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우정
로벨 로드릭 군은 붉은 산에서 철수했다. 자신만만하게 요새에 입성한 지 아흐레 만이었다.
22명의 기사가 전사했고, 300여 명의 병사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실종자는 괴물의 배를 가르기 전에는 찾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피해가 적은 것은 로벨 로드릭이 버그베어의 오른쪽 눈과 오른손 손가락을 파괴하여 물러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로벨 역시 애병 흐룬팅을 잃었다.
로벨이 빈 칼집을 만지며 우울해하자 마녀 키르케가 위로했다.
“아녜요. 어쩌면 잘한 일이에요.”
“응?”
“흐룬팅에 찔렸으니 재생을 못할 거예요.”
로벨의 29년 역사에서 최악의 패배였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면 하인즈 자작과 붉은 산의 영지민이 산 아래로 무사히 피신했다는 것이다. 악착같이 싸운 작은 보람이었다.
몬스터 군단은 도망가는 인간을 쫓지 않았다. 역시 버그베어의 부상 탓이었다.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의 칼은 인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생물에게 근원적인 타격을 주었다.
“시간을 벌었다는 말이구나.”
말(馬)보다 빠른 것이 말(語)이라 로벨 로드릭 군의 패배 소식이 볼탄 반도 전역에 전해졌다.
지난 10년간 무적무패로 불려온 기사가 패했다는 소식에 세상이 들썩였다.
국경의 성이 함락되었을 때는 한가로운 심정으로 ‘거 잘 좀 싸우지. 어쩌다가 그랬데?’ 했는데, 붉은 산이 함락되고 로벨이 후퇴하자 자못 심각해졌다.
로벨의 패잔병이 로드릭 시티에 도착하자 위기감은 불안감과 결탁해서 도시 분위기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농부는 쟁기를 멈추고, 직공은 베틀을 치우고 성문 주위에 몰렸다.
눈치 없이 만세를 외친 소년은 주위의 제지로 끌려가고, 꽃잎과 색종이를 가져온 처녀는 우울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승리하고 돌아온 병사를 환영하는 일에 익숙해서 패배한 병사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펄프 대장, 부대를 유지해. 물자를 보충하고. 그리고 또...”
로벨 역시 낯설었다. 성 밖의 전쟁을 영지까지 가져온 것은 처음이었다. 무기와 물자를 다시 준비해야 했다.
“가장 급한 것은 병력입니다. 몬스터의 대군을 막기에 턱없이 모자랍니다.”
붉은 산 요새에서 많이 해치웠지만, 아직도 4, 5천 마리의 고블린이 남아있었다. 활과 화살, 그리고 화살을 날려 보낼 손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로벨이 주저하며 물었다.
“영지민을 징집해야 할까?”
전쟁에 영지민을 동원하는 것은 최후의 수이자 최악의 수였다. 경제의 주체가 되는 젊은 남자를 희생하면 경영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영지민을 동원할 바에 백기를 걸고 금화를 제시하는 것이 싸게 먹혔다. 금을 좋아하는 상대라면 말이다.
“열다섯 살에서 마흔 살까지. 사지 멀쩡한 농민을 징집하겠습니다.”
펄프 대장은 징집과 징발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상대는 식인을 즐기는 괴물이었다. 도시가 함락되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다. 결국, 로벨도 결심을 굳혔다.
“자유민에게 세금을 걷고, 함께 싸울 것을 제안해봐. 여자와 아이의 숫자를 파악해서 늑대성으로 피신시켜. 그리고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로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농민이 가진 무기라 해봐야 낫이나 쇠스랑이 전부였다. 낫으로 베고 쇠스랑으로 찍어도 죽기야 하겠지만, 광기에 젖은 몬스터 군단을 상대하기는 많이 부실했다.
“강철성이야.”
“예? 강철성이요?”
로벨은 도반 도트넘 백작의 예언을 떠올렸다. 기분 나쁘지만, 그의 말대로 되고 있었다.
“그곳에 무기가 있을 거야. 어쩌면 다른 필요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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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프란시스 가문의 봉토이자 로벨의 영지인 볼탄 반도 남부가 혼란에 빠졌다. 붉은 산을 차지한 수천 마리의 몬스터 때문이다.
