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호감
언젠가 마녀 키르케가 말했듯, 강철성의 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은 로벨에게 호감이 있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무리한 부탁을 늘어놓는 로벨을 미소로 대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버그베어와 싸울 병마(兵馬)와 무기를 달라는 것이오?”
“말(馬)도 주면 좋지만... 그것까지 바라진 않아. 무기만 빌려 갈게.”
“선심 쓰는 척하지 마시오.”
로벨은 강철성의 집무실을 쭉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가구와 최신 유행 갑옷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햇살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는 전대 영주의 초상화가 줄줄이 걸려있었다. 그중에는 낯이 익은 웨일 도트넘과 조지 도트넘도 있었다. 로벨은 문뜩 강철성의 정당한 후계자가 궁금해졌다.
“‘진짜’ 도반 도트넘 백작은 어디 있어?”
“내 오랜 친구를 소개해주었소.”
“친구?”
“그림 리퍼 말이오.”
죽였다는 말을 복잡하게 했다. 로벨의 고운 미간이 꾸겨졌다.
“가문의 대를 끊어놓고 너무 당당하잖아?”
로벨이 책망하자 도반 도트넘 백작이 해명했다.
“공작이 말한 ‘진짜’ 도트넘 가문의 피는 60년 전에 이미 끊겼소. 정숙하지 못한 부인이 외도를 했지.”
로벨은 강철성의 숨겨진 야사에 뺨을 붉혔다. 백작은 기왕 비밀을 밝힌 김에 몇 가지 더 고백했다.
“그리고 본인에게도 도반 도트넘의 피가 흐르고 있소.”
“어떻게?”
도반 도트넘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정체를 아는 사람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먹었구나?”
“개인적으로 ‘물었다’는 표현을 선호하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꽉 쥐었다. 사람처럼 생겨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역시 버그베어와 같은 종자였다.
그랜드 챔피언이 칼을 잡았는데 강철성의 백작은 심드렁했다.
“지난 일은 잠시 잊으시오. 지금 아쉬운 것은 공작이 아니오?”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래서 강철성의 힘을 빌리기 싫었다. 기사의 명예도, 인간의 존엄도 지킬 수 없었다.
“병사와 무기를 빌려줘.”
“공작이 원한다면.”
로벨의 두 눈이 커졌다. 이리 쉽게 승낙할 줄 몰랐다.
“물론 공짜는 아니오. 무기는 정가로 판매하고, 용병계약을 새로 맺을 것이오. 전시수당이 붙으니 싸지 않을 거요.”
“그거야... 가능할 거야.”
어린 집사라면 어떻게든 비용을 마련할 것이다. 내후년까지 툴툴거리겠지만.
“그러면 됐소. 오늘 당장은 조금 힘들고, 내일 오전 중에 지원 가능한 품목과 물량을 알려주겠소.”
“정말? 정말로?”
세상 순진한 로벨도 정상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조금 전에 말했듯 아쉬운 것은 로벨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로벨이 가진 각종 권리나 로드릭 시티의 상권을 요구할 줄 알았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그런 속내를 읽은 듯 해명했다.
“공작에게 진실로 바라는 것은 하나요. 버그베어를 영면하게 하시오. 후회와 분노만 남은 가엾은 왕을 쉬게 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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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강철성의 지원군과 함께 로드릭 시티로 돌아왔다.
강철성 징집병 70명, 프리랜서 용병 120명, 숏 스피어 330자루, 워 해머 330자루, 롱보우 화살 2,200발, 크로스보우 쿼럴 3,500발, 가공이 끝난 철주괴 4400파운드, 가죽, 가죽끈, 모래자루, 귀리, 보리, 콩 등등이었다.
로벨이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오자 암울한 로드릭 시티 분위기가 반전했다.
