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주괴
철은 전략물자라 함부로 거래할 수 없다.
광산에서 채굴할 때나 주괴로 제련할 때나 상인이 유통할 때나 무기로 제조할 때나 항상 지역 영주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주괴 상인이 있다고?”
“예. 어린 집사가 허락한 상인입니다요.”
“어디서 온 상인인데?”
“글쎄요... 강철성 아니면 붉은 산 아니겠습니까요?”
로벨은 미완성된 칼을 내려놓고 턱을 만졌다.
‘붉은 산은 전쟁 이후 대부분 광산을 닫았어. 그럼 강철성에서 온 상인인데...’
어린 집사가 허락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강철성에서 채굴권을 받아오면 더 싸게 철을 들일 수 있는데 주괴 상인을 받을 리 없었다.
“그 상인을 만나야겠어.”
로벨은 팔짱을 끼고 선언했다. 대장장이는 주름진 눈을 껌벅였다.
“아, 예. 가서 만나시지요.”
한평생 한우물만 판 장인은 외곬수라 눈치가 모자란 경우가 많았다. 로벨 자신도 비슷한 과(科)라 화내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몰라.”
“이런! 그런 문제가 있군요! 이봐, 짐, 그거 놓고 영주님을 앤더슨 씨에게 모셔다드려라.”
어린 도제는 놀라서 어버, 어버버하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분, 나아가 볼탄 반도에서 가장 높은 분이란 것을 알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로벨은 로드릭 시티의 몇 번째 짐인지 모를 짐에게 부탁했다.
“그럼 부탁해, 대장장이 지미.”
로벨의 호명으로 또 하나의 지미 스미스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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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물은 곡물이나 직물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원자재로 팔기보다 생산지-광산 아래에서 완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편이다. 가장 부유한 대장장이는 토너먼트를 따라다니는 대장장이지만, 가장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광산 아래 대장장이란 말이 있다.
물론, 광산촌의 대장장이만 제련하고, 다른 곳의 대장장이는 수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춤형으로 제작하여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열정적인 대장장이도 있으니, 그들을 위해 광물을 제련하기 좋은 주괴로 만들어 유통했다. 갑옷공방을 도시 한복판에 지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저희도 주괴를 사고 있어요. 큰 도시의 공방만큼은 아니지만, 기사님이나 용병님이 종종 무기와 갑옷을 주문하거든요.”
말문이 트인 대장장이 지미가 쫑알쫑알 떠들었다. 수다로는 남부럽지 않은 마녀 키르케와 리암 수사도 살짝 질릴 정도였다. 아야와 이야카는 못된 얼굴로 저거 깨물어도 되냐는 듯 눈을 흘겼다. 로벨은 복슬복슬한 늑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지 말라고 속삭였다.
인내는 쓰지만 결과는 달다는 말이 이럴 때도 통용되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주괴 상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마주칠 수 있었다. 주괴 상인 앤더슨은 큼직한 칼을 찬 기사와 대장장이 지미를 보고 냅다 도망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앤더슨 씨인데... 왜 도망가죠?”
“글쎄? 잡아서 물어보자.”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물어.”
인간으로 치면 40살이 훌쩍 넘은 늑대 남매지만, 타고난 사냥본능은 어쩌지 못했다. 으르릉 컹컹 거리며 탐스러운 엉덩이를 향해 질주했다. 건초가 실린 수레를 단숨에 뛰어넘고, 좌판을 요리조리 피해서 삐쭉 솟은 오리궁둥이를 덥석 깨물었다.
“끼이야옷!”
비명소리가 남달랐다. 마녀 키르케는 깔깔 웃었고, 리암 수사는 폭력을 용서하라며 성호를 그었으며, 대장장이 지미는 하얗게 질려서 ‘자, 잡아먹는 건가요?’ 따위를 물었다.
“입이 고급이라 안 먹어.”
