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28화 (328/605)

328화. 거인

로벨 이하 로벨 로드릭 군은 거리목을 세우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붉은 산 요새는 붉은 산 중턱에 지어져 로드릭 시티와 달리 땅의 굴곡이 심했다. 게다가 크기가 다른 종(種)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아무런 대열 없이 막무가내로 밀려오니 거리감이 모호했다. 겁쟁이 데비는 아직 멀다고 생각하다가 첫 고블린이 200야드 거리목을 지나는 것을 보고 다급히 명령했다.

“저, 점화! 점화!”

콰콰콰쾅-! 쾅쾅-!

20문의 포성이 성벽과 성탑을 흔들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독특한 나팔이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몬스터 사이사이에 포탄이 떨어졌다. 피와 살점이 물기둥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물웅덩이에 돌을 던진 것처럼 금방 사라졌다.

“어디서 저렇게 많이 나온 거야?”

“덩굴성에서 그리 죽였는데...!”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나오잖아!”

울프 용병단이 경악해서 소리 질렀다. 애꾸눈 볼포스는 안대를 꾹 누른 후 아바레스트를 들었다.

“150야드! 사격준비!”

볼탄 반도 최고의 쇠뇌병이라 자부해 왔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증명할 수 없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괴물이었다. 괴물을 피해 맨땅을 쏘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계속 쏴! 계속! 못 오게 막아!”

“제길, 너무 많으니까 뭘 쏴야 할지 모르겠네.”

수성전에서 최우선 표적은 사다리를 가진 놈이고, 그 다음 표적은 깃발을 가진 놈이다. 그런데 둘 다 보이지 않았다.

“이, 이 새끼들, 미친 건가? 왜 저래?”

한 차례 화살비가 쓸자 수십 마리가 나자빠졌다. 광기로 얼룩진 고블린은 동족을 짓밟으며 계속 달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쓰러진 놈이나 짓밟는 놈이나 조악한 몽둥이를 가졌을 뿐, 성벽을 넘을 공성장비가 없었다.

쿵-!

첫 번째 고블린이 성벽 아래에 도달했다. 고대신화 속의 영웅처럼 성벽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기세가 대단하지만, 솔직히 미친 것 같았다. 구릉성에서 온 병사가 자기 머리통만한 돌덩이를 집어던졌다. 긴장한 탓인지 조급한 탓인지 고블린을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굳이 맞힐 필요가 없었다. 고블린을 뒤따라온 다른 고블린이 몸통으로 쳐내고 발로 밟았다.

“어어억-?”

구릉성 병사는 동족상잔에 경악했다. 하지만 동족을 깔아뭉갠 고블린도 뒤따라온 고블린 무리에 깔려서 죽었다. 그리고 죽고, 죽어서, 또 죽었다.

“꼭... 불나방 같아...”

성탑 위에서 불을 피우는 마녀가 두 손을 꼭 쥐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불나방이었다. 고블린은 성벽을 향해 몸을 던지고 죽기를 반복했다. 인간이 쏘고 던지는 무기에 죽는 고블린보다 자기들끼리 밀치고 밟아서 죽이는 고블린이 더 많았다. 이대로 가면 거저 승리할 듯했다. 이대로 가면 말이다.

“언제까지 오는 거야!”

“계속 늘어나고 있잖아!”

고블린 군단은 끝이 없었다. 4천 마리? 5천 마리? 질서 없이 몰려오니 정확한 수를 셀 수 없었다. 어쩌면 1만 마리가 넘을지도 모른다.

전쟁소설을 보면 주인공이나 악당이나 10만 군대를 통솔해 전면전을 치르지만, 그것은 소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1천 명만 모여도 앞에서 뒤까지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1만 명이 모이면 중간 지휘관이 아무리 유능해도 전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만한 숫자가 모일 장소부터 드물었다. 그렇기에 10만, 100만 군대를 이끌더라도 한 전투에 동원되는 병력은 천 단위가 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만 단위의 병력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이 자식들아! 제발! 그만 와!”

“죽고 싶냐? 죽고 싶어? 죽어라!”

