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26화 (326/605)

326화. 마지막

용병 같지 않은 용병의 소란은 ‘진짜 용병’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해결되어갔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전쟁 전문가는 거칠지만 순박한 시골 청년을 잘 타일러 돌려보냈다.

“...죽은 사람은 없지?”

“용병 기준으로 찰과상만 나왔어요.”

용병의 허세를 풀이하면 최소 한 명은 칼침 맞았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준수했다.

늑대성의 용병모집 소식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세계 각지의 용병이 모여들었다. 에르나 왕국 정도면 가까운 이웃이고, 인어의 바다 건너 알베니아 왕국인과 모나카 왕국인도 여럿 있으며, 심지어 야만의 땅에서 온 검은 피부의 용병도 있었다.

“세상에나! 흑인 용병도 있군요?”

마녀 키르케가 흑인 용병을 보고 감탄했다. 야만의 땅이 가까운 남쪽 나라에서는 종종 볼 수 있지만, 인어의 바다 북쪽 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인종이었다. 리암 수사가 기도문을 읊고 말했다.

“옛 신의 품에 귀의한 사람을 외모나 출신으로 차별해서 안 돼요.”

마녀 키르케가 쪼르르 달려가 흑인 용병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교회 안 다닌다는데요?”

“교회에 가야지만 신앙이 생기는 것은...”

“개종을 안 했다는데요?”

“...이교도군요. 칫.”

리암 수사는 소심하게 욕을 하고 외면했다. 옛 신의 위세가 한풀 꺾인 시대라 망정이지, 100년 전이었으면 개종할 때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로벨도 흑인 용병을 유심히 살폈다. 신앙은 알 바 아니고, 무기와 갑옷에 집중했다. 허리에 팔치온 비슷한 곡도를 차고, 등 뒤에 끈이 달린 자벨린을 서너 개 메었다.

‘병과를 뭐로 보고 받은 거야?’

용병계의 대부 펄프 대장이 용병을 뽑는 기준은 딱 두 개였다. 1. 가진 무기를 잘 다루는가, 2.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항목이었다. 이 두 가지만 충족해도 A급 용병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용병단에 얼마나 잘 동화되느냐가 문제인데...”

어린 집사 걱정도 많다는 듯 말했다.

“용병이 거기서 거기죠. 먹이고 재우고 굴리면 금방 친해지지 않겠어요?”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성격이나 취미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활습관이 문제였다. 모나카 왕국 출신 용병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성지(聖地)를 향해 절을 하며 기도문을 외웠고, 야만의 땅 출신 흑인 용병은 훈련할 때마다 닭을 잡아 피로 화장을 했다.

아이란드 왕국 출신은 유라피아 대륙 외부 문화에 익숙한 듯 옹호했지만, 에르나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 출신 용병은 적당히 좀 하라고 매일 화를 내었다. 정다운 욕설로 아침을 시작하고, 멱살잡이로 오후를 보낸 뒤, 주먹다짐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펄프 대장은 설득도 하고, 협박도 하고, 처벌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20일 만에 항복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로벨과 어린 집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영주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로벨도 계속 고민한 문제였다. 말썽이 심한 용병은 쫓아내는 것도 고려했다.

“별로 어려울 거 없잖아요?”

마녀 키르케가 아야를 깔고 앉은 채 말했다. 겨울이다 보니 맨바닥에 앉으면 꼬리뼈가 시린 듯했다.

“좋은 방법이 있어?”

“두 편으로 나누세요.”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을 다른 땅, 다른 문화에서 살아왔는데, 며칠 만에 서로를 이해하고 전우애를 불태우기는 불가능했다. 종교 문제까지 겹치면 더욱 그랬다.

“서로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북방계-에르나, 포비아, 잉그비아, 네일 공국- 출신하고 남방계-아이란드, 알베니아 왕국, 모나카 왕국- 출신하고 나누고, 소수 부족은 친한 쪽에 넣어주세요.”

“오?”

