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한해
로벨은 강철성 아랫마을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기억 속에 강철성과 아주 딴판이었다.
마을 중앙에는 2, 3층짜리 고층건물이 줄지어 있고, 마을을 관통하는 북부대로 양쪽 끝에는 돌과 나무로 만든 관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활기가 가득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퍽 암울한 분위기였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막 강철성의 주인이 되었을 때니 그럴 만했다. 전쟁의 여파가 뼛속까지 스며든 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실종자가 발생하니 활기가 있으면 그게 이상했다.
‘그래도 이렇게 바뀔 수 있나?’
로드릭 마을이 로드릭 시티로 발전하는 동안 강철성도 크게 발전했다. 경제나 경영에 무지한 로벨이지만, 지난날의 기억을 바탕으로 몇 가지 추리할 수 있었다.
‘검은 숲의 유민을 받아 인구를 늘리고, 붉은 산이 침체된 사이 광산을 개발해서 수익을 늘렸어.’
도반 도트넘 백작이 꾸미고, 로벨이 수습한 일들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괘씸했다.
“저쪽이 대장간 같습니다요.”
허풍쟁이가 강가를 가리켰다. 강철산에서 흘러오는 강줄기를 따라 십여 개의 대장간이 늘어서 있었다. 돌덩이나 다름없는 광석을 잘게 깨서 커다란 용광로에 집어넣고, 대여섯 명이 풀무를 밟아 화력을 높였다. 그렇게 한바탕 땀을 흘리면 철광석은 붉은 쇳물이 되어 거푸집을 채웠다.
“와아! 멋지다.”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모으고 감탄했다. 로벨도 동의했다. 마을의 활기 중 7할은 대장간이 채우고 있었다.
“기사 나리, 어디로 갈까요?”
예의를 따지자면 영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을 먼저 만나야 하지만, 그보다 주괴를 만드는 대장간이 궁금했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만드는지 알아야 늑대성에 돌아가서 어린 집사에게 할 말이 있었다.
“잠깐 구경하자.”
로벨 일행은 마을을 지나 강가로 향했다. 좋게 말하면 구경이고, 솔직히 말하면 정탐인데, 어느 쪽이든 중무장한 용병을 30명이나 거느리고 하기에는 시끌벅적했다.
아낙들은 호기심이 겁을 잡아먹은 자식을 치마폭에 싸서 숨겼고, 사내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면서도 용병들이 화를 낼까 마침 필요한 연장인 척 연기했다. 허풍쟁이가 히죽였다.
“오늘따라 장작 패는 집이 많구만?”
처마에 못질하는 집이랑 배수로에 곡괭이질 하는 집도 많았다. 로벨은 강철성 영지민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참 부지런한 마을이야.”
허풍쟁이 이하 용병들이 진담이냐는 듯 쳐다보아서 조금 당황했다.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요.”
로벨 일행은 숨죽인 시선에 쫓기듯 마을을 벗어났다. 그러나 주민은 약과였다. 쇠와 불로 단련된 대장장이들은 더했다. 로벨 일행이 다가오자 일손을 멈추고 모여들었다. 망치와 삽과 집게(!)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로벨은 비로소 분위기를 깨닫고 모닝스타를 세웠다. 정수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중년 대장장이가 앞으로 나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곳은 도반 도트넘 백작님이 다스리는 대장간입니다.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강철성의 비호를 받는 곳이니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머리털 나고 경고나 위협 비슷한 것을 받아본 적 없는 로벨은 단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럼 제대로 찾아왔네?’ 그래서 자기소개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희가 주괴를 만들어?”
로벨의 무시에 대장장이가 당황했다. 강철성의 권위가 통하지 않으면 강철성과 비슷한 수준의 제후였다.
“네에. 네. 제련소이기도 하니까요...”
“얼마나 만들었는데? 왜 그렇게 많이 만드는 거야?”
배운 것이 부족한 대장장이지만, 저 질문에 대답해서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고 쫓아내거나 무시하기에는 크고 두꺼운 쇳덩이들이 불안했다.
