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32화 (332/605)

332화. 마왕

로벨은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두 눈이 홍옥처럼 붉게 빛났다. 모닥불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마법사만이 알 수 있었다.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어리둥절해서 중얼거렸다. 로벨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전해졌다. 인지의 존재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기운, 마도(魔道)의 기운이었다.

‘설마? 에이, 설마?’

마녀는 몇 가지 가능성을 점쳤다. 로벨 로드릭의 무용담은 ‘약간의’ 과장과 함께 포비아 왕국 전체에 퍼졌다. 로벨이 주먹으로 바위를 깨고, 한걸음에 산을 넘는다고 믿는 사람이 상당했다. 그런 믿음이 마법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혹은 마도의 수호자와 자꾸 엮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둘 다 일지도 몰라.’

그저 유명한 것으로도 안 되고, 마도의 수호자와 접촉한 것으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샘 포클은 진작에 신(神)이 되었을 것이고, 늑대의 왕에게 죽은 기사들은 모두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비밀이 더 있었다. 로벨의 영성(靈性)은 로벨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실체하는 로벨은 무엇일까?

로벨이 아닌 로벨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우리 말고 아주 큰... 큰 것이 있다니까?”

“큰 똥이요?”

“그거 포함해서!”

로벨은 생명유지활동의 최종결과물이 적나라하게 거론되자 얼굴을 붉혔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간신히 이해하고 국자 대신 배틀 액스를 잡았다.

“그 괴물 거인이 여기까지? 아, 아니지, 그냥 트롤 아닐까요?”

“오우거가 아닐까? 미노타우로스일지도 몰라.”

로벨과 허풍쟁이는 모닥불을 등지고 수풀을 경계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괴물이나 변이 있는 곳이 영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불을 피우고 음식 냄새를 풍겼으니 필히 화가 났을 것이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칼날을 비틀며 마른 침을 삼켰다.

“크르르릉...”

로벨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어둑어둑해진 숲 저편에서 크고 무거운 것이 다가왔다. 쿵. 쿵. 우지직- 쿵. 겨울을 이겨낸 꽃망울과 봄을 기다려온 새싹들이 무참히 짓밟혔다. 마녀 키르케는 의심을 잠시 치우고 떡갈나무 지팡이와 아쿼버스 중 무엇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했다. 로벨이 송곳니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왔다.”

불빛이 닿는 곳에 거대한 것의 주인이 등장했다. 로벨은 기합을 지르며 아론다이트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피를 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회색곰이었다.

“...곰이네?”

“그냥 회색곰이군요.”

“아, 난 또 뭐라고...”

누가 보면 정신병자로 생각할 반응이었다. 회색곰을 보고 저런 맥 빠진 반응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워낙 기상천외한 괴물과 드잡이하다 보니 회색곰 정도는 귀여워 보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짐승은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짐작건대, 사람의 덩치가 포유류 중에서 그리 작은 편이 아니고, 옷에서 나는 쇠냄새와 가죽냄새가 위험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눈알이 뒤집히면 물불 안 가리고 덤볐다. 그러고 나면 사람이 보기보다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 먹잇감으로 삼았다.

“인간을 공격한 짐승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유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아래로 내렸다.

“반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면 굳이 죽일 이유가 없어.”

회색곰은 송곳 같은 이빨과 단검 같은 발톱을 보이며 인간을 위협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기절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신화급 괴물들을 상대해 온 로벨을 겁주기에는 부족했다.

“염장고기 남는 거 있지?”

“고, 곰한테 주려고요?”

“먹을 걸 주면 덤비지 않을 거야.”

마녀 키르케는 허둥거리며 염장고기를 꺼냈다. 소금에 푹 절인 거라 끈적거렸다.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몸에 안 좋을 텐데요? 병나면 어쩌죠?”

“그럼 야생곰을 처치한 셈 치자.”

마녀 키르케는 아랫입술을 삐죽이고 고기 한 덩이를 던졌다. 회색곰은 시큼한 냄새에 끌려 무심코 앞발을 뻗었다. 어린 집사의 머리통만한 발바닥이 놀라웠다.

“그거 줄 테니까 하루만 쉬게 해줘. 조용히 잠만 잘게.”

“...곰이 공용어를 압니까요?”

어쩌면 아는 듯했다. 회색곰은 고기냄새를 킁킁 맡다가 몸을 돌렸다. 화가 풀린 듯 올 때보다 조용한 몸짓으로 사라졌다.

“가, 갔습니다요. 휴우.”

허풍쟁이가 작게 한숨 쉬었다. 오우거나 트롤보다 낫지만, 그래도 사냥꾼의 악몽이라 불리는 그리즐리였다. 피 흘리지 않고 쫓아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불안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먹고 모자라서 다시 오면 어쩝니까요?”

“맞아요! 너무 짜서 입맛 버렸다고 담백한 고기를 먹으러 올지도 몰라요!”

“...곰이 너희 같진 않을 거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회수하고 불 가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야생 짐승은 불을 무서워했다. 회색곰이 얌전히 떠난 것이 고기 때문인지, 모닥불 때문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것도 둘 다 아닐까요.”

“그것도?

“웁스! 못들은 걸로 하세요!”

@

마녀 키르케는 혹시나 회색곰이 돌아올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허풍쟁이가 괜한 소리를 한 탓도 있었다.

“술에 취해 숲에서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서 눈을 뜨니까 회색곰이 하반신을 뜯어먹고...”

“꺄아악! 그만! 그만!”

로벨은 도시괴담에 괴로워하는 마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숲의 마법사 드루이드 아니었어?”

“아닌데요! 사랑과 우정의 드루이드인데요!”

“아, 그런 거야?”

