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축제
농촌의 추수제와 도시의 추수제는 사뭇 달랐다. 농촌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축하하는 잔치지만, 도시는 정해진 날에 정해진 행사를 치르는 기념일 느낌의 축제였다.
“잔치와 축제의 차이가 뭐야?”
“규모와 구성원이요.”
어린 집사의 설명은 항상 명확했다.
시민들은 손님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창문에 랜턴을 걸었다. 도시의 거리가 휘황찬란해졌다.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외지인이 찾아왔다. 인근 지역의 영지민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먼 곳에서 온 기사와 부르주아도 있었다.
시장 상인들은 슬그머니 업종을 바꿔서 술과 고기와 과자를 판매했다. 세금을 내지 않으니 불법이지만, 관대해진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은 하루 눈감아주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뱃노래를 부르는 중년 사내와 좌판 사이로 은밀한 눈빛을 교환하는 젊은 남녀와 꿀을 바른 비스킷을 양손에 쥐고 함박웃음을 짓는 꼬마 숙녀가 축제의 열기 속에 어지럽게 스쳐 갔다.
“밤에는 더 할걸요.”
“왜? 캠프파이어라도 하게?”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인구가 늘어나면서 건물과 건물 사이에 가건물이 끊임없이 지어졌다. 번성하는 도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좋은 일은 아니었다. 화재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왜 그리 불을 좋아하는지. 쯧.”
어린 집사는 노인처럼 혀를 찼다.
추수제 보름 전부터 모닥불을 피우게 해달라는 청원이 매일 올라왔다. 그러나 공들여 쌓은 도시를 하룻밤 유흥으로 날릴 생각이 없는 어린 집사는 한사코 반대했다. 결국, 사형수 공개처형과 유랑극단의 밤샘 연주로 타협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골목길을 지나 시장 한가운데 도착했다. 이틀 전에 설치한 교수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미신을 신봉하는 몇몇 시민들은 사형수의 피를 받을 수 있게 참형을 해달라고 졸랐는데,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가 질색해서 교수형으로 진행되었다.
로벨은 밧줄을 살피는 사형집행인을 보고 중얼거렸다.
“사람 죽는 게 뭐 재미있다고 좋아하지?”
“죽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좋아하는 거죠.”
“정말?”
“...그렇게 믿자고요. 리암 수사님이 충격 받으니까.”
어린 집사는 허가 없이 장사한 주괴 상인을 교수대로 보내자고 했지만, 로벨은 그만한 죄로 사형은 과하다 생각해 기각했다. 사형수로 뽑힌 것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온 사트로 시티 좀도둑과 유부녀를 강간하고 짐말을 훔쳐 도망가다 울프 용병단에게 체포된 떠돌이 강도였다.
“조금 있으면 집행이네요. 보고 가실 거예요?”
“아니야. 관심 없어.”
로벨은 준비가 잘 된 것을 확인하고 지미와 루시 여관으로 향했다.
허름한 오두막으로 시작한 지미네 여관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럴듯한 2층짜리 목조건물 여관으로 발전했다.
“오? 마구간도 있네?”
“상인들은 짐말이나 당나귀를 하나씩 끌고 오니까요.”
로벨은 사람이 자는 곳보다 말이 쉬는 곳에 관심을 보였다. 늑대성의 마구간과 비교하면 좀 비좁지만, 관리를 잘해 깨끗했다. 말똥 냄새도 많이 안 났다.
“이 정도면 모닝스타를 데리고 와도 되겠어.”
축제 때문에 부득이 성에 놓고 온 모닝스타를 떠올리며 쾌재를 불렀다.
“앗! 영주님이다!”
그때, 짚더미 사이로 자그마한 꼬마들이 나왔다. 깜짝 놀라기에는 너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너희들은...”
지미와 루시의 쌍둥이 아이들이었다. 얼굴은 똑같은데, 머리카락은 한 명은 한 갈래로, 다른 한 명은 두 갈래로 땋았다. 직관적인 구분법이었다.
“우와! 진짜 많이 컸네요?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 지금 5살인가? 6살?”
로벨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 내려다보자 쌍둥이는 겁을 먹고 짚더미 속에 다시 숨었다.
“우린 잘못한 거 없어요!”
어린아이의 화법은 쉽게 따라갈 수 없었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그냥 맞장구쳤다.
“정말?”
“정말이에요! 말먹이도 잘 주고! 빨래도 잘 걷어요! 그러니까 잡아가지 마세요!”
