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지혜
로벨의 예상대로 버그베어는 더 많은 몬스터를 이끌고 돌아왔다.
피가 초원을 물들이고, 시체가 해자를 메웠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은 덕분에 수월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작에 불과했다.
로드릭 시티의 전쟁은 아흐레 동안 이어졌다.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1천 마리의 고블린과 18마리의 트롤과 2마리의 오우거를 사살했다. 그러나 저 멀리 구릉 위로 4천 마리의 고블린이 다시 몰려왔다.
“켈트 남작의 추리에 동의하오.”
가시성의 바이란 남작이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괴물들은 자가분열하는 것이 분명하오. 아니면 나무에서 사과처럼 열리거나.”
“무슨 슬라임도 아니고...”
브릭 자작이 한숨을 쉬었다. 영광스러운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이 피너클(pinnacle) 그늘에 모여 앉아 얼빠진 소리나 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온 용병과 농민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인명피해는 크지 않소. 하지만 사기가 문제요.”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소수의 전문가와 직업 군인 위주로 전쟁을 치르는 기사 시대에 물량전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귀족이건 자유민이건 농민이건 닥치는 대로 모아서 전선에 투입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말도 안 되지. 그런 전쟁이 어디 있어?’
이들이 말하는 동방보다 더 먼 동방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자기 텃밭 외에는 관심 없는 기사들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3백 년쯤 지나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군께서는 어디 계시오?”
“동문을 순시하고 계시오.”
켈트 남작은 무심코 동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인을 죽여야 끝날 것이오.”
로벨의 정부라는 고깔모자 마녀와 수다스러운 중년 용병으로 거인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 큰 괴물을 쓰러뜨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오.”
“그전에 가까이 갈 수도 없잖소?”
아는 것을 모두 실행하지는 못했다. 4천 마리의 고블린을 돌파해서 17피트 크기의 거인을 처치한다는 것은 망상이었다.
“현실적인 대응은 봉신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이군.”
“부른다고 오겠소?”
“거인이 이곳에 있으니 영지의 안전이 확보... 그런데 자작은 왜 아까부터 부정적이오? 거, 은근히 기분 나쁘군.”
“내가 부정적이라고? 무슨 말을? 난 현실적인 것이오!”
“거인이 괴물을 몰고 도시를 공격하는 마당에 현실은 무슨... 싸웠다 하면 지는 검은 숲 패배자들한데 병이 옮은 것 아니오?”
켈트 남작이 코웃음 쳤다. 검은 숲 기사들이 있었으면 당장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뭐라고? 지금 나보고 패배자라 했소?”
브릭 자작이 부들부들 떨었다. 검은 숲 출신은 아니지만, 검은 숲 기사만큼이나 화를 내었다. 역시 정붙인 곳이 고향인 모양이다. 볼탄 반도 토박이란 것에 자부심이 강한 켈트 남작은 그래서 아니꼬웠다.
“기사 종자 시절에는 눈도 못 마주치더니, 주군 덕에 권세 좀 쥐었다고 뵈는 것이 없소?”
“이... 이익... 도저히 참을 수 없군! 브릭 가문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그만! 그만하시오! 위기 상황에 무슨 짓들이오!”
호른 경이 브릭 자작을 막으며 호통쳤다.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라 하면 로벨이나 볼프 후작만큼은 아니어도 기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지역 토너먼트에 출정하면 우승이나 준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정도로 검술, 창술, 승마술이 모두 뛰어났다. 다시 말해 시답지 않은 이유로 결투하고 싶지 않았다.
“저자가 시비를 거니까...”
“저자가 재수 없는 소리를 하잖소.”
브릭 경과 켈트 경은 애들처럼 볼멘소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바이란 경이 헬름의 속가죽을 고치며 허허 웃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소. 진정 좀 하시오.”
“남 말 하지 마시오. 그놈의 헬름을 두 시간째 고치고 있는 경께서 말이오.”
바이란 경은 머쓱해 했다. 그 말은 대화가 2시간째 진척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휴우... 주군께서 옳은 결정을 내리시겠지.”
“항상 그랬듯, 공작께서 대안을 찾으실 거라 믿읍시다.”
