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용기
로벨은 붉은 산을 사수하면서 강철성 이하 북쪽 영주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볼탄 반도의 위기가 찾아왔으니 가문의 일은 잠시 잊고 우정 비슷한 것을 가져보자는 내용이었다.
호른 경은 붉은 산에 남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버그베어의 힘을 본 이상 하인즈 가문의 충성맹세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로벨과 로벨의 군세가 건재해야 봉신의 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 남는 것은 손해가 더 컸다.
하지만 로벨이 붉은 산에 남은 것은 하인즈 자작 때문이 아니었다. 붉은 산에서 살아가는 8천의 영지민 때문이었다.
‘최소한, 최소한 저들이 피난 갈 동안은 버텨야 해.’
혹자는 미련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무지렁이 농민을 위해 귀한 병사를 희생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운명을 거스르고 기사가 된 ‘로벨’ 로드릭에게 기사의 맹세는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다.
‘약자를 지킬지어다.’
로벨은 구태의연한 기사도라도 지킬 수 있는 한 지킬 것이다.
“트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대포뿐입니다.”
펄프 대장이 대포의 배치를 설명하다가 로벨과 눈이 마주쳤다.
“물론, 영주님은 칼 한 자루로 상대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대포가 효과적입니다.”
잔잔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켈트 남작과 마찬가지로 농담이 아니었다.
“대포의 위력은 그랜드 챔피언 못지않으니, 맞히기만 하면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볼탄 반도의 기사들은 아직 대포가 낯설었다. 로벨처럼 무기 관찰이 취미거나, 호른 경처럼 세상사에 민감한 경우가 아니면 대포에 대한 평균적인 지식은 ‘비싸다’와 ‘맞으면 몸에 안 좋다’가 전부였다. 그래서 문제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첫째는 대포의 정확도가 상당히 낮다는 겁니다.”
이안 선장에게 포술을 배운 겁쟁이 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루기 쉬운 핸드 캐논도 마차보다 작은 것은 맞히기 힘들었다.
“둘째는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트롤의 달리기 실력이 평균적인 인간 수준만 되어도, 글쎄요, 두 발 이상 쏘지는 못 할 겁니다.”
두 번째 문제는 기사들도 쉽게 이야기했다. 용맹한 기사가 대포를 무시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로벨이 굳은 얼굴로 결론지었다.
“다시 말해 대포만으로 저지할 수 없소. 희생을 감수해야 하오.”
누구의 희생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주먹을 쥐고 흉갑을 탕! 두드렸다.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들은 기사를 가리켜 출신만으로 귀하게 대접받는 무식하고 무책임한 종자라 말하지만, 그것은 질투와 시기가 섞인 폄하였다. 적어도 무책임은 아니었다.
7년의 시동 생활과 5년의 기사 종자 생활을 보내고, 주군을 위해 싸울 것을 교육받은 작자들이 무책임할 수 없었다. 그저 우선순위가 조금 다를 뿐이다.
“나 마튼 가문의 앤드류 마튼은 재물보다 명예, 목숨보다 영광을 위해 살아왔소. 지금이 주군과 붉은 산을 위해 나설 때 같소.”
“메튜 가문의 몰스 메튜 역시 마찬가지오! 내가 트롤을 막겠소!”
“나야 말로...”
“본인 역시...!”
기사 소설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로벨은 가슴 벅찬 얼굴로 아론다이트를 뽑았고, 기사들은 흥분해서 따라 칼을 뽑았다. 칼 대신 도끼나 메이스를 가져온 기사도 일부 있지만 못 본척했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에는 지금 장면이 너무 아름다웠다. 기사 소설 마니아인 마녀 키르케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꼭 끌어안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사님을 따라다니면... 언젠가... 이런 광경을 볼 줄 알았어요...”
꿈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황홀해하는 사이, 현실에서 생존하는 용병들은 신기해했다.
“트롤하고 정면대결하겠다고? 진심인가?”