로벨은 어린 집사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어린 집사는 자타가 공인한 유능함을 십분 발휘했다.
“루시가 꼬마들을 혼낼 때 영주님을 판 것 같은데요? 말 안 듣는 아이는 무서운 영주님이 잡아가서 혼내준다고요.”
로벨은 시무룩해졌다.
“내가 무서워?”
“저 꼬마들한테는 무섭겠죠. 큰 성에서 큰 말을 타고 나오니까요. 잠깐만, 어른한테도 무서워야 정상 아닌가?”
로벨은 짚더미 속에서 머리만 내민 쌍둥이를 쓰다듬고 여관 안을 훔쳐보았다. 축제는 즐기고 싶지만, 거리의 소란은 싫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지미는 벽난로에 걸린 고기스튜를 쉼 없이 휘젓고, 루시는 열서너 살쯤 된 급사와 함께 술을 날랐다. 로벨이 끼어들지 않아도 충분히 바빠 보였다.
“맥주 한잔 할까 했는데. 안 되겠다.”
로벨은 머리를 젓고 여관에서 떨어졌다.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영주님이 오면 더 좋아할 텐데요. 볼탄 반도의 공작이자 무적무패의 기사가 즐겨 찾는 여관이라고 홍보하면 기사고 상인이고 죄다 몰려올 테니까요.”
어린 집사는 장사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읽었지만, 굳이 권하지 않았다. 내 장사 아니니까, 세금만 잘 내면 되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사형집행이 끝난 듯 아까보다 소란스러웠다. 로벨은 신경 쓰지 않고 상인들에게 관심에 보였다.
먹거리를 주로 팔지만, 선물용으로 적당한 장식품도 일부 있었다. 로벨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장식품에 관심을 가졌다.
“제법 솜씨가 좋은데? 에르나 왕국 물건이야?”
나무로 만든 값싼 장난감이 대부분이지만, 유리 세공품과 상아 조각품도 있었다. 깨지지 않게 짚으로 감싸놓았다.
“아이란드 왕국 물건입니다. 상아를 다루는데 최고지요.”
장식품 상인은 싱겁게 반응했다. 추수제 때문에 찾아온 외지 상인이라 로벨과 어린 집사를 모르는 듯했다.
로벨은 기사 모양 조각품과 야생마 조각품을 차례로 들어보고 흥미를 잃었다. 진짜 갑옷과 진짜 말을 가지고 노는 입장에서 재미가 떨어졌다.
“이런 걸 사는 사람이 있어?”
상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런 걸 사고 팔정도로 돈이 모인다는 거죠. 좋은 일이에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악의 없이 가게 평판을 깎은 후 태연히 떠났다. 상인은 기사와 기사 종자가 충분히 멀어지자 가래침을 뱉었다.
로벨은 몇 군데 더 구경하다가 사람이 모이자 자리를 피했다. 외지인만큼이나 내지인도 많아서 금방 영주님을 알아보았다.
“이제 목장으로 가요.”
고기를 공급하는 목장을 점검할 차례였다. 로드릭 시티 동쪽 성문으로 빠져나와 목초지를 향했다.
젖소 20마리로 시작한 축사는 시장에 우유와 고기를 공급하면서 점차 규모를 키웠다. 어린 집사 또래의 목동도 제법 덩치가 커져서 어른 느낌이 났다. 직함도 ‘영주님의 목장 관리인’이라 속된 말로 끗발이 생겼다.
“앗! 영주님!”
키도 크고 수염도 거뭇거뭇해진 목장 관리인이 로벨을 보고 화급히 달려왔다. 험상궂은 얼굴의 일행이 영주님이란 말에 놀라서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도축업자겠지?”
“외모가 아니라 장소와 시기로 볼 때 그럴걸요.”
로벨은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도축업자를 함께 불렀다. 힘깨나 쓸 거 같은 사내가 높은 분의 부름에 어깨를 움츠렸다.
“고기가 부족해서 온 거야?”
“예, 예, 예, 예? 예, 예, 예!”
“...공용어를 할 줄 알면 그걸로 해줄래?”
도시 외곽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며, 겸사겸사 소나 양을 잡아주는 사내였다. 늑대성에 들어오는 고기도 이 사내가 작업한 고기들이었다.
“어쩐지 요즘 고기가 좋더라. 가죽도 깔끔하고.”
로벨이 소문처럼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내는 한결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 5마리와 돼지 11마리를 잡았으니까, 모자라지는 않을 겁니다요.”
