혀서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데 원심력까지 더해졌다. 죄 많은 고블린의 이마가 푸르게 깨졌다.

“꾸에엑!”

고블린은 흉흉한 도리깨질을 피해 좌우로 몸을 던졌다. 그리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과묵한 몬트는 침착하게 크로스보우 방아쇠를 당긴 후 우악스럽게 버트를 휘둘렀다.

흉내쟁이 퍼시발의 경우 무기를 써야한다는 발상자체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쟁이 똥자루만한 고블린이었다. 몸통으로 치고 말발굽으로 짓밟으면 끝이었다. 그 외의 용병들도 가진바 재주를 아낌없이 선보였다. 12명의 기마병은 캔버스를 찢는 가위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로벨은 널찍한 호른 경의 백 플레이트 위로 큼직한 버그베어의 얼굴을 보았다. 지저분한 털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호른 경! 길을 여시오!”

호른 경은 침착하게 말머리를 틀었다. 자작나무 숲의 명성이 아깝지 않은 승마술이었다. 호른 경을 뒤쫓던 좌우의 날개도 완만히 휘어지고, 중앙에 숨어 있던 로벨이 맨 앞으로 튀어나왔다. 수년간 연습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좋아! 좋아! 할 수 있어!’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창받침에 걸고 모닝스타의 아랫배를 힘껏 때렸다. 모닝스타는 사자처럼 포효하고 주력을 한 단계 올렸다. 로드릭 시티의 성문보다 커다란 버그베어의 몸뚱이가 삽시간에 커졌다.

“하아아앗-!”

창끝을 위로, 좀 더 위로 올렸다. 버그베어의 가슴이 일직선에 놓였다. 이대로 부딪치면 끝이다.

-좋은 시도였다.

마지막 순간, 눈앞에 벽이 생겨났다. 크기 때문에 정체를 바로 알지 못했는데, 버그베어의 발바닥이었다. 로벨과 로벨의 기마병을 향해 오른발을 뻗은 것이다. 덩치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순발력이었다.

모닝스타는 생존본능에 충실해 방향을 틀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모닝스타만큼 날렵하지 못한 후미의 말들은 발바닥에 차여 와르르- 쓰러졌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걷어차는 모양새였다. 눈 깜짝할 사이 3명의 용병과 3마리의 전투마가 전사했다.

“아, 안 돼!”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거칠게 틀었다. 아직 기회가 있었다. 거인의 몸을 지탱하는 왼쪽 장딴지로 창을 돌렸다.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억지로 방향을 바꾼 탓에 모닝스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니, 쓰러지고 있었다. 로벨의 허리도 기이할 정도로 틀어졌다. 위험천만한 곡예지만, 로벨의 두 눈은 오직 버그베어의 왼 다리를 향해 있었다.

“...닿았다.”

평생을 바쳐온 승마술과 강철 같은 집념의 승리였다.

퍼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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