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30화 (330/605)

330화. 함락

붉은 산 요새의 로벨 로드릭 군은 트롤이 화내든 말든 위대한 기사의 귀환을 환영했다. 저 무시무시한 괴물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13마리를 박살냈으니 굉장한 업적이었다.

“만세! 만세! 기사 나리 만세!”

“휘익-! 진짜 멋집니다요!”

개선식 느낌이 나는 것이 벌써 이긴 것 같았다.

로벨은 기사들의 피해를 점검했다. 11명이 낙마했고, 9명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3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고작 두 번의 돌격으로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페닝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기사들이라 피해가 막대했다.

“두 번은 못하겠어.”

로벨이 파나케아 투구를 벗으며 탄식했다. 초봄의 산 중턱이라 날이 서늘한데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펄프 대장이 제일 깨끗한 헝겊을 골라 건네주었다.

“두 번째는 필요 없을 겁니다. 트롤을 열 마리 넘게 쓰러졌으니, 다음 전투에는 대포와 쇠뇌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사항이었다.

로벨 로드릭 군은 꺼낼 수 있는 카드를 모두 꺼내지만, 버그베어의 몬스터 군단은 아직 남은 패가 있었다. 버그베어 본인이었다.

해가 저물 때쯤 몬스터가 다시 공격해 왔다. 고블린을 앞세우고, 트롤을 양옆에 끼고, 직접 요새를 향해 다가왔다. 희망이 차올랐던 병사들은 기뻐한 만큼 좌절했다. 버그베어는 그 무시무시한 트롤이 가냘파 보일 만큼 대단했다.

“쇠뇌를 장전해! 거인은 포병에게 맡기고 고블린을 저지한다! 명심해! 고블린이 표적이다!”

“핸드캐논은 거인을 조준하고! 팔코넷는 가까이 오는 트롤을 순차 사격한다! 야! 듣고 있냐! 거인은 신경 쓰지 말고 트롤을 쏘라고!”

펄프 대장이 바쁘게 명령을 하달했다. 어제부터 생각해둔 대응이라 망설임이 없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로벨은 한뼘 정도 자란 바바 야가의 창을 흘겨보고 흐룬팅을 잡았다.

‘트롤 따위한테 쓰면 안 됐어.’

하루에 두 번 공격할 줄 몰랐다. 몬스터에게는 재정비 개념이 없었다.

“조준! 조준!”

펄프 대장의 명령에 북군, 남군, 농민병, 프리랜서 가리지 않고 가진 투사병기를 겨냥했다. 돌촉을 엮은 기다란 사냥용 화살부터 쇠촉을 날카롭게 갈아 끼운 전쟁용 쿼럴까지 다양했다.

“발사!”

“발사!”

크고 작고 길고 짧은 화살이 성벽 밖으로 쏟아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폭포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정신이 번쩍 드는 물벼락이 아니라 피부를 찢고 신경을 지지는 불벼락이었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신체 일부를 붙잡고 꼬꾸라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계속 쏴! 쉬지 말고 쏴!”

울프 용병단 이하 성벽 수비병은 쓰러진 동족을 짓밟으며 달려오는 고블린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누가 괴물 아니랄까봐 하는 짓도 괴물 같았다.

자그마한 고블린 사이로 몸집이 두 배가량 큰 트롤이 나타났다. 겁쟁이 데비는 화승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포수에게 소리쳤다.

“지금이야! 점화!”

그 명령을 기다렸다. 사수가 고정한 핸드 캐논 약실에 화승을 찔러넣었다. 화약이 연소하는 타닥- 탁- 푸쉬이- 소리가 들리더니 1초가 안 되어 폭음이 되었다.

콰과과광-!

특별히 제작한 쇠구슬이 쏘아졌다. 3발은 트롤 주위의 엄한 고블린을 조각냈지만, 2발은 정확히 트롤의 몸통을 꿰뚫었다.

“꾸룩?”

트롤은 지방이 가득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앞뒤로 주먹만한 바람구멍이 나서 핏물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꾸물꾸물한 내장 비슷한 것도 흘러나오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트롤은 무릎을 꿇고 장기를 주워 뱃속에 욱여넣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재장전! 재장전! 꾸물거리지 마! 트롤은 열 마리가 더 있다!”