하지만 뇌물을 받은 곰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로벨 일행은 숲 그림자가 걷히자마자 강철성으로 출발했다. 곰이 나왔으니 늑대도 나오지 않을까, 근거 없는 걱정을 했는데, 역시 근거가 없었다. 북쪽 숲이 남쪽 숲이 될 때까지 아무 탈도 생기지 않았다.

“어라? 왜 이리 휑하죠?”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남쪽 숲’이 되었다. 숲 일부가 심하게 벌목된 탓이다. 나무 밑동이 수확이 끝난 귀리밭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나무를 베어 간 것은 아니었다. 로벨은 300년 역사의 시골 영주답게 금방 알아보았다.

“참나무만 베어갔어.”

“참나무요? 왜요?”

“아마도... 연료일 거야.”

참나무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한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이 화력 좋은 땔감이었다.

“겨울도 지났는데 땔감이 왜... 아하!”

마녀는 역시 영특했다. 로벨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철광 제련에 쓰이는 연료였다.

영주의 숲은 영지의 보고인데, 이처럼 벌목한 것을 보면 작금의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것 같았다.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아니면 저들에게 좋은 일인지... 그자를 만나야 알 수 있겠지...”

로벨이 로벨답지 않게 중얼거리자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가 서로를 보았다.

‘기사님이 좀 이상하죠?’

‘오늘 따라 더 그렇구만.’

마녀 키르케는 로벨에게 깃든 마법의 힘을 걱정했고, 허풍쟁이는 붉은 산 요새의 첫 패배가 후유증을 남겼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로벨은 도반 도트넘 백작을 만나기 싫었다.

“꼭 만나야 할까? 그냥 편지를 쓸까?”

“여기까지 와서요?”

“...해본 말이야.”

@

로벨 일행은 벌목장을 지나 강철성으로 향했다.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와 고깔모자를 쓴 마녀를 막을 사람은 흔치 않아서 성문 앞까지 편안하게 찾아갔다.

강철성의 문지기는 기사와 용병, 그리고 ‘나 마녀’라고 광고하는 마녀 모습에 긴장했다.

“이곳은 도반 도트넘 백작님의 성입니다.”

기사에게 말했지만 용병이 대답했다.

“볼탄 반도의 공작이자 포클랜드의 후작이자 늑대성의 군주이자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자 검은 숲 제임스 가문의 친구이자 폭풍성의 정복자인자 덩굴성의 구원자이자 무적무패의 기사이자...”

업적이 서너 개만 되어도 장엄한 소개문이 되는데, 로벨은 장엄함이 지나쳤다. 문지기가 앞 문장을 까먹지 않은 것이 행운이었다.

“볼탄 반도의 공작이면... 히익! 로벨 로드릭 공작!”

허풍쟁이는 문지지가 소개문을 잘라먹자 인상을 꾸겼다. 옛날 같으면 쓸데없는 잡소리가 생략되어 기뻐했을 텐데, 어느덧 기사의 몸종이 되어서 기분이 나쁘다.

“영주님은 안에, 안에 계십니다!”

로벨은 고개를 까닥였다.

“안내해.”

“제, 제가 말입니까?”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문지기는 문지기의 역할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길게 하지 않았다. 성문을 잠시 비우는 것이 그 ‘로벨 로드릭’을 성 안에 풀어놓는 것보다 나은 듯했다. 강철성에서 로벨을 어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로벨은 강철성 안뜰을 지나며 분위기를 캐치했다. 버그베어와 몬스터 군단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는 강철성도 피할 수 없었다.

아성 앞에는 울프 용병단이 고용하지 않은 어중이떠중이 용병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무기와 갑옷이 좋아진 것이 계약금을 두둑이 받은 듯한데, 전의는 보이지 않았다. 버그베어의 소문이 퍼지면서 겁을 먹은 듯했다.

‘너희 고용주도 버그베어랑 같은 종자야.’

로벨은 한 치 앞을 못 보는 용병이 안타까웠다.

성에 출입하는 영지민이 상당히 많았다. 늑대성의 경우 계란과 우유를 진상하는 아낙이나 유난히 심심한 꼬마들이 출입하는데, 이곳은 조금 달랐다. 덩치 좋은 대장장이와 무기를 가진 농민병-아마도 자경단-이 출입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을 만나러 온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그 아래에서 일하는 행정관이나 수비대장을 찾아갔다. 길게 풀어 설명했는데, 요약하면 어수선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갈 수 없어서... 집사장을 불러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지기는 아성 2층 계단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로벨은 이해했다. 늑대성에서도 어린 집사 이하 최측근을 제외하면 2층에 올라올 수 없었다. 아성은 영주의 집이니, 집주인의 권위와 안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버그베어와 싸울 생각일까요?”

마녀가 조그맣게 물었다. 성 안의 분위기가 험악하니 그리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도의 수호자는 마도의 수호자와 싸우지 않잖아?”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이 경우는... 음... 좀 더 복잡해요.”

직접 칼을 겨누고 싸우지는 못하지만, 대리인을 보내거나 군대를 보내 싸우는 일은 종종 있었다. 로벨도 뜻한 바는 아니지만 뱀파이어 군주의 사주(?)를 받아 와이트를 처치했다.

“백작을 만나면 알게 되겠지.”

로벨은 집사장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2층 계단에서 나타난 것은 강철성의 사용인이 아니었다.

“이런, 공작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어서 오시오.”

강철성의 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이 환한 웃음을 띠고 계단을 내려왔다. 로벨은 흐룬팅이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깝고 불안했다.

“이런 말은 삼류 악당이나 하는 거지만, 본인의 인성이 못난 탓에 참지 못하겠소. 이해하시오.”

도반 도트넘 백작은 로벨의 경계심을 비웃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 말대로 되지 않았소?”

마왕이 있다면 분명 저 자일 것이다. 아주 많이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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