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버그베어
추수제가 끝나자 공허한 들판 위로 차디찬 북풍이 불어왔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이 하나둘 떨어지고, 아침저녁으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더니, 기어이 처마 위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로드릭 시민들은 농사도 장사도 일찍 접고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냈다. 새끼줄을 꼬고, 대마를 다듬고, 양털을 벗기고, 가죽을 재웠다.
“으... 냄새... 장난이 아니야...”
외팔이 더치가 코를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는 악취가 가득한데, 그중에서 가장 심한 악취가 무두질하는 악취였다.
“늙다리 잭슨이 보름간 안 씻은 겨털로 콧구멍을 후비는 느낌이야.”
“끄, 끔찍하구만...”
지역마다 무두질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이곳 볼탄 반도에서는 생가죽의 터럭과 지방을 제거하기 위해 삭힌 오줌과 묽은 똥물에 번갈아 담그고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장기간 건조했다. 자연히 고통은 모두의 몫이었다.
“시내에서 무두질을 금지하던가 해야지. 이거 너무 하잖아.”
“성벽 때문에 냄새가 안 빠지는 거 같소.”
그래도 고지대에 위치한 늑대성은 한결 나았다.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등등 울프 용병단 간부진은 군사보고를 핑계로 늑대성에 찾아와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마녀 키르케는 흙발로 홀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빽! 소리쳤고, 아야와 이야카를 가득한 친구들에 기뻐서 춤을 췄다. 하지만 2층 집무실은 조금 심각했다.
로벨은 흐룬팅을 닦던 헝겊을 둘둘 말아 치우고 나긋하게 책망했다.
“아직도 100명을 못 채웠어?”
펄프 대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덩굴성에서 전사한 결원을 보충하고, 추가로 100명을 모집 중인데, 이게 쉽지 않았다. 펄프 대장이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에르나 왕국이나 잉그비아 왕국이나 죄다 전쟁 중이다 보니 쓸 만한 녀석들은 그리로 빠지고 없습니다.”
겨울이 오면 일손을 놓는 것은 용병도 마찬가지라, 더 늦기 전에 한탕하려고 볼탄 반도를 빠져나갔다.
농사가 싫어서 싸구려 칼 한 자루 비켜차고 오늘부터 나 용병이네 하는 어중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그런 녀석을 고용하는 것은 2, 30명 규모로 몰려다니던 초창기 때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신참은 오래 살지 못했다.
“영주님의 책임도, 아니, 우리 책임도 조금 있습니다.”
“우리? 왜?”
“주변에 도적놈을 가만두지 않으니까요. 영주 나으리와 상인이 도적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자연히 돈을 쓰지 않지요. 칼밥 먹고 사는 놈들이 버텨나겠습니까.”
“뭐라구요?”
어린 집사가 분기탱천해서 감히 영주님 탓을 하냐고 소리쳤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용병을 고용 못 하면 좋은 일이었다. 3초 정도 침묵한 후 안면을 바꿔서 말했다.
“뭐, 용병이 씨가 말랐으면 어쩔 수 없죠. 솔직히 지금도 너무 많아요. 뉴 로드릭 마을하고 회색 산에 박아놓은 놈팡이를 해고하는 게 어때요?”
“안 돼. 두 곳 모두 주요한 거점이야.”
로벨은 용병을 모을 방법을 고심했다. 어중이떠중이라도 일단 받아서 빡세게 훈련시키는 방법하고, 외지에서 용병을 영입하는 방법이 있었다.
“네일 공국은 어때?”
네일 공국 출신인 펄프 대장이 움찔했다. 볼탄 반도에 정착한 세월이 길지만, ‘고향’이란 단어가 주는 그리움은 세월 이상으로 무게가 있었다.
“네일 공국 놈들이야, 뭐, 쓸 만하지요. 걸음마를 떼자마자 도끼를 가지고 노는 놈들이니까요.”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를 생각하면 아주 농담은 아니었다.
“그쪽은 전쟁이 끝났지?”
“어느 동네의 야를(Jarl:백작급 족장) 둘이 죽네 사네 싸웠는데, 초가을에 둘 다 죽었습니다.”
“아, 진짜 죽었군요...”