붉은 산을 넘으면 남쪽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버팅거 호수를 지나 동부평야로 갈 수도 있고, 구름평야를 지나 남해로 갈 수도 있고, 늑대도로를 타고 서쪽 도시들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볼탄 반도의 영주들은 혹여나 몬스터가 자신의 영지로 올까 성문을 꽁꽁 닫고 거북이 흉내를 내었다. 로벨의 소환에 응하지 않을뿐더러 로벨을 따라 종군한 영주들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귀향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오!”
호른 경이 어금니를 깨물고 호통쳤다. 충성을 맹세한 봉신은 1년에 40일을 종군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봉토와 복무일에 따른 방패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영주들은 종군일을 채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패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
“주군께서 한번 패했다고 그러는 거면... 내 저것들을...”
호른 경이 분을 삼키지 못하자 '명예로운 부상'으로 목발을 짚은 켈트 남작이 만류했다.
“그럴 리 있겠소. 가족과 고향이 걱정되어서겠지. 경도 자작나무 숲이 위기에 처하면 어찌할지 모르잖소.”
로벨 곁에 남은 기사는 로벨이 공작이 되기 전부터 따른 원조(?) 봉신뿐이었다. 세월이 깊은 만큼 충성심도 깊다고 말하면 듣기 좋겠지만, 고백하자면 호른 성, 바위성, 가시성 등은 늑대성의 지척이라 영지로 돌아가는 것보다 로벨과 함께 있는 게 안전했다.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켈트 남작은 고향으로 돌아간 봉신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벨도 그러했다.
“나도 기대하지 않았어.”
“주군...?”
“영주님!”
로벨은 늑대성에 남은 기사와 용병들을 차례로 보았다. 호른 경, 메튜 경, 켈트 남작, 바이란 남작, 펄프 대장, 애꾸눈, 외팔이, 겁쟁이, 과묵한 몬트, 싸움개 등등...
“버그베어가 동쪽이나 남쪽으로 가도, 우리가 돕지 못하는 것은 똑같아. 원래 그런 거잖아.”
힘이 있을 때는 잘 뭉치지만, 힘이 빠지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이 시대 주종관계였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켜야지. 농민징집은 어떻게 되었어?”
“로드릭 시티에서 330명, 뉴 로드릭 마을에서 62명이 모였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독자(獨子)와 장남은 제외했습니다.”
“울프 용병단과 합치면... 에... 음...”
세 자릿수 셈이라 기사와 용병에게 어려웠다.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고 속삭였다.
“922명이요.”
“정말? 꽤 되는데?”
로벨이 미소 짓자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는 5배가 넘어요. 게다가 투구걸이 겸 창받침대 수준의 농민병이 거인과 고블린을 상대할 것 같지 않고요.”
“식량은 시장 상인에게 징발한다고 해도 무기와 갑옷이 없습니다. 빨랫방망이보다 훌륭한 장비를 갖춘 농민은 오십이 안 됩니다.”
보통은 그래도 충분하겠지만, 보통 상황이 아니라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고무적인 사건이 있었다. 검은 숲의 봉신 머를 브릭 자작이 까마귀 성과 가시나무 성의 병사 120명을 이끌고 찾아왔다. 어느새 늠름하게 자란 브릭 자작이 크고 우렁차게 외쳤다.
“주군!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우정을 증명하는데 죄송할 것이 무엇 있소? 잘 와주었소!”
로벨은 늑대성 밖으로 나가 자신이 봉한 첫 번째 기사를 환대했다. 얼마 안 되는 병력이지만 로드릭 시티의 희망을 되었다. 시민과 징집병은 국왕과 공후작의 군대도 올 거라 생각했다. 아주 잘못된 믿음은 아니었다.
로벨은 생업을 놓고 늑대성 앞에 모인 영지민을 둘러본 후 자존심을 찢어 하수구에 던졌다. 병사와 무기를 구할 빠른 방법이 있는데 그깟 자존심 때문에 가만있는 것은 미련한 일이었다.
“강철성으로 가자.”
“지금요?”
“지금이니까 가야지.”
지금이 아니면 갈 이유가 없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 제이콥만 대동하고 몰래 북쪽 숲으로 나갔다. 지난번에 비하면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구성원이었다. 버그베어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설령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숲을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나으리를 믿을 수 있습니까요? 그쪽도 뭐냐, 그거 아닙니까요?”