농기구를 쥔 농민병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무기를 지급하고-결코 공짜가 아니다- 속성으로 훈련시켰다. 자유민도 도시를 지키기 위해 수비대에 자원했다. ‘이길 수 있을까?’에서 ‘이기면 무엇을 할까?’ 분위기가 되었다. 붉은 산의 악몽 버그베어가 4천 마리의 고블린을 몰며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외팔이 더치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종족 특성상 굵고 억센 털이 빠르게 자라는데, 신체 특성상 관리가 쉽지 않았다. 항상 오른쪽 수염이 왼쪽 수염보다 거칠고 지저분했다. 물론, 그 사실을 지적할 만큼 무례하거나 용감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례에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라 사실 동의어였다.
“제기럴! 왜 또 우리야? 거지같은 호수성이나 공격하지!”
볼탄 반도의 흔하디흔한 구릉 위로 버그베어와 몬스터 군단이 올라왔다.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거인 버그베어였다.
붉은 산 요새에서 싸워본 울프 용병단도 의기소침해졌으니, 거인을 처음 본 농민병과 자유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밤 탈영병이 두 자릿수로 나올 것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며 고했다.
“오른쪽 눈에 흐룬팅이 꽂혀있군요. 우습지만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로벨과 여러 용병이 질린 표정으로 애꾸눈을 보았다.
“이 거리에서 눈알이 보이냐?”
“사람 눈알보다 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닐 텐데...”
로벨은 흐룬팅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효과가 있어서 햇빛에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다. 로벨과 재회하여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면 흐룬팅이 분명했다.
“왜 안 뽑은 거지?”
허풍쟁이가 눈에 박힌 가시를 뽑는 시늉하며 말했다.
“손가락이 굵어서 손잡이가 안 잡히나 봅니다요.”
“왜? 직접 뽑을 필요 없잖아?”
고블린이나 오크처럼 작은 괴물도 있는데, 여태껏 뽑지 못한 것을 보면 취향이 독특하거나 부하를 믿지 않는 듯했다. 마녀 키르케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해명했다.
“평범한 몬스터는 요정왕이 축복한 칼을 만지지 못해요.”
로벨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대다수 용병과 시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천 마리의 고블린이 휘두르는 수천 개의 곤봉이 중요했다.
“끄, 끔찍하게 많잖아!”
“저놈들을 막아야 한다고...?”
펄프 대장이 성벽 위를 부지런히 오가며 격려했다.
“저것도 붉은 산에서 많이 줄인 거야! 저기에 2배였어!”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로벨이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깊어. 다리를 올리면 충차도 접근하지 못해. 싸워볼 만해.”
“문제는 저 괴물 거인이 아닙니까요.”
붉은 산 요새가 함락된 것도 버그베어를 막지 못해서였다. 로벨은 등 뒤에 비스듬히 찬, 그래도 길이가 남아 머리 위로 한창 올라간 바바 야가의 창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와 다를 거야. 이번에는 이걸 찔러줄 테니까.”
어린 집사나 허풍쟁이에게 들게 하지 않고 직접 차고 다니는 것이 각오를 알 수 있었다. 붉은 산 요새에서 흐룬팅이 아니라 바바 야가의 창을 꽂아 넣었으면 싸움은 진작 끝났을 것이다.
“영주님! 놈들이 옵니다!”
괴물답게 항복권유 같은 절차는 없었다. 애당초 항복해봐야 잡아먹히겠지만.
로벨은 징그러운 벌레처럼 꾸물거리는 고블린 군단을 보고 명령했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내 허락 없이 내 땅을 밟은 대가를 치러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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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시티의 모든 주민은 로벨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북쪽과 남쪽을 오가며 자금을 모아 죽을 둥 살 둥 만든 도시 방어시설이 제값을 톡톡히 했다.
겁도 없이 해자에 뛰어든 고블린은 겨우내 쌓인 눈이 녹으며 불어난 수량에 덧없이 휩쓸려갔다. 체구가 좋거나 수영실력이 좋아 어찌어찌 버텨도, 성탑의 총안에서 쿼럴이 쏘아져 편히 쓸려가게 도와줬다.
