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산사태
로벨 로드릭 군이 움직였다.
울프 용병단 북군 255명, 남군 175명, 소환에 응한 호른 가문, 켈트 가문, 바이란 가문, 랭스터 가문 등 봉신의 군대가 850명. 총 1,280명이었다.
공포와 좌절 속에서 저항을 준비하던 하인즈 가문 및 붉은 산 주민들은 원군 소식에 환호했다. 한때 붉은 산의 악몽이었던 로벨 로드릭 군이 이제는 희망이 되어 북상하고 있었다.
“적의 규모는?”
“피난민이 전한 바로는 고블린만 2천 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피난민의 말은 신뢰할 수 없잖소. 기사가 가져온 정보는 없소?”
“체스터 가문의 사내들은 대부분 전사하여...”
로벨은 하루에 11마일씩 행군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여러 봉신과 용병 지휘관을 모아 진군로를 설명하고, 보급로를 이야기하고, 부대배치를 논의했다.
로벨만 분주한 것은 아니었다. 펄프 대장은 적의 숫자와 이동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켈트 남작과 바이란 남작은 전공에 눈이 먼 기사를 통제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가 사내는 죽이고, 계집은 겁탈하고. 귀중품은 챙기며, 챙기지 못하는 것은 불 싸지르는 야만족의 싸움이 아니었다. 볼탄 반도의 모든 땅은 주인이 있는 땅이고, 그 주인은 충성서약으로 맺어진 로벨의 이웃이었다. 무기, 식량, 자재, 병력을 최대한 통제해서 영주의 재산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 했다.
“잉그비아 왕국에서 싸울 때가 나았지. 거기는 그냥 눈에 보이는 족족 약탈하면 되었으니까.”
“바다를 다시 건널 바에 그냥 하루 굶겠소.”
기사들은 명예로 포장된 폭력성과 살인욕구로 몸이 근질근질했다. 겨울 동안 참아온 탓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호른 경은 표정이 밝소이다? 무슨 좋은 일이 있소이까?”
“본인이 말이오? 그런 거 없소.”
“입꼬리를 귀에 걸어놓고 말이오? 허어, 경 정도면 전공에 목마를 필요가 없잖소?”
호른 경은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면서 로벨을 힐끔힐끔 보았다. 전공이 아니라 다른 것에 목말라 있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만나지 못한 주군이었다. 그사이 한층 아름다워졌다.
‘전쟁이 아니면 부르지 않으니...’
본능에 충실한 패트릭 호른은 로벨이 자신을 불러주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패트릭 호른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남는 것이 없는 전쟁이었다. 괴물을 잡아도 몸값이 나오지 않고, 전리품이 생기지도 않았다. 바위성과 덩굴성은 봉신이라 그렇다 쳐도 붉은 산은 아니었다. 전쟁에 소모된 비용은 오로지 로드릭 가문이 부담이었다.
“붉은 산의 충성을 받아야 합니다.”
호른 경의 제안은 항상 남과 달랐다. 로벨에게 충성하는 기사는 많지만, 로벨 입장에서 생각하는 기사는 없기 때문이다.
“어찌해서?”
“우선 전쟁 비용을 나눠야 합니다. 용병들에게 줄 전쟁수당이 만 단위를 넘지 않았습니까. 그중 절반만 덜어내도 늑대성의 집사가 좋아할 겁니다.”
어린 집사를 들먹이자 할 말이 없었다. 로벨은 끙- 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꿨다.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었다 해도 갑옷은 갑옷이었다. 오래 입고 있으면 피로가 쌓였다.
“그것뿐이면 금화로 받아도 되지 않소?”
“붉은 산의 광산이 폐쇄되어 당장은 페닝을 지불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붉은 산을 로드릭 가문의 봉토로 삼아야 합니다.”
로벨은 불편하게 인정했다. 붉은 산을 차지해야 하는 군사적 이유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반발할 텐데.”
“벌써 두 번째입니다. 감히 그러지 못할 겁니다.”
사트로 가문이 하인즈 가문을 위기로 내몬 것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결국 하인즈 가문을 구원하는 것은 항상 로드릭 가문이었다.