기사들은 무기와 투구를 놓고 장시간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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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로드릭 시티 동쪽 성탑을 하나하나 오르내리며 병사와 시설을 점검했다.
세로로 가늘게 난 총안은 사수의 안전을 최대로 보장하지만, 어둡고 갑갑하여 가끔 발작을 일으키는 병사도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나치게 건강한 로벨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주변 사람의 안전을 위해 다른 곳에 배치했다.
“그런 병사보다 화살이 문제죠.”
“강철성에서 가져온 쇠로 부족해?”
“화살을 쇠로만 만드나요. 곧은 나무가 부족하고, 깃털과 아교도 부족해요. 원래는 깃을 4개씩 달았는데, 수량이 모자라 3개로 줄였다고요.”
“3개로 충분하지 않을까?”
“며칠 지나면 3개도 못 붙여요.”
로벨은 궁술에 조예가 없었다. 화살깃이 3개인지 4개인지 관심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자를 아끼지 말고 써.”
“그러다 바닥나면요?”
어린 집사는 씀씀이가 너무 좋은 주인이 한심해서 따져 물었다. 하지만 로벨은 씀씀이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 끝낼 거야.”
로벨의 말을 들은 것은 로벨 옆에 바짝 붙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뿐이었다.
“끝내요? 뭘요?”
“어떻게요?”
로벨은 성탑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적이 성 안에 침입해서 방어시설을 점거하려고 할 때 저항할 수 있도록 일부러 비좁게 만들었다. 창으로 틀어막으면 억센 오크떼라도 밀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계단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설마? 설마 아니죠?”
로벨의 성격을 로벨보다 잘 아는 어린 집사가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로벨은 난처한 듯 웃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어.”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방법이요?” 로벨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버그베어를 암살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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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암살이란 단어를 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상대가 기사도, 인간도 아니니 명예를 따질 필요가 없어서고, 둘째는 정말 극소수의 인원만 동원하기 때문이다.
발가락 슈미츠가 솥뚜껑 같은 투구를 벗고 기름진 뒤통수를 퍽퍽 긁었다.
“기사 나리의 말씀을 요약하면, 북쪽 숲에 숨어 있다가 몬스터가 도시를 공격하면 구릉을 빙 돌아 버그베어를 처치하자?”
“응. 쉽지?”
“쉬울 리가 있습니까!”
필요한 것은 기동력. 오직 기동력이었다. 그 때문에 말을 탈 줄 아는 과묵한 몬트 소대 이하 몇몇 용병만 은밀히 불러 모았다. 숫자는 정확히 10명이었다.
“특별수당 챙겨줄게.”
“수당이 문제가 아니잖습니까요! 이건 미친 짓입니다! 적진 한가운데 뛰어드는 것 아닙니까요?”
“암살이라면 으쓱한 골목에서 쇠뇌로 쏘고 튀는 게 암살이지, 이건 자살입니다. 자살.”
용병들의 반발이 심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배운 수많은 지혜 중 가장 유용한 지혜를 발휘했다.
“성공하면 한 사람당 1천 페닝.”
“......”
반짝이는 쇠붙이는 귀신도 부리는 법이다. 쇠붙이 때문에 조상대대로 물려온 직업 대신 지금 직업을 선택한 용병들이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차피 몬스터야. 사람처럼 호위병이 있을 리도 없고, 말을 타지 않으니 빠르지도 않아.”
“아무리 그래도... 음... 아무리가 아닌가?”
“가만, 가만, 기사 나리 말씀도 일리가 있어. 열흘이나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방심했을 거야.”
용병들이 웅성웅성거리며 희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로벨은 사악한 부르주아처럼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빠지는 사람 몫은 참가한 사람한테 나눠줄 거야. 음... 5명만 가면 2천 페닝이네? 2천 페닝 맞지?”
내 몫을 남이 가져가면 눈이 뒤집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내 몫’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언제 출발입니까요?”
“가족한테 인사하고 와도 될깝쇼?”
로벨은 까칠한 용병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활짝 웃었다.
“지금 당장. 가족한테는 금화자루를 보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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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오랜만에 불려 나와 신이 난 모닝스타를 진정시켰다. 아야와 이야카한테 배웠는지 자꾸 로벨의 볼을 핥으려고 했다. 로벨은 모닝스터의 혓바닥을 막으며 속삭였다.