“저희가 말할 수 없는 것이라...”
“얼마 전에 재미있는 친구를 체포했어. 내 도시에서 몰래 철 장사를 하던 친구야.”
로벨은 안장뿔에 팔을 올리고 살짝 기대었다. 권위와 여유가 동시에 보이는 자세였다.
“그 친구 말이 여기서 주괴를 가져왔다는데, 이 정도면 참견해도 되지 않을까?”
대장장이는 ‘되고 말고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요!’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대장장이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 아니십니까?”
여름이 지났다지만 아직은 좀 이른 듯한 모직 꼬뜨를 입고 후드를 깊이 눌러쓴 사내였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슬쩍 풀어 경계했다. 예로부터 얼굴을 가린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하지만 로벨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넌 뱀파... 도트넘 가문의 종복이지?”
일전에 바바 야가와 와이트의 등장을 경고한 뱀파이어였다. 로벨은 반가움과 껄끄러움을 동시에 표출했다.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어?”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영지에 무장한 용병들이 들어왔는데 모를 수 없지요. 백작님이 기다리십니다. 강철성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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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출신 ‘싸움개’ 닥스가 실망한 듯 말했다.
“강철성이라더니, 뭐야, 강철이 아니잖아?”
그러자 마녀 키르케가 허리에 손을 얹고 ‘에헴!’ 거렸다.
“강철로 어떻게 성을 만들어요? 강철산이 가까우니까 강철성이죠!”
“아, 그런 거요? 마녀 아가씨가 보기보다 똑똑한데?”
“마녀 아니고 마법사! 똑똑한 건 맞지만. 이히힛!”
로벨은 잘난체하는 마녀 키르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계속 웃을 수 없었다. 늑대성보다 크고 화려한 아성에서 도반 도트넘 백작이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기다렸다고?”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찾아올 거라 생각했소. 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우선 목을 축입시다. 좋은 와인을 준비해두었소.”
그리고 정중한 동작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로벨도 당황했지만, 로벨을 따라온 마녀와 용병들은 더 당황했다.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수?’
‘모, 몰라, 임마.’
‘속임수 아닐까요? 함정이거나? 어디 소설을 보니까 피의 결혼식이라고...’
정적을 초대해서 암살하는 것은 굳이 소설에서 찾을 필요가 없을 만큼 흔한 일이었다. 마녀 키르케를 필두로 모두가 경계하자 도반 도트넘 백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했다.
“델 포니 산 최고급 와인이오.”
“와!”
술고래 마녀가 언제 의심했냐는 듯 냉큼 뛰어갔다. 애꾸눈 이하 용병들은 망아지 같은 마녀 태도에 한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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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확신했다. 이런 귀하고 비싼 와인에 독을 탈 리 없다고 말이다. 우습지만 나름 일리 있었다. 100페닝짜리 고급 와인이나 10로닝짜리 와인 찌꺼기나 마시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굳이 비싼 와인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와인의 명가 델 포니 수도원의 최고급 생산품을 한 모금 마시고 ‘이히힛!’ 웃었다. 허풍쟁이는 ‘저게 벌써 취했나?’하고 바짝 긴장했다.
“잉그비아 왕국이 아니라고?”
하지만 모두가 와인을 즐기지는 못했다. 로벨은 예상과 다른 전개에 술 생각을 깨끗이 지웠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맛을 다졌다. 로벨의 목덜미로 시선이 가는 것이 술보다 피가 끌리는 듯했다. 순결한 처녀의 피는 최고급 와인보다 향이 깊었다. 그러나 죽은 자의 왕, 밤의 주인, 야만인의 학살자라 불리는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는 인내심이 강했다.
“무기가 필요한 곳은 잉그비아 섬이 아니라 이곳 볼탄 반도요.”
로벨은 주먹을 쥐고 따지듯이 물었다.
“볼탄 반도에는 이제 적이 없는데? ...그쪽을 빼면 말이야.”
“죽은 자의 왕이 부활했소.”
“내가 해치웠어.”