“전쟁에서 이긴 다음 논의할 일이지만, 유념해 두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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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싸움에서 로벨 로드릭 군이 승리했다. 몬스터보다 먼저 붉은 산에 도착하였으니 시간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하인즈 가문의 새 당주 하일드 하인즈 자작은 성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오는 1천 3백 명의 지원군에 활짝 웃었다.
“과연! 로벨 로드릭 공작의 군대로군!”
기사들이 입은 판금갑옷이 햇빛에 번쩍번쩍 빛나고,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이 위아래로 들썩이며 물결을 자아냈다. 적이라면 오금이 저릴 만큼 무시무시하지만, 아군이라면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광경이었다.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이렇게 다시 뵈니 감개무량하오!”
하일드 하인즈 자작이 아성에서 뛰쳐나와 로벨과 기사들을 맞이했다. 못해도 사흘 전에 연락이 닿았을 텐데, 모자도 쓰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다급히 나오는 것은 8할이 연출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환대에 응했다.
“오랜만이오, 하인즈 자작. 잘 지냈소?”
“공작의 우정이 함께하는데 당연히 잘 지내오. 오오, 정말 감사하오. 하인즈 가문과 붉은 산의 모든 영지민을 대신해 감사드리오!”
진실로 말하자면 로벨과 하일드 하인즈 자작은 반가워할 사이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자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혈육인 ‘늙다리’ 하인즈를 살해한 원수였다.
그렇기에 더욱 쇼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늑대성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먹을 것과 쉴 곳을 준비했소. 경들도 함께 갑시다.”
‘이 자작이... 늑대성에 안 와봤구나...’
300년 동안 철광업으로 부를 쌓은 붉은 성이 보리농사에 목매던 늑대성보다 초라할 리 없었다. 로벨 외의 기사들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로벨은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하일드 하인즈 자작을 진정시켰다. 로벨답게 정치적인 제스처보다 군사적인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괴물의 숫자와 종류, 그리고 붉은 산의 병력과 무기, 비축물자를 알아야겠소.”
하일드 하인즈 자작의 얼굴에 작은 당혹이 떠올랐다. 고상한 부르주아들과 너무 오래 어울린 모양이다. 거칠게 살아온 기사들은 하얀 송곳니를 보이며 당장이라도 피를 뿌릴 표정을 지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기사가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이었다. 계집처럼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눈빛이 사나웠다.
‘소문대로 흉포한 기사로군.’
하일드 하인즈 자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작자를 적으로 돌렸던 부친이 가엾고 한심했다. 하인즈 자작은 선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홀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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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성 메인 홀에는 붉은 산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테이블 지도가 있었다. 일전에도 보았지만 정말 대단한 지도였다. 이 지도를 만든 장인은 지리학에 밝을뿐더러 조각술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이다.
“괴물 군단은 북동쪽에서 빠르게 남하하고 있소. 정찰병이 확인한 바로는 1,500마리 내외인데,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붉은 산에 도착할 때면 더 늘어날지도 모르오.”
하일드 하인즈 자작은 지도 모서리의 작은 계곡길을 따라 장기말을 두었다. 뿔투구를 쓴 야만족 말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몬스터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은 고블린이지만, 트롤이 몇 마리 목격되었소.”
“덩굴성하고 비슷하군요.”
호른 경이 덩굴성 전투를 간략히 설명했다. 경험자가 있으니 전력을 가늠하기 쉬웠다.
호른 경의 무용담을 가만히 듣던 하일드 하인즈 자작이 내용을 추가했다.
“경의 말과 조금 다른 것이 있소.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내용인데... 거인이 목격되었소.”
“거인? 전설 속의 거인 말이오?”
옛 신이 인간과 어울려 살던 시절에나 들어본 이름이었다. 용기가 앞서는 기사들은 호승심을 보였고, 지혜가 싹튼 기사들은 냉소를 지었다.
“오우거를 잘못 보았겠지. 오우거도 대단히 큰 괴물이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 흐음. 오우거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인데...“
로벨은 어느쪽도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진실을 아는 쪽이었다.