“안 돼. 지금은 조용해야 해.”
로벨은 용병들을 힐끔 보았다. 로벨과 달리 준비가 철저하여 입마개를 싸고 있었다. 털가죽으로 된 신발까지 신기면 좋겠지만, 주둥이와 달리 발은 여러 개라 시간이 부족했다. 초병이 바뀌는 2경 전에 도시를 빠져나가려면 지금 움직여야 했다.
“이쪽이야. 가자.”
로벨 일행은 아군까지 속여 가며 소리 없이 움직였다. 버그베어가 도시에 첩자를 심었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악마추종자나 다른 수호자가 돕고 있다면 방심할 수 없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케케묵은 이야기지만 전쟁의 진리였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했다.
로드릭 시티 북쪽 쪽문으로 가는데, 성벽 그림자에서 불쑥 팔이 튀어나왔다.
“주군, 어디 가십니까?”
“꺅!”
로벨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로벨의 비명소리에 용병들도 덩달아 놀랐다.
‘꺅?’
‘지금 꺅이라고 했지?’
고상한 기사 나리답지 않은 비명이라 두고두고 놀려먹을 소재였다. 하지만 우선 비밀에 신경 썼다. 병장기를 쥐고 그림자를 포위했다. 그림자는 겁도 없이 한걸음 다가왔다.
“치워라. 나다.”
“아, 호른 나으리...?”
로벨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용병들은 머쓱해서 병장기를 회수했다. 기사에게 무례를 범한 죄책감도 있었다. 호른 경은 신경쓰지 않았다.
“주군, 버그베어를 기습할 생각입니까?”
“으음... 역시 암살보다 기습이 듣기 좋은 것 같...”
“이 인원으로 가면 암살에 가깝긴 하군요.”
로벨은 호른 경의 무장을 살펴보았다. 풀 플레이트 아머에 롱소드와 라이트 랜스를 갖추었다. 그러고 보니 쪽문 근처에서 말 울음소리도 들렸다.
“본인이 가는 걸 알고 있었소?”
그림자 밖으로 나온 호른 경의 입술이 올라갔다. 로벨은 모를 것이다. 호른 경의 신경 한 자락은 항상 로벨을 향해 있으니, 로벨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가는 곳, 자는 곳을 속속히 알고 있었다. 민법이 체계화된 시대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제게도 비밀로 한 것이 서운하군요.”
“어, 어린 집사한테 말해놓았소! 내일 아침에 말해줬을 거요. 경이 도시를 책임져야 하니까...”
“그렇다면 제가 없을 경우도 가정해 대책을 세워놓으셨겠지요?”
“경이 없으면 켈트 남작이 지휘권을 가질 거요. 그런데 그 말은...?”
호른 경은 주먹으로 흉갑을 두드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 박력은 없지만, 이상하게 듬직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로벨의 눈이 한껏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위험한데?”
“알고 있습니다.”
“...죽을지도 모르오. 낙오하면 그냥 버리고 돌아올 거요. 포로 대우나 몸값 협상 따위 기대할 수 없소. 저들에게 잡히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져 먹힐 것이오.”
호른 경의 표정은 한 치 흔들림이 없으나, 용병들의 표정이 백옥처럼 하얘졌다.
‘그런 곳에 저희를 끌고 갑니까요!’
로벨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호른 경은 미소로 답했다.
“주군이 가는 곳이면 어떤 곳이라도 괜찮습니다.”
달빛이 비치는 음습한 도시 외곽. 사지로 향하는 주인공과 기어이 쫓아오는 젊은 기사. 성별을 어떻게 바꿔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애틋함을 느끼기에 감정이 메마른 사람과 장소였다.
“저기, 기사 나으리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이제 곧 2경입니다요. 지금 안 나가면 초병이 옵니다요.”
“제가 여기 근무자랑 친한데, 밤 귀가 겁나 밝은 놈이라... 기왕 갈 거면 서둘러야 하지 않을깝쇼?”
로벨은 복잡한 감정을 수습할 겨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갑시다.”
로벨은 잠깐 고민 후 어디로 갈지 덧붙였다
“승리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