로벨은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라 생각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피 빼고 뼈 발라낸 살코기에 익숙해져서 직접 사냥해 잡아먹는 일은 없었다. 가끔씩 토끼나 들쥐를 잡아도 마녀에게 물어다 주고 손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귀하게 자란 늑대였다.
로벨은 늑대 두 마리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주괴 상인을 만나러 갔다. 로벨도 귀하게 자란 기사라 서두르지 않았다. 모닝스타를 적당한 곳에 묶고 땀에 젖은 옷과 머리를 정돈했다. 급한 것은 로벨이 아니었다.
“나, 나으리! 살려주십쇼! 이놈들 좀 치워주세요!”
“괜찮아. 안 죽어. 아, 혹시 모르니까 목만 잘 지켜.”
주괴 상인은 ‘헙!’ 소리를 내고 목을 감싸 쥐었다. 그 덕분에 아야와 이야카는 편하게 엉덩이를 맛볼 수 있었다.
로벨은 말쑥한 모습으로 주괴 상인의 수레를 살폈다. 당나귀가 끌기에는 과할 만큼 많은 주괴가 쌓여있었다.
“이만한 양이면 어디서 훔쳐온 것은 아닐 테고...”
로벨은 철주괴를 하나 꺼내보았다. 체감상 6파운드 정도, 숏소드를 두 자루 만들 재료였다.
로벨은 주괴를 던져놓고 울기 직전의 주괴 상인을 돌아보았다.
“이제 이야기 좀 할까? 이 많은 철을 어디서 가져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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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심문은 아주 신사적이었다.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때리지도 않고, 손모가지를 자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포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주괴 상인은 거짓말을 하거나 도망갈 생각을 못했다. 옛 신의 사제와 마녀가 지켜보는데 거짓말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며, 송아지만한 회색늑대 두 마리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데 도망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로벨은 온화한 분위기에서 자백을 받았다.
“강철성에서 가져왔다고?”
로벨의 짐작대로 강철산의 철이었다. 그래서 심각했다.
“도트넘 백작이 허락한 거야?”
“그것은... 저기...”
주괴 상인 앤더슨은 죽을 맛이었다. 오늘 밤에 이곳을 떠서 사트로 시티로 갈 예정이었는데, 하필 오늘 딱 걸린 것이다.
로벨은 눈알 굴러가는 소리에 살짝 짜증이 났다.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잡고 고민했다.
‘역시 자를까?’
5.7피트 장신의 기사가 칼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면 누구라도 다급해지는 법이다. 주괴 상인은 납작 엎드려서 죄를 고했다.
“빼, 빼돌렸습니다! 몰래 빼돌렸어요! 살려주십시오!”
“빼돌려? 어떻게?”
로벨의 손이 아론다이트에서 떨어지자 주괴 상인은 안도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로벨은 자연스럽게 흐룬팅으로 손을 옮겼다. 산 채로 손을 자를 거면 예리한 흐룬팅이 좋았다.
“강철성에서 주괴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주 많이! 아주 많이요! 예, 예, 거기 대장장이 놈들이랑 작당했습니다! 조금, 정말 조금 빼돌렸습니다! 정말 티도 안 납니다!”
로벨은 주괴 상인의 횡설수설에 크게 놀랐다. 강철성에서 주괴를 찍어내서도, 그것을 대장장이와 작당해 훔쳐서도 아니었다. 주괴 상인의 수레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조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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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주괴 상인을 늑대성 지하감옥에 집어넣고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를 불렀다.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의 첨언을 애써 무시하며 시장에서 일을 설명했다. 노회한 용병들도 심각해졌다.
“어쩐지 영감이 자신 있게 만들어주게 하더니만, 그런 놈이 굴러들어왔군요.”
펄프 대장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미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 무안한 듯 살짝살짝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로벨의 관심사는 좀도둑이 아니었다.
“위험할까?”
무슨 위험인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애꾸눈이 안대를 문지르며 말했다.