“버그베어.”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이라 로벨의 한마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버그베어라 하면... 잉그비아 왕국 놈들이 말하는 부기맨(Boogiemen) 말입니까?”
“애들 동화에 나오는 옷장 속 괴물 말이오?”
부기맨, 보기맨, 버가부, 버그베어 등등. 지역마다 이름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무시무시한 괴물이란 것은 똑같았다. 어두운 밤길에 그림자처럼 늘어서서 발아래 들어오는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고, 옷장 속에 숨어서 술래잡기하는 아이를 잡아가기도 했다.
“그 악령이 진짜 있는 겁니까?”
“고블린과 뱀파이어도 있는데, 버그베어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
로벨이 확신을 담아 말하자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거인이란 말이지. 거인. 대체 얼마나 큰 거요?”
“가까이서 본 사람이 없어 확실히는 모르나 트롤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고 하오.”
“그 괴물이 어린아이처럼?”
로벨은 ‘어린아이’로 지칭되는 평균 키를 가늠해 허리쯤에 손을 얹고 남은 키를 재어보았다.
“20피트 쯤 되려나?”
상상력이 좋은 기사들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붉은 성의 성벽 높이였다. 메튜 경이 헛웃음 짓고 말했다.
“공성병기가 필요 없겠군?”
호른 경은 사기가 떨어질까 염려되어 급히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직 확인된 것이 없으니 미리 겁먹을 필요 없소. 그리고 주군께서 가져온 대포가 있지 않소. 덩치가 크면 맞히기도 쉽겠지.”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휘두르는 아쿼버스에 직격 당해 얼굴이 사라진 와이트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이 무서운 것은 무기가 발전하지 못한 선사시대 때 일이었다. 강철과 화약으로 싸우는 현대에는 해볼 만했다.
로벨은 깃발을 가진 기사 모양 장기말을 계곡 건너편 요새로 옮겼다.
“하인즈 자작, 붉은 산 요새의 이용권한을 내어줄 수 있겠소?”
요새를 통째로 달라 해도 내줘야 할 판이니 당연히 있었다.
“내 성이 공작의 성이오. 부디 편히 이용하시오.”
충성맹세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호른 경의 표정이 밝아졌다.
“시간이 촉박하니 내일 아침 붉은 산 요새로 이동하겠소. 명심하시오. 저 괴물을 막지 못하면 우리 고향이 위험해지오. 어떡해서든 이곳에서 승리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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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 요새.
지난 날 붉은 산 전쟁에서 볼프 사트로 후작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은 곳이었다.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등은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또 싸우게 될 줄은 몰랐소.”
“잘 된 일 아니오. 치욕을 씻을 때가 되었으니.”
“이번에도 괴물이 상대군.”
로벨은 요새 안팎을 순시한 후 만족했다. 1천 명이 주둔하기 충분한 시설과 물자가 갖춰져 있었다.
“대포를 성탑으로 올려. 화약과 기름은 성벽 아래 두고.”
“벌써 옮기고 있습니다!”
“겁쟁이, 거리목을 설치해.”
“20야드 간격이면 될깝쇼?”
“10야드. 신병이 있잖아.”
겁쟁이 데비는 투덜거리며 말뚝을 챙겨서 성 밖으로 나갔다. 외팔이 더치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고생하라고 등짝을 때렸다. 하지만 진짜 고생은 외팔이 몫이었다.
“외팔이, 300야드 이내의 잡목을 모두 제거해.”
“제, 제가 말입니까요?”
“응. 오늘 중에 끝내.”
로벨 로드릭 군은 수성 경험이 풍부한 울프 용병단을 중심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무기를 쌓고, 자리를 배정하고, 부실한 곳은 보강하고, 사기를 고취했다.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흘러갔다. 붉은 산을 지키기에 충분한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마침내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1,500마리라고 하지 않았어?”
“제길! 기사 양반의 셈을 믿은 내가 바보지!”
로벨 로드릭 군은 산능선을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몬스터 무리를 보고 굵은 침을 삼켰다. 산 너머에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보이는 숫자만 3천이 족히 되었다. 그 광경을 어설프게 묘사하자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산사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