어린 집사가 참신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포비아 왕국에서는 백작급 귀족이 죽는 일은 흔치 않았다. 펄프 대장은 피식- 웃고 말했다.
“아들하고 동생이 각각 직위를 계승했으니 봄이 오면 다시 싸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조용합니다.”
네일 공국은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삭막한 곳이라 싸워도 늦봄과 초가을에 싸워야 했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한동안 조용할 것이다.
“그럼 네일 공국 용병을 고용하자.”
로벨이 참 좋은 생각 아니냐는 듯 콧김을 뿜었다. 하지만 펄프 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네일 공국 사람은 체격이 좋고 성격이 호방하지만 군인으로 별로였다. 실제로 네일 공국 출신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은 거의 없었다.
“잠깐만, 붉은 수염 용병단이 있잖아?”
“그놈들도 용병보다 무법자에 가깝습니다. 영주님께서 원하는 병사가 될 수 없을 겁니다.”
로벨은 자신이 원하는 병사가 뭔지 잘 몰라 갸우뚱했다. 펄프 대장은 야만족의 후예가 얼마나 무례하고 잔인한지 설명하는 대신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지요. 포클랜드로 사람을 보내 찾아보겠습니다.”
로벨은 한숨 쉬고 중얼거렸다.
“거기라고 다를 거 있을까.”
@
펄프 대장이 열심히 소문을 퍼트린 덕분에 갈 곳 없는 용병들이 많이 찾아왔다. 허풍쟁이의 표현을 빌려 ‘칼날과 칼자루도 구분 못하는 머저리’를 제외하면 쓸 만한 용병은 몇 되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정말 훌륭한 재주지만, 우리 고용주가 원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처럼 똑똑한 친구가 왜 용병일을 하나? 다른 일을 찾아보게’ 등으로 좋게 좋게 돌려보냈다.
하지만 용병짓 하겠다고 고향땅을 떠나온 젊은 사내들이 ‘그렇군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선뜻 돌아갈 리 없었다.
자칭 용병, 타칭 불한당은 로드릭 시티에 스며들어 온갖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다. 펄프 대장의 평가는 전쟁에서 쓸모가 없다는 뜻이지 주먹다짐을 못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늘만 벌써 3건이에요.”
시민을 폭행하고 잡혀 온 떠돌이 용병이 열네 명이었다. 어린 집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감옥에 가둬봐야 똥만 싸지르는데, 그냥 손목 하나 떼어내고 풀어주는 게 어때요?”
“그 정도 죄는 아니잖아.”
옛날 같으면 외지인을 모두 쫓아내면 되는데, 상업화된 도시에서 그리할 수 없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3, 4명씩 조를 짜 교대로 순찰시켰다. 그러나 실수였다. 혈기로 따지면 울프 용병단도 만만치 않았다. 제2의 고향 로드릭 시티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떠돌이 용병이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 결과 추위와 악취와 폭력으로 도시가 난장판이 되었다.
“이런 일에 영주님이 나서는 것도 아니에요.”
로벨은 엉망이 된 도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부득이 무장을 갖추고 늑대성을 나섰다.
펄프 대장을 비롯한 최고참 울프 용병단을 대동하고, 작지만 위풍당당한 깃발도 세우고, 우렁차게 콧김을 내뿜는 모닝스타를 타고 시가행진하니 무시무시했다.
병장기와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철갑을 씌운 군화가 땅을 밟는 소리. 크고 높고 뾰족한 각양각색 투구 아래 흉흉한 눈빛이 번득였다.
선량한 시민들은 꽁꽁 닫은 대문과 창문을 열고 영주님을 배알했고, 죄진 시민과 떠돌이 용병은 그늘 속에 숨거나 성 밖으로 도망쳤다.
“얌전히 따라와! 이 자식! 힘쓰지 마!”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는데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펄프 대장이 앞서 순찰을 보낸 울프 용병단이 사내를 하나 포박해 끌고 왔다. 정답지 못한 스킨십이 꽤 있었는지 얼굴이 잔뜩 부어있었다.
“기사 나리가 오신다고 공고를 했는데 사고를 치다니, 저건 답이 없네요. 나으리, 칠까요?”