“그냥 내버려 둬. 저 양반들 겁대가리 상실한 게 하루이틀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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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베어의 몬스터 군단이 다시 몰려왔다.
첫날과 달리 무모한 돌격은 하지 않았다. 불과 기름을 가진 요새에 육탄공격은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요새를 지키는 인간이 성문을 열고 돌격을 준비했다. 거인과 트롤을 볼 때 성벽에 기대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루 만에 입장이 바뀌었으나 전쟁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로벨은 흥분한 군마 탓에 더더욱 흥분한 모닝스타를 두드렸다. 겁먹지 않고 돌격하려면 약간의 흥분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기수의 명령을 무시할 만큼 날뛰어서는 안 된다.
“너와 함께라면 무섭지 않아.”
연인이 나눌 법한 애틋한 목소리였다. 모닝스타는 거센 콧김을 멈추고 로벨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기사 나리! 옵니다! 옵니다! 트롤이 옵니다!”
성벽 위에서 허풍쟁이가 소리쳤다. 울프 용병단은 마른침을 삼키며 여장 아래에 몸을 숨겼고, 농민병들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농기구를 안았다.
여기까지 예상대로였다. 고블린이 뒤따르겠지만, 보폭이 짧으니 금방 달라붙지 못할 것이다.
“첫 포격 후에 성문을 열어라. 그리고 경들은 명심하시오. 절대, 절대 공을 탐내지 마시오. 일격 후에 즉시 이탈하시오.”
기사들은 바이저를 내리고 해비 랜스를 끌어올렸다.
“붉은 산의 주민을 지키기 위해 1만의 괴물에게 돌진하니, 경과 경의 가문은 길이 칭송될 것이오.”
로벨도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닫고 바바 야가의 창을 잡았다. 전설 속의 수호자들이 이 순간을 위해 무구를 준비한 듯했다.
“300야드! 포격준비!”
펄프 대장이 불편한 다리를 끌고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도 자기 구역에서 바쁘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기사들이 모두 돌격대에 합류하여 울프 용병단의 지휘관이 수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 사람쯤은 로벨을 배웅할 수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성 밖이 아니라 성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로벨을 찾아 손나팔로 소리쳤다.
“기사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녁 먹기 전에 오시고요!”
동네 마실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말투였다. 속없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로벨은 웃지 않았다. 마녀와 우정을 나눈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마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로벨과 기사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었다.
마녀의 응원이 효과가 있어서 바이저 속의 거친 숨결이 조금 가라앉았다. 거친 흥분이 잦아들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긴장감이 남았다.
“점화!”
성탑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요새가 한차례 진동하고, 자욱한 연기가 솟구쳤다.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끌어올려 성문을 가리켰다. 기사의 시간이 찾아왔다.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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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지난 전투 때 죽은 고블린의 시체가 반이고,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서른 마리의 트롤이 반이었다. 지독한 악취와 땅울림이 기세등등한 기사들을 압도했다. 헬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감출 수 있으니까 말이다.
누구도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작전이 이상하니까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때, 바로 그때 로벨이 첫걸음을 떼었다.
“국왕 폐하와 옛 신의 이름으로! 돌격! 돌격!”
머나먼 포클랜드의 국왕과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 옛 신이 무슨 상관인지 따지는 것은 이성의 일인데, 지금 필요한 것은 벅차오르는 용기였다. 로벨과 모닝스타가 성문 밖으로 뛰쳐나가자 여러 기사들은 이성 따위 꾸겨 던지고 창을 높이 들었다.
“국왕 폐하와 볼탄 반도의 이름으로! 이랴앗!”
“옛 신이시여! 나의 창을 축복하소서!”
로벨을 쫓아 너도나도 박차를 가했다. 주인의 흥분은 전투마를 더욱 자극했다. 일반적인 돌격거리보다 먼 300야드가 지척처럼 느껴졌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환호했다. 기사의 돌격은 가슴을 벅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돌격이 적을 향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로벨은 파나케아의 힘으로 모닝스타 뒤에 바짝 따라붙은 호른 경과 기사들을 보았다. 혼자 돌격하게 내버려두면 어찌하나 조금 걱정했다. 바바 야가의 창을 창받침에 걸고 창끝을 고정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연습한 랜스 차칭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표적을 향해 올곧게 나아갔다.