겁쟁이 데비는, 울프 용병단은, 붉은 산 요새의 모든 인간은 최선을 다해 몬스터 군단을 저지했지만, 결국 한계가 왔다. 트롤 한 마리가 성벽에 붙어 다듬다 만 통나무를 휘둘렀다. 쿠궁- 돌가루가 우두두 떨어졌다.

“기름 가져와!”

트롤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불이 필수였다. 갓 성인이 된 어린 병사가 기름 단지를 가지러 성벽을 내려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트롤이 접근했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거인, 버그베어가 성문 앞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끔찍하게 크네...”

“아아... 옛 신이시여...”

버그베어는 요새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른손을 높이 들고 성벽 위를 쓸어냈다. 사이즈만 빼면 익숙한 동작이었다. 선반 위의 먼지를 털어낼 때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용감해서인지, 아니면 몸이 굳어서인지 자리에 남아있던 병사 셋이 먼지처럼 쓸려나갔다. 손짓 한번 했을 뿐인데 전신의 뼈마디가 조각났다.

“미, 미친...!”

“저 거인부터 쏴! 당장!”

핏물과 비명이 현실을 직시하게 도왔다. 크로스보우 중대는 즉시 표적을 바꿔 버그베어를 쏘았다.

40파운드에서 80파운드에 이르는 장력을 가진 강한 쇠뇌지만, 괴물 중의 괴물 마도의 수호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우거나 트롤만 되어도 쿼럴에 맞으면 아파하기보다 화를 내는데 당연했다. 대부분의 쿼럴은 튕겨 나갔고, 간혹 털가죽을 뚫은 것도 깊지 않았다.

버그 베어는 왼손을 들어 크로스보우 소대를 향해 움직였다. 이번에는 수직으로 내리쳤다. 비유하자면 모기나 파리를 잡을 때 동작이었다.

“점화!”

쾅! 쾅!

겁쟁이 데비의 포병대가 불을 토했다. 대포까지 버티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인간의 기술과 악의가 합쳐진 최신예 무기는 과연 대단했다. 버그베어는 어깨와 옆구리에 직격당해 휘청거렸다. 쇠탄이 살을 찢고 몸속을 휘저어 피가 왈칵 쏟아졌다. 울프 용병단은 순간 공포를 잊고 환호했다.

“크르르...”

그러나 ‘휘청’이고 ‘피를 흘린 것’이 전부였다. 반신(Demigod)에 가까운 수호자를 잡으려면 팔코넷이 아니라 바실리스크 정도는 가져와야 할 듯했다.

버그베어는 분노를 아끼지 않고 표출했다. 털투성이에 가려진 얼굴이 일그러지고, 두 팔이 모두 하늘 높이 올라갔다. 대포가 놓인 성탑을 깨부술 태도였다.

“키르케!”

“에, 에잇! 나도 몰라요!”

로벨의 뾰족한 외침과 마녀 키르케의 간드러진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마녀의 비밀 병기 아쿼버스가 불을 토했다.

와이트와 버그베어는 같은 '왕'이지만 체급이 달랐다. 12파운드 포탄도 아야! 하고 마는데, 콩알보다 조금 큰 산탄에 쓰러질 리 만무했다. 그러나 잠깐, 아주 잠깐 정신을 빼앗기 충분했다. 로벨은 성탑의 계단을 세 걸음 만에 뛰어올라 여장을 밟고 성 밖으로 날아갔다.

“와, 와우?”

“기사 나으리!”

기세가 좋아서 난다고 표현했지만, 사람이 하늘을 날 리 없으니 그냥 뛰어내린 것이다. 바로 앞에 성탑과 비슷한 크기의 버그베어가 없으면 투신자살로 보였을 것이다.

로벨은 공중에서 흐룬팅을 역수로 쥐고 버그베어의 오른쪽 눈을 내리찍었다. 흐룬팅.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의 검이며 쇠를 자르는 전설의 검이었다. 버그베어의 눈알을 찢고 시신경에 불을 질렀다.

“쿠아아아악-!”

버그베어가 처음으로 고통을 표현했다. 버그베어는 성탑의 대포를 짓뭉개는 대신 직관적인 의미 그대로 ‘눈앞에’ 아른거리는 로벨을 공격했다.