트롤 한 마리가 걸리적거리는 고블린을 뻥뻥 차며 해자 안으로 뛰어들었다. 덩치가 덩치라 물살 따위에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對)트롤용 무기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Fire!”
성탑 꼭대기에 배치된 팔코넷이 불을 토했다. 완벽에 가깝게 동그란 포탄이 쏘아졌다. 성벽 공사가 끝나 실업자가 된 석공들이 먹고살기 위해 눈물로 깎은 포탄이었다. 정확도야 말할 것이 없었다.
“꾸웨엑-!”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풀어 깃발처럼 세우고 버그베어에게 집중했다. 와이트와 마찬가지로 우두머리를 해치우면 나머지 몬스터는 자연히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버그베어는 영리하고 조심스러웠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마법 무기를 잔뜩 가진 로벨이 있는데 가까이 갈 이유가 없었다. 교훈은 오른쪽 눈으로 충분했다.
로벨과 버그베어는 1마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발아래에서 인간과 괴물이 피를 뿌리고 비명을 질러도 흔들림이 없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와라.’
로벨의 생각이 전해졌을까, 버그베어는 목울음 소리를 내었다.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네 담장을 허물고, 네 부하들을 잡아먹은 후, 너도 죽여주마.’
전투의 양상은 붉은 산과 비슷한 듯하면서 다르게 흘러갔다. 해자의 역할이 아주 커서 성벽에 접근하지 못했다. 어찌어찌 물을 건너도 성벽이 높아 감히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탑과 보루의 총안에서는 화살이 쉬지 않아 쏘아지는데, 고블린의 조잡한 투사무기로는 반격할 수 없었다. 성벽 위의 조심성 없는 병사 몇 명 떨어트린 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자 공포를 모르는 몬스터도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사방 어디를 봐도 동족의 시체뿐이니 용기를 잡아먹는 불신이 생겨났다. 버그베어도 이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고의 전쟁 전문가가 심혈을 기울여 축성한 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크롸아아악-!”
버그베어가 성난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인간이 볼 때는 그냥 포효지만, 괴물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성벽 아래에서 우당탕하던 고블린이 일제히 머리를 돌렸다.
“크와악-! 크락-!”
버그베어가 다시 소리치자 수천의 고블린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시체에 깔려서 끙끙거리던 고블린도 엉금엉금 기어서 빠져나가고, 화살꽂이가 되어 전전긍긍하던 트롤도 어벙하게 팔을 휘저으며 도망쳤다. 일사불란한 후퇴라 대응할 틈이 없었다.
“어, 어어? 도망간다?”
쇠와 돌과 살의를 쏟아붓던 병사들이 동작을 멈췄다. 밀물처럼 와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몬스터 무리가 신기하고, 시체가 즐비한 고향땅이 새로웠다.
“우리가 이긴 거야?”
“그, 그렇지? 도망가잖아?”
승리의 첫 소감은 떨떠름함이었다. 전쟁경험이 부족한 로드릭 시티 농민병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무리를 짓고 싸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승리 후 해야 할 일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다! 저 빌어먹을 괴물이 도망간다!”
“우리의 승리야! 우리가 승리했어! 만세! 만세!”
“로벨 로드릭 공작 만세! 로드릭 시티 만세!”
천둥 같은 함성이 도시에 울려 퍼졌다. 집 안에 숨어있던 노인과 아이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승리란 외침에 미소 지었다.
“역시 우리 영주님이야. 우리를 지켜주실 줄 알았어.”
“옛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영주님, 감사합니다.”
로벨은 끓어오르는 승리의 함성에 물들지 않았다. 몸을 돌려 사라지는 버그베어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대로 끝날 리 없었다.
“이제 시작이야.”
로벨의 말을 들은 것은 로벨과 오랜 시간 함께한 백전연마의 기사와 용병뿐이었다.
“다시 올까요?”
“응. 당연히.”
역사에 기록될 ‘거인 전쟁’이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