“전쟁을 준비할 거면 무기를 만들지, 주괴를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애당초 무기를 만들어 영지민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경험 많은 용병단을 고용하는 쪽이 싸고 효율적이었다.
“그러면 역시 수출하려는 건데... 그렇게 많은 철을 어디에 팔려고...”
이것도 답이 나와 있었다. 작금의 유라피아 대륙에서 대량의 광물을 수입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잉그비아 왕국이잖아요!”
어린 집사가 볼때기에 손을 대고 비명을 질렀다. 황금을 낳는 거래처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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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의 히스테리가 하늘을 찌르니, 그랜드 챔피언이자 무적무패의 기사이자 폭풍성의 정복자이자 덩굴성의 구원자인 로벨도 더 이상 미루거나 피할 수 없었다. 허풍쟁이가 시무룩해져서 물었다.
“저도 피할 수 없는 겁니까요...?”
“응. 당연히.”
강철성으로 가는 사절단이 꾸려졌다. 말이 좋아 사절단이지, 유사시 한바탕 뒤집어엎고 도망 나올 무장집단이었다. 로벨의 직속 랜스 3인방을 필두로 싸움개가 이끄는 맨앳암즈 10명과 애꾸눈이 이끄는 아바레스터 10명과 허풍쟁이가 이끄는 스피어맨 10명이 호위로 붙었다. 울프 용병단 최정예들이었고, 어지간한 시골 장원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싸우러 왔다고 오해하면 어쩝니까요?”
“그러진 않을 거야.”
로벨은 자신 있게 말했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은 아주 껄끄러운 괴물이지만, 동시에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다.
“저도 준비 끝났어요!”
마녀 키르케가 봇짐을 싸들고 수레에 올라탔다. 시커먼 용병단이 그래도 사절단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마녀 키르케 덕분이었다. 허풍쟁이가 불만을 토로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인데 뭔 짐이 그리 많쇼?”
“상대가 상대인데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하죠!”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모르는 용병들도 늑대성과 강철성의 오랜 반목을 알기에 긴장했다.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 일도 있었으니, 칼부림이 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 곳과 거래할 생각을 하는 어린 집사가 신기할 정도였다.
“영주님!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우리 영지의 3년 치 예산이 달려 있어요!”
어린 집사가 손을 흔들며 응원했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허풍쟁이에게 말했다.
“...출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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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때는 가을이 좋았다.
봄은 따뜻하지만 춘궁기가 걸쳐 있어 먹을 것이 부족하고, 여름은 먹거리가 풍족하지만 더위와 장마 때문에 괴로우며, 겨울은 지옥이었다. 그냥 지옥이다.
“날씨가 좋아요.”
마녀 키르케는 수레 위에 정좌로 앉아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비스킷을 우물거렸다. 앞뒤로 한 번씩만 구운 비스킷이라 선원이 먹는 쉽 비스킷보다 부드러웠다. 설탕을 조금 뿌리면 간식으로도 먹을 만했다.
“그만 좀 먹으쇼! 아주 살림살이 거덜 내네!”
허풍쟁이가 혼을 내자 마녀는 재빨리 로벨에게 비스킷을 주었다. 로벨은 아무 생각 없이 마녀가 먹던 것을 깨물었다. 이걸로 살림살이를 거덜 내는 공범이 되었다. 허풍쟁이는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돌렸다.
북쪽 숲을 가로지르면 이틀이 안 걸리는 거리지만, 지난번 몬스터 소동 때문에 숲을 지나기가 껄끄러워 외곽을 빙 돌아갔다. 여정은 조금 늘었지만, 몸은 훨씬 편했다.
노랗게 여문 곡식과 통통하게 살찐 짐승이 어디가나 반겨주었다. 인근 영지의 주민들은 로드릭 깃발을 보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시했다. 영주가 직접 나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진상하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할 말은 아니지만,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대우였다.
로벨 일행은 가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걸었고, 사흘째 되는 날 강철성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적잖이 놀랐다.
강철성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번화하였다.