허풍쟁이가 목을 싹둑 하는 시늉했다.
로벨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로벨이라고 마냥 착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경고하는데도 사고를 친다면 본보기가 필요했다.
“내 앞으로 데려와.”
로벨은 시가행렬을 세우고 체포된 떠돌이 용병을 보았다. 외팔이만큼이나 덩치 좋았다.
떠돌이 용병은 귀티가 좔좔 흐르는 전투마와 전투마의 주인을 보고 난동을 멈췄다.
“당신이 로드릭 공작이시오?”
다소 투박하지만 격식 있는 말투였다. 로벨은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어느 지방의 누구요?”
“깊은 골의 데인 가문 장남, 카를 데인이오.
로벨은 잠깐 침묵했다. ‘깊은 골’은 알지만 ‘데인 가문’은 몰랐다. 포비아 왕국의 기사 가문이 못해도 1천 5백 개는 되니 전부 알 수 없었다. 다만, 체격을 보나 말투를 보나 기사 내지 기사 가문의 후예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포박을 풀어줘.”
“영주님?”
“기사잖아. 죽일 때 죽이더라도 모욕은 하지 마.”
로벨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기사로 자라온 천생 기사라 어쩔 수 없었다. 울프 용병단은 투덜거리며 포승줄을 풀었다.
카를 데인 경은 손목을 문지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몸싸움을 벌인 울프 용병단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자존심을 보아 확실히 기사였다. 그래서 살짝 화가 났다.
“가문에 부끄럽지 않소?”
기사씩이나 되는 자가 용병 노릇을 하겠다고 떠돌아다니는 것도 한심하고, 이렇게 체포되어 끌려오는 것도 한심했다.
“부끄러워할 가문이 남아있지 않소.”
카를 데인 경은 뚱하게 대답했다. 로벨은 당황한 표정을 숨겼다. 뭐랄까, ‘네 부모가 그리 가르치더냐!’ 혼냈더니 ‘가르쳐줄 부모가 없었소’ 하는 격이었다.
카를 데인 경은 가죽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우고 다시 말했다.
“공작을 뵙기 위해 부득이 소란을 피웠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야야, 어디서 짱돌을 굴러가는 소리 나지 않냐?”
“오! 너도 들었어?”
허풍쟁이 등이 대놓고 속닥였다. 카를 데인 경이 경이란 것을 믿지 않는 말투였다. 로벨을 알현하기 위해 소란 피웠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어째서?”
“깊은 골을 아시오?”
“북동쪽에 네일 공국과 맞닿은 협곡 아니오. 과거 아몬드 프란시스 공작이 3천 명의 바바리안을 불태워 죽인 곳이지.”
로벨이 콧대를 세우고 몇 안 되는 지식을 자랑했다. 수학과 문학은 못해도 역사는 빠삭했다. 특히 볼탄 반도 전쟁사는 수도의 대학생 못지않았다.
“그곳이 지금 어찌 되었는지 아시오?”
로벨이 볼탄 반도 공작이라 해도, 북해 연안과 네일 공국 국경은 사트로 가문의 영역이라 발이 닿지 않았다. 더욱이 깊은 골 같은 오지는 관심가질 일이 없었다.
“질문으로 답하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로벨이 거북한 표정을 짓자 허풍쟁이를 비롯한 울프 용병단은 드디어 왔구나 싶어서 병장기를 쥐었다. 날이 차고 군장이 무거우니 훌딱 해치우자는 분위기였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기사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이 한결 빨라졌다.
“전부 죽었소. 전부 말이오. 기사도, 농민도, 여자도, 아이도, 모두 괴물에게 살해되었소.”
괴물이란 단어가 카를 데인 경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덩굴성에서 크게 데인 울프 용병단은 동작을 멈췄다.
“괴물이라 했소?”
“공작께서 괴물과 싸우기 위해 용병을 고용한다고 들었소. 그래서 찾아왔소. 깊은 골이오. 깊은 골을 조심하시오.”
로벨은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났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말한 죽은 자의 왕을 생각했다.
“그 괴물의 이름이 무엇이오.”
카를 데인 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씹듯이 내뱉었다.
“버그베어요. 버그베어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