“와아...”

로벨 및 늑대성 중진들은 놀란 눈으로 마녀를 보았다. 가끔씩 기발한 생각을 하는데, 그때마다 새롭고 신기했다. 아무래도 똑똑한 키르케나 쓸모 있는 키르케의 이미지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 아무튼, 방침이 정해지자 세부적인 것은 절로 진행되었다.

“지금 병력이면 2개 중대로 나눠야 하니까,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북군과 남군으로 하죠.”

“그런데 대대훈련도 해야 하지 않아? 전쟁터에서 따로 놀면 안 되잖아.”

“경쟁을 붙이면 오히려 잘 될 수도 있습니다. 적절한 포상이 있어야겠지만...”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 대대장이 되고, 네일 공국 출신 애꾸눈이 북군 중대장, 아이란드 왕국 출신 발냄새가 남군 중대장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용병이 죽어서 발냄새 정도면 중대장을 맡아도 될 최고참이었다. 발냄새보다 오래된 외팔이, 허풍쟁이, 겁쟁이 등도 있긴 하지만, 인어해 북쪽 출신이라 신뢰할 수 없는 남쪽 용병을 지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첫눈이 내렸다.

로벨은 얼굴도, 무장도, 출신도 다르지만, 울프 용병단이란 이름으로 뭉친 군대를 사열했다. 총 병력 492명으로 사설 용병치고 엄청난 숫자였다.

로벨은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북동쪽을 보았다.

어쩌면 전쟁이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죽은 자의 왕이 공격해온다는 확신은 없다. 설령 공격해도 북방을 지키는 사트로 가문 기사들이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옷장 속의 악마가 볼탄 반도를 집어 삼키려 나오면, 그때는 너무 늦었다.

“이걸로 준비되었어.”

로벨은 칼을 갈고 갑옷을 닦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불청객이 와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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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에 걸어둔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수증기는 실내의 찬 공기와 함께 화실로 빨려 들어가 방 안을 따뜻하게 데웠다.

로벨은 양털 담요를 살짝 내리고 뻐근한 팔로 창문을 밀었다. 창틀에 매달린 고드름이 오드득- 오드득- 소리 내며 떨어졌다.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창문을 열지 않았다. 겨울을 만끽하는 것은 성 아래 울프 용병단 요새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어린 집사가 국자로 냄비를 휘저었다. 말린 고기와 절인 야채가 걸쭉하게 녹아들었다.

“춘경지를 갈아야 할 때가 됐어. 농마를 배불리 먹여야 하는데...”

“찰드 촌장이 알아서 할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예전에는 춘궁기를 벗어나는 봄농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하지만 이제는 봄농사보다 중요한 일이 산더미였다.

회색산의 소금광산은 계절을 타지 않으니 계속해서 관리해야 하고, 버팅거 시티의 식품공장은 재고가 남지 않게 신경 써야 하고, 로드릭 시장과 로드릭 상회의 운영도 관심 가져야 하며, 초봄에 귀항하는 이안 선장의 교역선도 맞이해야 했다.

어린 집사가 커다란 머그잔에 고기스튜를 듬뿍 퍼서 가져왔다. 로벨은 창문을 닫고 스튜를 받았다. 아야와 이야키가 고기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가 희멀건 국물임을 알고 다시 앞발 사이에 파묻었다.

로벨은 입이 늘어난 만큼 먹을 것을 줄였다. 닭을 구우면 혼자 배불리 먹지만, 스튜로 삶으면 다섯이 배불리 먹었다.

펄프 대장 등은 영주인 로벨까지 그럴 필요 있냐고 말렸지만, 로벨이 그리하니까 500명 가까운 울프 용병단이 아무도 불만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로벨은 고기 스튜로도 충분했다. 아무렴 까마귀 고기로 셋이 나눠 먹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로벨의 기사가 되어 깊은 골로 떠난 카를 데인 경이 눈 녹은 진창길을 힘겹게 돌아왔다.