울프 용병단은 악다구니를 쓰며 던질 수 있는 것은 전우 빼고 전부 집어던졌다. 어떤 용병은 옆 동료가 숨을 고르려고 벗은 투구도 생각 없이 던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대단했다. 인간과 다른 기이한 외형도 공포스러운데,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니 죽이는 쪽이 질렸다.

‘질리기만 하면 다행인데...’

고블린의 무모한 돌격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시체가 작은 동산이 되어 성벽을 낮추기 시작했다. 폭풍성의 어린 병사는 돌덩이를 던지기 위해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다가 여장 바로 아래까지 기어오른 고블린 얼굴에 기겁해서 뒤로 넘어갔다.

“우아악! 넘어온다! 넘어와요!”

호른 경은 유례없는 공성기술에 당황했다.

“시체를 쌓아서... 시체로 성벽을 넘어...?”

로벨이 흐룬팅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기름을 가져와! 불을 질러야 해! 호른 경! 아래쪽으로 가시오! 고블린의 시체를 태워야 하오!”

로벨은 기사와 용병을 후드려잡으며 명령했다. 그 동안 마도의 수호자와 드잡이한 보람이 있어 괴물의 괴상한 행동에 익숙했다.

“부어라!”

기름 항아리의 나무뚜껑을 치우고 성가퀴 사이로 들이부었다. 항아리를 드는 사람이 부족하면 그냥 굴려서 떨어뜨리고 깨트렸다. 성벽 아래 쌓인 몇몇 ‘시체동산’이 축축하게 젖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옆으로 그으며 소리쳤다.

“점화!”

횃불과 불쏘시개가 마구잡이로 떨어졌다. 기름을 머금은 시체는 훌륭한 땔감이었다. 불꽃이 화르륵- 번지더니 삽시간에 화염동산이 되었다. 불과 가까운 병사들은 눈썹을 태워먹고 뒤뚱뒤뚱 물러나야 했다.

“뀌에에에엑!”

“끄하아악-!”

불길 속에서 내지르는 비명이 무시무시했다. 시체, 기름, 괴물, 죽음... 끔찍한 광경이었다. 옛 신의 교단에서 말하는 지옥이 필히 이런 광경일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불나방이라 표현했지만, 진짜 불나방은 아니라 불구덩이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일부 성질을 못 이기는 놈이 뛰어들기는 했는데, 크게 호흡하는 순간 기도와 폐가 불타 소리 없이 몸부림치다 쓰러졌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고!”

“...아닌 것 같은데.”

고블린이 산비탈에서 내려오자 이어서 트롤이 나타났다.

평균 키가 4.7피트에 불과한 고블린 무리에 8~9피트나 하는 트롤이 들어가자 어린아이 놀이에 끼어든 어른 같았다.

“...여섯 ...일곱 ...여덟...”

트롤도 제각각 생김새가 달랐다. 어떤 놈은 아래턱이 발달해서 주걱을 걸어놓은 것 같고, 어떤 놈은 콧구멍이 사람 주먹만큼 크고, 어떤 놈은 송곳니가 입술을 비집고 나와 침방울을 쉼 없이 흘렸다.

그런 특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트롤의 숫자가 많았다.

쿵... 쿵... 쿵...

트롤의 발울림이 붉은 산을 흔들었다. 실제로 산이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성벽 위에 인간이 느끼기에는 멀미가 날 정도였다.

“북쪽의 영주들이 못 버틴 이유가 있군...”

괴물의 숫자가 이 정도면 자연재해였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기사도, 여우의 지혜를 가진 노병도 무기를 늘어트리고 멍하니 몬스터 군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짜 재앙은 시작이었다.

“저놈은 또 뭐야?”

처음에는 특이하게 생긴 트롤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런데 특이점이 너무 컸다. 차이가 아니라 크기로 정말 컸다. 고블린을 꼬마로 만든 트롤들이 ‘그것’ 앞에서는 너무도 왜소했다.

원근감이 무색해지는 머리통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수북한 털이 자라나있고, 요새 성문보다 커다란 몸통에는 비정상적인 비율의 팔다리가 붙어있었다. 북해 너머의 하얀곰과 야만의 땅의 고릴라를 합쳐놓은 모습이었다.