“그자 하나가 아니란 것을 알잖소?”
고대 볼탄 반도의 왕은 다섯이었다. 페르젠과 헤르만과 로벨이 해치운 와이트를 제외해도 두 명이 남는다.
“그리고 나도 제외하시오.”
“아... 아?”
뱀파이어 군주의 이명(異名) 중 하나가 ‘죽은 자의 왕’이었다. 강철성의 백작으로 부르다 보니 옛 별명을 잊고 있었다.
“그래도 한 명이 남지. 누군지 아시오?”
로벨이 알 리가 없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미소 지었다.
“샘 포클과 옛 신의 종에게 가장 강경히 저항한 자요. 곰처럼 사나우나 여우처럼 영악한 자요. 누구보다 잔인하지만 참을성이 강한 자요.”
마도의 수호자가 하는 말이라 듣기만 해도 오싹했다. 와이트보다 까다로울 것이 분명했다.
“그럼 어떡해? 싸우지 않을 방법은 없어? 이제 전쟁은 싫은데...”
로벨은 어린 집사와 영지민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전쟁을 준비하시오. 그것이 공작의 사람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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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성까지 온 성과가 있었다. 어린 집사가 좋아할 성과라면 강철성은 잉그비아 왕국과 교역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왜 채굴량을 늘렸냐고 물으니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내년 봄이면 농부도 무기가 필요할 거요.”
로벨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흘려듣지도 않았다. 울프 용병단을 충원하고 물자를 비축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집사가 좋아하지 않겠죠?”
마녀 키르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벨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할 거야.”
어린 집사가 알면 까무러치겠지만, 덩굴성의 손실을 메꾸고 100명의 용병을 추가 영입할 생각이었다. 그리하면 울프 용병단 총원은 500명이었다. 사설 용병단으로는 유래 없는 규모였다. 덤으로 늑대성의 가을 수입 중 태반이 사라질 것이다.
로벨의 이야기를 엿들은 싸움개 닥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쟁 전에 모집하는 편이 싸지 않소? 다른 용병단은 그러는데?”
지극히 평범한 용병의 발상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혀를 차고 말했다.
“그래서 걔네가 잘 싸우냐?”
“그건 모르겠지만...”
“전쟁은 호흡이야. 손발이 안 맞으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걍 고깃덩어리야. 우리 용병단이 무패의 용병단이라 불리는 게 뭐 대단한 무기나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잖아? 호흡이 잘 맞아서지.”
싸움개 닥스는 입단 첫날을 떠올리고 납득했다. 어디가나 대접받는 맨앳암즈가 농민병 수준의 풋맨에게 처참히 박살났다.
로벨의 용병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병사가 지휘에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훈련이 필요했다.
“지금 영입해야 내년 봄에 쓸만해 지지.”
싸움개는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쫄다구가 생기는데 싫을 이유가 없었다.
또 다른 성과는 값싸게 철주괴를 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채굴권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채굴작업에 필요한 인력과 시설을 생각하면 그냥 주괴를 사는 편이 좋을 거란 친절한 조언은 덤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얼마나 나쁘지 않은 지는 어린 집사가 셈을 해야 알겠지만, 로벨 생각에는 충분한 성과였다.
로벨 일행이 늑대성에 돌아왔을 때는 추수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농업보다 상업이 더 발전한 로드릭 시티지만 추수제는 빼먹지 않았다. 짜디짠 어린 집사도 추수제만큼은 소비를 권장했다.
로벨은 낫질하는 농부와 돼지 치는 아낙을 보며 미소 지었다. 로드릭 깃발을 본 아이들이 ‘영주님이 왔다! 영주님이 왔다!’ 외치며 성 밖 마을을 뛰어다녔다. 고작 6일 만의 귀환이지만 다들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싸움개 닥스가 포차드를 어깨에 기대고 중얼거렸다.
“난 추수제가 싫어.”
“왜?”
“한해가 끝나잖아.”
로벨은 옆에서 그럴듯하다 생각하며 위로했다.
“좋게 생각해. 새로운 한해가 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