공격을 했으면 반격에 대비하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라 버그베어의 행동을 예상했다. 로벨은 뿌리까지 박힌 흐룬팅을 놓고 턱수염인지 구레나룻인지 모를 털을 잡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버그베어의 솥뚜껑 같은 손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거, 비싼 칼이야.”

로벨은 버그베어의 턱 아래에서 로프(?) 반동으로 뛰어내렸다. 성탑보다 한층 낮은 성벽에 무사히 착지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어느 기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칼 한 자루로 대포 어쩌고가... 농담이 아니었군.”

펄프 대장은 ‘난 농담 같은 거 모르오’ 하고 뚱하게 대답했다.

로벨은 저릿저릿한 발바닥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보니 버그베어가 쓸어낸 성벽이었다. 목과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시체가 너부러져 있었다.

“저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친구들이고. 내가 손해잖아?”

로벨은 자세를 잡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마음이 차분했다. 버그베어는 바늘 같은 흐룬팅을 차마 뽑지 못하고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로벨을 보았다.

지금까지의 싸움이 전쟁사에 속한다면, 이 싸움은 영웅담에 속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늘어트리고 거대한 버그베어 앞에 당당히 마주섰다. 고블린이 성벽을 기어오르며 울부짖고, 트롤이 성문을 때리며 소란 피우는데도 기사의 왕과 죽은 자의 왕의 대치는 고요했다.

-네가 바로... 옛 신이 안배한... 새로운 왕...

“응? 말할 줄 알아?”

로벨은 말할 줄 아는 상대란 것을 알고 잠깐 머쓱해 했다. 공격 전에 가문을 밝히는 것이 기사의 관례인데,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 같아 다짜고짜 공격했다.

-시크론 섬의... 위대한 왕과... 바위 협곡의... 비열한 왕을... 추방했지...

“...수식어가 너무 차이 나잖아.”

마도의 수호자 사이에도 인기 비슷한 것이 있는 듯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끌어올려 버그베어의 하나 남은 눈을 가리켰다.

“너도 추방할 거야. 너희가 있어야 할 지옥 어딘가로 돌아가.”

-어리석은...

“어리석은 것은 너야. 지나간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부활하여 자신의 백성을 죽이는 왕보다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어?”

버그베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은 대답하려고 했는데 어눌해서 행동보다 늦은 건지도 모른다.

로벨은 신경질적으로 날아오는 버그베어의 손바닥을 피해 죽어라 뛰면서 칼날을 뿌렸다. 요새의 성문이 뚫린 것도 그때쯤이었다.

“기사 나리! 적이 들어옵니다!”

“스피어맨! 성 아래로! 성 아래로!”

성문이 열려도 삼중으로 설치한 바리게이트가 있었다. 창날이 촘촘하게 방벽을 형성했다. 그러나 성문을 깨부순 침입자는 9피트에 이르는 거구의 트롤이었다.

“찔러!”

바리게이트 위에 올려진 파이크가 사납게 전진했다. 트롤의 가슴과 배와 허벅지를 무참히 파고들었다.

“꾸락-!”

트롤은 참나무로 만든 곤봉을 휘둘러 창대를 부러트리고 성큼성큼 전진했다. 그 뒤로 승냥이 같은 고블린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리게이트에 찔리고, 쓰러지고, 밟히면서 인간을 무참히 덮쳤다. 곧 난전이 벌어졌다.

“이대로 못 버텨! 울프 용병단! 주군을 모셔라!”

호른 경은 워 해머로 정수리를 쪼개고 폴린으로 턱을 부수며 소리쳤다.

“주군을 모시고 후퇴해! 당장!”

호른 경은 끝없이 밀려오는 고블린을 시체로 바꿔 쌓았다. 켈트 경, 바이란 경, 메튜 경 등이 합세해서 간신히 버텼다. 외팔이 더치와 울프 용병단은 기사 사이에 감히 끼지 못하고 뒷걸음쳤다. 호른 경이 다시 소리쳤다.

“뭣들 하는가! 주군을 살려서 보내란 말이다!”

호른 경에게 지휘권은 없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에 너무 험악하고 촉박했다. 외팔이는 몸을 돌렸다.

사실상 요새는 함락되었다. 전설 속의 괴물을 막기에 붉은 산 요새는 너무나 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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