포비아 왕국인이지만 조상 중에 바바리안이 있는지 덩치가 크고 행동이 거침없었다. 성(姓)을 보면 개종한 야만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지난 수십 일의 고생을 늘어놓거나 복잡한 감정이 쏟아내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보고했다.

“모몬트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로벨은 숲지기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보통 때라면 네일 공국의 침공이라 생각하겠지만, 국제 정세와 뱀파이어 군주의 충고를 아는 지금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또 몬스터요?”

“깊은 골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굶주린 시절이었다. 전쟁이 나면 이맘때일 거라 짐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100년간 국경을 지켜온 모몬트 가문이 쉽게 몰락하다니...”

“최근 몇 년 동안 악재가 계속되었지요. 여동생이 실종되고, 형제가 차례로 포로가 되었습니다. 몸값 때문에 큰 빚을 져서 용병을 고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 어험. 그것 참 안 된 일이오.”

카를 데인 경이 진심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모몬트 가의 몰락은 7할이 로벨 탓이었다.

“사트로 가문의 반응은 어떻소? 봉신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을 텐데?”

“검은 성에 직접 가보진 못했으나, 소문에 의하면 군대를 소집 중이라 합니다.”

“쉽지 않겠지...”

사트로 가문은 붉은 산 전쟁 이후 예전 같은 위세가 없었다. 겨울이 막 지난 시점이라 모두 힘들고 바빴다. 돈도 안 되는 몬스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할 기사는 많지 않았다.

“모몬트 성이 함락되었으면, 다음은 체스터 성이군.”

30년 전 네일 공국의 침공 때와 비슷했다. 군사적으로 보면 두 발로 갈 수 있는 길이 뻔하기 때문이고, 마법적으로 보면 인간의 상상력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출병하실 겁니까?”

카를 데인 경이 번뜩이는 눈으로 물었다. 복수의 시간을 고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로벨은 가로저었다.

“체스터 경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오. 북쪽 제후들이 의심할 것이오.”

구(舊)프란시스 가문의 봉신들은 로벨에게 충성했지만, 사트로 가문의 봉신들은 충성하지 않았다. 로벨이 군대를 끌고 북상하면 몬스터와 싸우기 전에 제후들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경고는 할 수 있지. 사람을 보내 전쟁에 대비하도록 충고하겠소. 그리고 필요하면 돕겠다고 전하겠소.”

정치 때문에 위기를 방관하다고 생각해 인상을 찌푸린 카를 데인 경이 마지막 말에 조금 웃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은 소문대로 정의로운 기사였다.

“주군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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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과 로드릭 상회 소속 상인을 동원해 북쪽 소식을 계속 확인했다. 하루 뒤에 모몬트 가문 몰락 소식이 전해지고, 이틀 뒤에 볼프 사트로 후작이 소집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봉건국가의 제후치고 대단히 빠른 편이지만, 이미 군집한 적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흘 뒤에 체스터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은 검독수리 요새 아니면 붉은 산이었다.

검독수리 요새는 프란시스 가문과의 오랜 전쟁으로 방비가 잘 되어 있지만, 붉은 산은 달랐다. 경험이 부족한 하인츠 가문의 새 주인은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몬스터 무리에 덜컥 겁을 먹고 사방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연히 로벨에게도 전령이 찾아왔다.

“과거의 붉은 산이 아니군요.”

“늙은 하인츠가 못되긴 했어도 정치는 잘했어. 12기사 가문 사이에서 큰소리 텅텅 쳤으니까.”

로벨 손에 고기반죽이 되었지만 말이다.

로벨은 부르지 않았는데 알아서 모인 늑대성 중진들을 쭉 둘러보았다. 표정을 보아 긴말이 필요 없었다.

“출진 준비해.”

누구는 기뻐하고, 누구는 한숨지었지만, 대부분은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 전쟁이 될지도 몰라.”

로벨의 말에 긴장감이 피어났다.

볼탄 반도에 적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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