전문가가 필요 없는 닭이나 토끼도 판매하니 추수제 동안 고기 냄새가 끊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넌 무슨 일이야?”
로벨은 습관을 어쩌지 못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본의 아니게 심문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저는, 거시기, 이 친구가 심심할까봐...”
로벨은 목장 관리인과 푸줏간 주인을 번갈아 보았다. 기묘하게 어울리는 우정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놀아. 축사만 둘러보고 갈게.”
영주님이 왔는데 신경 쓰지 말란다고 안 쓸 영지민은 없었다. 로벨을 동경해온 목장 관리인은 더욱 그러했다. 어린 집사가 저리 가라고 손을 휙휙 저어도 졸래졸래 따라왔다.
“여기도 오랜만이야.”
젖소 20마리를 키우기도 비좁던 축사는 증축을 거듭해서 두 배로 커졌고, 그걸로 모자라 새로 한 동을 짓기까지 했다. 우유를 짜는 암소만 40마리고, 수소와 송아지까지 합치면 50마리 가까이 되었다. 이것도 추수제 준비로 몇 마리 줄인 것이었다.
“이 많은 녀석을 혼자 돌봐?”
목장 관리인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물을 가져다주는 농부가 따로 있고, 우유 짜는 아주머니도 있어서 할 만해요.”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목장 관리인을 한 명 더 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려다가 한껏 올라간 눈초리에 포기했다.
로벨은 배고픈지 자꾸 침을 바르는 송아지를 떼어내고 도시 남쪽 추경지로 향했다. 이삭줍기가 끝난 밀밭은 황량했다. 봄과 여름에 푸르게 자란 작물은 알알이 털려서 노오란 짚이 되었다. 햇볕에 바짝 말려 지붕을 얹고, 침대를 갈고, 소와 말의 먹이로 쓸 것이다.
“늑대성의 말들도 여물을 먹이면 좋을 텐데요.”
“안 돼. 우리 모닝스타는 콩 아니면 입도 안 대.”
“영주님이 버릇을 잘못 들였어요.”
“곡물을 먹어야 힘을 쓴다고.”
로벨과 어린 집사는 마지막으로 제분소를 둘러보았다.
농부의 일은 추수제를 기점으로 끝나지만, 제분소의 일은 서리가 내리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지민과 자유민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시간에도 물레방아는 쉼 없이 굴러갔다. 쿵. 쿵. 쿵덕. 쿵. 어린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숙하지 못한 남녀가 물레방앗간을 찾는 이유가 있죠.”
“응? 왜 찾는데?”
“...영주님은 아직 몰라도 돼요.”
누가 연장자인지 모를 대화를 하는 사이, 초래한 제분소 관리인이 나왔다. 로벨은 활짝 웃었다. 광장도 바뀌고, 여관도 바뀌고, 목장도 바뀌었는데, 물레방앗간만큼은 옛날 그대로였다.
“영주님, 집사님,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옛날 촌장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제분소 관리인은 연신 기침하며 로벨을 맞이했다. 예전에는 영지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민이었지만, 지금은 몇 안 남은 농민과 함께 근근이 먹고 사는 늙은이가 되었다.
“오늘 같은 날은 쉬는 게 어때?”
“그럴 수야 없지요. 아들 내외도 종일 일하는데요.”
로벨은 고집스러운 당나귀를 연상하고 다시 미소 지었다. 크고 화려해진 도시도 좋지만, 어릴 적 정취가 남은 시골도 좋았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 세대의 영지민은 몇 남지 않았다. 쉬지 않고 굴러가는 저 물레처럼 세월도 하염없이 흘러갔다.
“내가 도울 일 있어?”
“이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제 아들놈이나 굽어 살펴주십시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영내 순시를 마치고 늑대성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 해가 서쪽 구릉으로 기울고 있었다. 바람이 사늘해졌지만, 추수제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렇게 한해가 마무리되네요.”
어린 집사가 언덕 아래를 돌아보며 말했다.
“겨울을 준비하고, 봄을 맞이해야지.”
“으으... 그렇게 말하니까 벌써 지겹네요. 4, 50년쯤 산 노인들은 어떨까요?”
“글쎄... 우리가 그 나이 되면 알겠지?”
로벨은 그만 가자고 어깨를 두드렸다. 펄프 대장과 마녀 키르케가 늑대성만의 작은 추수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로벨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성문 앞에서 인사를 남겼다.
“Happy Thanksgiving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