말구종 겸 길잡이 겸 짐꾼인 허풍쟁이가 물었다. 로벨을 가장 오래 따라다닌 용병이라 아는 것도 많았다. 로벨은 그런 허풍쟁이를 경계했지만, 비슷하게 보고 들은 것이 많은 마녀 키르케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지금까지 행동을 보면 인간을, 아니죠. 아니야. 기사님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알아요. 그렇지 않으면 철을 모으고 주괴를 만들며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겠죠.”
“버그베어인지, 버그울프인지 하는 놈하고 손잡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잖소.”
“‘울프’란 단어 좀 조심해서 쓰실래요? 저 그쪽으로 예민하거든요?”
“나도 울프요. 울프 용병단 최고참이란 말이지. 어험!”
경계는 기우였다. 아는 것이 많아봐야 허풍쟁이고 마녀였다. 몇 마디 티격태격하다가 영양가 없는 잡소리로 빠졌다. 로벨의 비밀을 눈치 채려면 10년은 더 걸릴 듯했다.
북쪽 숲을 가로지르면 강철성까지 하루하고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 같을 때 권장하지는 않았다. 초봄에는 굶주린 곰이나 길 잃은 늑대와 조우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고블린도 출몰했다. 10년 전 웨일 도트넘 백작도 이 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로벨은 점점 짙어지는 나무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해가 지면 위험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출발하자.”
로벨과 달리 두 발로 걸어온 일행이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로벨이 모닝스타를 먹이고, 씻기고, 달래는 동안 숙달된 여행 전문 용병 허풍쟁이가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고 잠자리를 가꾸었다.
“에헴. 에헴. 피어나라, 파괴의 불꽃!”
마법사가 있어서 좋은 점은 부싯돌을 꺼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풍쟁이는 마른 나무에 타닥타닥 옮겨 붙는 불씨를 보고 중얼거렸다.
“...진짜 하찮은 가치구먼.”
“엥? 뭐라고 했어요?”
“아니오. 아무것도.”
항상 그랬지만 허풍쟁이의 노고가 컸다.
모닥불에 걸어놓은 냄비가 지글지글 끓자 끌로 써도 될 비스킷과 망치로 써도 될 염장고기를 넣고 뚜껑을 닫았다. 후추나 마늘 같은 향신료를 넣으면 한결 좋지만, 미각을 상실한 듯한 고용주는 그쪽으로 관심이 없었다. 자비로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비쌌다.
“어? 기사 나리 어디 가셨소?”
“볼일 보러 가셨어요.”
체면을 중시하는 기사 나리라 아랫사람 앞에서 바지춤을 풀지 않았다. 허풍쟁이는 그러려니 하고 국자를 꺼냈다.
염장고기는 이름 그대로 소금 덩어리라 따로 간을 볼 필요 없었다. 소금을 추가하기는커녕 소금기를 빼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먹으니까 변비가 오지.’
허풍쟁이는 호른 경 이하 추종자 앞에서 꺼냈다가 칼 맞을 생각을 하며, 로벨이 오면 한마디 하기로 마음먹었다. 10년 경력의 가이드 겸 몸종 겸 요리사면 한마디쯤 해도 되는 짬이었다.
로벨이 앙상한 수풀 뒤에서 주춤주춤 나왔다. 허풍쟁이는 히쭉이며 말을 붙였다.
“쾌변하셨습니까요?”
“...내꺼 아니야.”
로벨이 정색해서 대답했다. 허풍쟁이는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그랜드 챔피언을 좀 더 놀렸다.
“기사 나리 말고 볼일 보러 간 사람이 없는뎁쇼?”
로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지? 그럼 역시...”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허풍쟁이는 깜짝 놀라 국자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공작 나리라지만, 농담 몇 마디에 칼부터 뽑다니! 10년 우정이 부질없구나!’ 따위를 생각하는데, 로벨은 몸을 돌려 숲을 경계했다.
“대변(大便)이 있어. 크기를 봐서 사람보다 훨씬 큰 놈이야.”
“예?”
허풍쟁이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잠시 뒤 내용을 이해하고 다시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예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