“히랴앗! 히럇!”
로벨은 호른 경에게 선두를 내주지 않으려고 속도를 높였다. 우두머리의 기질을 가진 것은 모닝스타도 마찬가지라 네 다리로 땅을 거세게 박찼다.
“히이이이잉-!”
흙먼지를 망토처럼 두른 4만 9천 파운드의 금속 괴물이 죽여도 죽지 않는 초록 피부의 괴물과 충돌했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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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갑 기사와 거대한 군마의 체중이 창끝에 집중되어 시속 33마일 속도로 표적을 강타하니, 그 위력은 인류의 유구한 전쟁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했다.
로벨이 내찌른 창은 동방의 마녀 바바 야가의 힘으로 트롤을 찢어발겼다. 트롤의 피와 살점이 모래폭풍처럼 전방을 휩쓸었다. 이어서 300년 넘게 전장의 주인공으로 군림해온 랜스 차칭이 위력을 발휘했다.
일점에 집중된 랜스는 트롤의 몸을 앞뒤로 관통하며 부러졌다. 9피트에 이르는 거구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갔다. 체구가 좀 작은 녀석은 창에 꿰여서 수 야드를 끌려가기도 했다. 전투마는 흥분해서 육식동물처럼 포효했고, 기사들은 한층 더 시끄럽게 소리쳤다.
그러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창에 맞지 않은, 혹은 맞아도 버텨낸 트롤들이 보복을 시작했다. 비켜가는 전투마의 꼬리를 잡아 패대기치고, 복부에 꽂힌 창을 붙잡은 채 돌도끼를 휘둘렀다. 트롤이 쓰러지는 만큼 기사도 쓰러졌다. 랜스를 소모한 로벨과 호른 경 등은 접전지에서 이탈해 말머리를 돌렸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무참히 살해되는 기사들이 보였다.
“다시! 다시 간다! 대열 갖추시오!”
랜스를 보충해서 돌격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호른 경은 짤막한 워 해머 대신 마상용 플레일을 꺼냈다. 다른 기사들도 각자 애용하는 병장기를 꺼냈다. 로벨은 말머리가 나란히 서자 지체 없이 아론다이트를 내찔렀다.
“돌격! 돌격!”
로벨은 고삐를 입에 물고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았다. 허리를 최대한 비틀고, 허벅지로 몸을 지탱하며,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완벽한 동작으로 휘둘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를 짓밟는데 집중한 트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전에 머리를 잃었다.
“큭-”
로벨은 팔꿈치에서 허리로 전해지는 충격에 신음했다. 사람 목을 베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사람보다 몇 배나 굵은 트롤의 목을 일격에 베었다. 모닝스타의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벨은 곤죽이 된 기사와 그 위에 쓰러지는 트롤을 보며 다시 이탈했다. 호른 경은 첫 돌격에서 낙마해 짧디짧은 칼로 저항하던 메튜 경을 태워 빠져나왔다. 그 뒤로 소기의 성과를 낸 기사들이 하나둘 따라왔다.
로벨은 세 번째 돌격을 고민했다. 정신을 차린 트롤을 상대로 또다시 돌격하면 피해가 극심할 것이다. 그때, 요새 위로 붉은 깃발이 올라왔다.
“주군! 포격준비가 끝났습니다!”
로벨도 파나케아 투구로 보았다. 이제 자리를 내어줄 때였다.
“낙오자를 태우시오! 요새로 돌아갈 것이오! 요새로 돌아간다! 가자!”
기사들은 공격할 때만큼이나 빠르게 철수했다. 네 발 짐승을 탄 인간들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던 트롤은 눈알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쿠쿠쿵-! 하는 폭음 후 돌덩이가 날아오자 화를 내었다.
“쿠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