로벨이 혹시나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거인의 이름을 소개했다.

“저게 버그베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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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버그베어는 산비탈에서 요새를 노려보다가 돌연히 고함을 질렀다.

거인과 불장막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고블린은 고함에 깜짝 놀라 후퇴했다. 아니, 끌려갔다. 고블린의 표정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패했다는 분노도, 살았다는 안도도 없었다. 교수대에 끌려가는 사형수와 비슷했다.

“저 거인 때문에 죽기 살기로 덤빈 거였어.”

“죽기 살기가 아니라 그냥 죽으려고 덤빈 거죠. 자살에 가까운 걸요.”

아무튼 몬스터 군단이 물러갔다. 로벨 로드릭 군은 겨우 숨을 돌렸다. 긴장이 풀리자 시체 타는 냄새가 났다. 고블린 시체가 시커먼 숯이 되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 불이 꺼지면 다시 올 거야.”

로벨은 주저앉은 기사와 용병 지휘관을 일으켰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피해를 보고하고 소모된 화살과 돌을 보충해. 해가 지면 다시 올 거야. 시간이 없어.”

인명피해는 거의 없으나, 무기와 물자가 많이 소모되었다. 공성병기에 대비해 준비한 기름을 시체와 시체를 타고 넘어오는 고블린을 태우는데 거의 사용했다.

“그 거인과 트롤 무리를 보면 공성무기는 없을 거야. 망치를 들고 직접 깨부수겠지.”

로벨은 호른 경, 켈트 남작, 바이란 남작 등을 모아놓고 낮 동안의 전투를 분석했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지만, 7천 마리에서 8천 마리로 합의 되었다.

“저것들은 무슨 토끼인가? 왕위계승전쟁 때 1천 마리를 사살했는데, 어디서 저렇게 번식한 거지?”

“토끼보다 더하오. 본인은 고블린이 자가분열한다고 해도 진지하게 믿어줄 것이오.”

켈트 남작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농담했다. 덕분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켈트 남작은 농담한 것이 아니었다.

호른 경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주군, 우리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호른 경을 보았다. 로벨의 큰 신임을 받는 호른 경이 아니었으면 욕설과 조롱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로벨도 부정적인 발언이 달갑지 않았다.

“우리가 진다는 뜻이오?”

호른 경은 말실수를 깨닫고 정정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대로는 승산이 낮다는 뜻입니다.”

로벨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좋은 전략이 있소?”

“전략은 아니지만... 아니군요. 전략이라면 전략입니다. 주군, 늑대성으로 회군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겨우 펴진 얼굴들이 다시 일그러졌다. 켈트 경과 메튜 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적이 무서워 도망가자는 뜻이오?”

“게다가 늑대성이라니? 여기서 피하면 늑대성이라고 멀쩡할 것 같소?”

호른 경은 자꾸 오해가 생겨서 난감했다.

“그게 아니오. 우리만으로 승산이 낮으니 도움을 받자는 것이오.”

“누가 우리를 돕겠소. 검은 숲의 겁쟁이들이? 포클랜드의 샌님들이? 저들은 저들 땅에 위협이 오기 전에 움직이지 않을 거요.”

호른 경은 이웃 지방에 불만이 많은 기사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말은 위기에 처하면 누구라도 움직인다는 뜻이군. 그렇소?”

“그, 그야 당연하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보다 먼저 위기에 처한 가문들이 있지 않소.”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은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지만 쉽게 답을 맞히지 못했다. 기사답게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마녀 키르케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정답을 외쳤다.

“볼프 사트로 후작님이요! 사트로 가문의 기사님과 손잡자는 거죠?”

기사들은 금기에 가까운 이름에 경악했다. 반세기 동안 적으로 대립해 온 가문이었다. 사트로 가문의 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늑대성에서 가까운 강철성의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도트넘 가문, 깁스 가문, 챈들러 가문 등이 합류하면 승산이 몇 배로 올라갑니다.”

하나같이 로벨과 쌈박질한 가문이었다. 로벨은 부끄러운 듯 몸을 조금 꼬았다.

“음... 안 도와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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